소설리스트

06. 오해는 오해를 부른다-(11) (77/190)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슐로이츠는 그 가호에 대해선 별달리 묻지는 않았다.

이전처럼 나는 슐로이츠의 뺨에 입을 맞추기만 하면 됐다. 다만 헥토르의 말을 듣고 난 탓인지, 가끔 슐로이츠의 입술에 시선을 저도 모르게 빼앗길 뻔한 적은 있었다.

물론 금세 눈길을 거둬 버리긴 했지만.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엔리코르도 헥토르도 떠나 버린 군부령이었지만 쓸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귀족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란데아 경!”

뒤를 돌아보니 라파엘이 후다닥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내 앞에 섰다.

“간부들 빈자리를 채운다는 얘기 들으셨죠?”

“아까 아그네스한테 들었어.”

“총사령관님이 당장 전부 보충할 생각은 없다고 하셔서, 일단 상급 준사관들 자리만 채울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부령의 준사관 자리는 총 64개였는데, 그중 최상위 일곱 명까지를 상급 준사관이라고 불렀다. 기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 느낌이라고 할까?

모순적이게도 위험한 임무는 거의 배정되지 않았으나, 세간의 평판은 그랬다.

무엇보다 상급 준사관이 되면 왕실에서 훈장을 수여했다.

라자크 왕국의 귀족에게 훈장이란 아주 중요하면서도 실리적인 명예였다. 3대째 훈장을 받지 못한 가문은 귀족의 작위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장이란 언제나 귀족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뼈다귀였다. 그래서 상급 준사관의 자리는 귀족들에게 주로 배정되었다. 원하는 귀족들도 많았고.

아무나 할 수도 없었다. 본인이 2년 이상 생도로 지냈거나 또는 지휘관 이상의 영관급 간부를 배출한 적이 있는 가문 출신이 지원 가능했다.

“4명은 이미 선정되었지만 군부령이 아닌 외부로 파견을 나갈 것 같고, 세 자리가 남았는데 이번에도 경쟁이 치열합니다.”

“벌써 세 자리밖에 안 남았다고?”

“이번이 유독 빠르게 마감됐습니다. 그런데 르페브르의 방계 가문에서는 아무도 지원을 안 했더군요.”

르페브르의 방계라는 말만 들으면 심장이 쿵쿵거렸다.

“르페브르는 보유한 훈장이 많으니까. 방계에게 내려 줄 수 있는 훈장도 많고.”

“그렇지요? 하긴, 그러면 가문의 내실을 다지는 게 더 이득이긴 하지요. 레너드 르페브르 공께서 일전에 괴수로 오염된 지역을….”

나는 라파엘의 말에 적당히 대답을 해 주며 걸음을 옮겼다. 슐로이츠의 집무실 앞에는 늘 그랬듯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다만 평소보다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게 정상이긴 하지.’

그동안이 마치 봄날의 꿈처럼 조용했던 거였다.

라파엘이 물었다.

“총사령관님께 손님이 와 계시나?”

“아, 예. 그런데 두 분은 상관없이 그냥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스무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쪽에도 아예 부관들이 바쁘게 차례를 지정해 주고 있었다.

나는 슐로이츠가 앉아 있을 책상 쪽을 쳐다보았고, 곧 서서히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어?’

그때 문득 슐로이츠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가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고 명령해서, 난 서둘러 슐로이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프로키온 경.”

이 수많은 귀족들 중에서도 그를 그리 부르는 건 내가 유일했다. 그래서인지 슐로이츠한테 찰싹 달라붙어 있던 중년의 남자도 “흠?” 하면서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슐로이츠는 책상 위의 서류철을 넘겨 보며 말했다.

“토벌 조를 다시 짜야겠어. 르페브르 경.”

그 말을 들은 곧 남자의 눈이 커졌다.

“아이고, 말로만 듣던 르페브르의 직계시군요! 저는 티모테 프로키온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몹시 영광입니다!”

슐로이츠의 숙부였다.

‘…날 전혀 알아보지 못하긴 했는데.’

그때 그 작고 병약한 꼬맹이와 지금의 나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으니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억지로 피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사실 그게 더 이상하니까.

나는 슐로이츠가 낮에 지시했던 것처럼 다시 짠 토벌 조 명단을 들고 늦은 저녁에 그의 집무실을 다시 방문했다.

명령대로 수정을 하면서도 의아했다.

‘왜 나랑 라파엘이 이번 유적 토벌에서 빠지게 되는 거지? 슐로이츠도 없고.’

총사령관의 집무실은 낮과는 달리 조용하고 한적했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얘기를 못 들은 척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르페브르에서 제안하는 가호의 접촉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더군.”

슐로이츠 앞에 공손히 서류를 내려놓던 내가 순간 돌처럼 굳었다.

“…제 오라버니가 설명하기로는 인공호흡과 다를 바 없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생존 가능성을높이기 위해서 하는 행위니까요.”

“그래. 비슷하지. 사감을 빼면 그쪽이 맞아.”

“사감이요?”

슐로이츠는 여전히 서류를 넘기며 서명을 하고 있었다.

“내게 입 맞춰도 되겠나?”

“…….”

그의 어조는 가벼운 질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 마셔야 할 술이 좀 독할 텐데 괜찮겠냐는 정도의.

적어도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듣는 나는 달랐다. 슐로이츠가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심장을 뚫어 부수는 것 같다.

“프로키온 경이 괜찮으시다면요.”

그 말에 슐로이츠가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잠시간 응시했다. 나를 훑어본 푸른 눈동자는 이윽고 다시 서류 쪽으로 내려갔다.

“이상하지.”

“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얼굴이야.”

“…죄송합니다. 긴장해서요.”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아닙니다. 제 일인데요.”

“일이라고 하면 다 그렇게 열심히 하나? 싫은 사람과 입이라도 맞출 정도로? 경이 이렇게 열성적인 걸 알면 국왕이 훈장도 아낌없이 내리겠어.”

차갑게 빈정거리는 슐로이츠의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아는 사람 중 독보적인 일 중독자 같은 그가 그렇게 말하니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도 말이다.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프로키온 경께 오파츠가 있어야 좀 더 안전하시잖아요. 전 그것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고요.”

내가 집무실로 들어온 이래 쉼 없이 움직이던 깃펜이 얼어붙는 호수처럼 천천히 멈췄다.

나는 늘 그랬듯이 슐로이츠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움직이고 있는 손만 보고 있었던지라 그 사소한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려던 찰나였다. 내가 포착했던 잠시간의 소요는 환상이기라도 했다는 듯, 깃펜은 제 본분을 다하고 거치대 위로 돌아갔다.

슐로이츠가 입을 연 것도 그즈음이었다.

“경은 내가 그리 걱정되나?”

“왕국민이라면… 누구나 프로키온 경의 무사 안위를 바라지 않을까요?”

나름대로 신경을 기울여서 한 대답에 슐로이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류를 두 번 더 넘기는 길고 곧은 손. 그는 이윽고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이었다.

슐로이츠는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멈춰 서는 그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뺨에 가호를 내릴 때와 다르게 왜 이렇게 긴장했나 싶어 되짚어 보니, 이번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슐로이츠는 내게 고개를 숙이기 전, 언제나 가호를 내리라는 말을 해 주곤 했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바로 앞에 와 서니까 이상하게 숨이 턱 막혔다. 새삼 가호를 내리라는 그 짧은 말에서 내가 안정감 비슷한 걸 찾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다면, 슐로이츠의 가호를 내리라던 말은 실은 내게 해 주던 배려였을까? 어색할 수 있는 상황에서, 명령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오직 그만 할 수 있는 배려였다.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해 주는 배려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선을 그어 주었고, 그 선 안에서 나는 안전함을 맛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심장이 쿵쾅댔다. 마치 가호가 아닌, 내가 원한 입맞춤인 것처럼.

슐로이츠는 전처럼 상체를 굽혀 주지 않았다. 그는 훌쩍 키가 큰 남자였고, 나는 그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 발을 들어 올려야 했다.

가호를 내리다가 무게 중심을 잃으면 곤란하니 자연스레 두 손이 슐로이츠의 목과 어깨를 잇는 선을 붙잡게 되었다.

그에게 가만히 입술을 가만히 가져간다.

슐로이츠에게 다시 입을 맞추게 되면 심장이 터져 버리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터질 심장은 다 터진 모양이었다.

막상 입술을 갖다 대니 생각보다는 차분하게 있을 수 있었으니.

그래도….

나는 맞닿은 입술의 촉감을 자세히 더듬지 않기 위해 속으로 몹시 애써야 했다. 과거의 슐로이츠와 얼마나 달라졌는지와 같은 감상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추측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사라지고 지금 입술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온만이 입술 위를 맴돌았다.

목에서 두근거리는 맥박이 느껴진 건 착각일지도.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떨쳐내려 눈을 더 꼭 감았다.

이건 의무고, 일이고…. 사감은 없을수록 좋다. 사감이란 결국 내면의 편린과 이어져 있는 것이니까.

슐로이츠의 입술에 가호를 내리는 건, 뺨에 입을 맞춰야 할 때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1분 정도가 지나고서야 가호가 제대로 내려졌음을 알 수 있었다. 몸이 따뜻해져서 늘 그렇듯, 생리적으로 기분은 좋아졌다.

나는 턱을 내리며 내내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올렸고, 당황해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비칠 정도로 가까이 있는 서늘한 눈동자가 나를 고요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춤해서 멀어지는 것도 잠시.

슐로이츠는 막 떨어져 허공으로 뜬 내 두 손을 붙잡아 내려놓아 주었다.

하지만 그 일련의 행동은 나를 밀어내려고 하기보다는, 나를 잡으려고 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했다. 그의 묘해진 눈빛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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