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이 바닥이 날 때까지 기다려 보겠다는 태도다. 그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관대한 기다림이었으나 나는 그저 무섭기만 했다. 목전에 둔 사형 선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맹수에게 목이 물린 초식 동물도 나보다는 덜 절망적일 것 같았다. 속눈썹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저… 말씀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만… 총사령관님.”
의사의 잔뜩 주눅 든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가씨가 약을 지금 드셔야 합니다만….”
“누가 약을 못 먹게 했나? 먹여.”
슐로이츠의 말에 의사가 서둘러 내게 약그릇을 내밀었다. 이 약 안에 평소처럼 수면 약초가 들어가 있으면, 차라리 마시고 기절할 수라도 있을 텐데.
오늘 슐로이츠가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수면 약초를 빼 버린 게 패착이었다.
이걸 먹는다고 한들 잠은 오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무한정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었고.
약그릇을 든 손은 계속 떨렸고, 슐로이츠의 눈은 여전히 내게 붙박여 있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그….”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슐로이츠 앞에서 온전치 않은 목 상태로 말을 한다는 건 내 생각보다 훨씬 두려운 일이었다.
알면서도 늪지대에 발을 디뎌야 하는 절망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나는 온 힘을 다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파서요….”
최고로 신경을 기울인다는 전제하에 이제 네 음절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디가 아파서 이렇게까지 나를 피해 다니느냐고 묻잖아.”
“총사령관님. 아가씨께서 몸에 충격을 많이 입으셨….”
“네게 물었나?”
“죄, 죄송합니다.”
의사가 흠칫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결국 벌벌 떨다가 약그릇을 놓쳤다. 이불 위로 약이 고스란히 쏟아졌고, 의사가 당황해 양해를 구하고 이불을 걷어 냈다.
그리고 안에서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굴러 나왔다.
내가 아까 전, 입술을 묻고 피를 토했던 하얀 리넨 천이었다. 수시로 토혈을 하다 보니 번거로워서 가까이 둔 것이었다.
피가 배어 나오지 않게 잘 접어 베개 아래에 둔 천이 어쩌다 밑으로 쓸려 내려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슐로이츠였다.
그는 바다에서 떠오른 불덩이를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본 걸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낯빛.
평소와는 달리 이마까지 일그러뜨리고 있던 슐로이츠가 한 박자 늦게 혀를 찼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잘못 들어왔군.”
한숨을 섞어 말한 슐로이츠가 의사에게 말했다.
“약재 목록을 작성해서 의무실에 공유해 놓고 떠나도록 해라. 이 정도로 아픈 거면 약을 상비해 놓는 게 낫겠지.”
“……?”
“일주일이면 끝나나?”
슐로이츠의 질문은 내가 아닌 의사를 향해 있었다. 그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예, 예? 예…. 일주일이면… 낫습… 끝날 겁니다.”
“그래. 쉬게 해.”
아까까지만 해도 슐로이츠는 침대 위의 피 묻은 천을 얼굴을 찌푸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예 침대 쪽에서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일부러 시선을 피해 주는 듯한….
“경은 이 시기엔 쉬어. 군의관한테 말해 놓으면 알아서 처리해 놓을 거다.”
잠시만.
지금….
설마….
의사가 슐로이츠에게 뭐라고 대답하는지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피가 묻은 천. 특이 사항은 침대에서 굴러 나옴. 일주일이면 끝나는 거냐는 슐로이츠의 질문. 아프다는 핑계로 그를 종일 피함.
모든 걸 종합해 보았을 때….
슐로이츠는 피가 묻은 천을 전혀 다르게 오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그러니까, 말하자면 사용한 생리대를 슐로이츠에게 적나라하게 보인 듯한….
사실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오해를 받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게 아니라고 진실을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귀 끝이며 목덜미가 타오를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진짜로 죽고 싶었다.
***
며칠 후.
나는 완전히 나았다.
제대로 나오는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반지, 여기 있습니다.”
“껴도 돼?”
“제가 묵사발이 되면서 아주 많이 고쳤거든요.”
헥토르는 처연한 얼굴로 웃었다. 그의 눈가에 든 피멍을 보니 알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리 너무 미워하지 마.”
“어떻게 미워하겠어요. 제 잘못인걸요. 아가씨가 저를….”
“너를?”
“미워하실까 봐 걱정은 되네요.”
“죽고 싶긴 했는데 미워할 정돈 아냐.”
“그게 그 소리 아니신가요?”
아니지만 그날 슐로이츠와 있었던 얘기를 자세히 하기도 민망했다.
헥토르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더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것만 선물로 가져온 건 아니었어요. 한 가지 더 있기는 한데….”
“…뭔데?”
내가 약간 긴장하면서 묻자 헥토르가 갑자기 빙그레 웃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축 처져 있던 얼굴이 다시 활기가 도는 것만 봐도 이건 보통 또라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가 총사령관을 정말로 무서워하고 계시잖아요.”
“으응. 그렇지.”
“그런데 총사령관은 인체 구조가 어떻게 되어 먹은 괴물인 건지, 하루에 오파츠를 몇 개는 깨뜨려도 멀쩡하더라고요. 사람 맞죠? 전신(戰神)이라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닌가 봐요.”
르페브르 저택에 계속 새로운 오파츠를 요청했으니 헥토르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그때마다 아가씨가 계속 따라다니며 새로 가호를 내려 주려면 무섭고 번거로우실 거 아니에요?”
그제야 헥토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았나 보네?”
“예. 제가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새 오파츠도 개발했고요.”
헥토르가 내민 오파츠는 예전의 것보다 훨씬 보석의 느낌이 강했다. 다각도로 섬세하게 커팅한 모양하며, 빛을 빨아들이는 투명도며….
가만히 보고 있으니 보석 장식으로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오파츠들은 총사령관 전용이에요. 그리고 오파츠가 달라졌으니 가호도 다른 데다 내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어디? 이마?”
“이런, 아가씨.”
“……?”
헥토르의 눈빛이 따뜻해졌다. 어리고 무식한 바보를 가르친다는 듯한, 자애로운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같은 약물도, 그냥 피부 표면에 묻히는 것과 껍질을 한 번 벗긴 살갗에 묻히는 건 흡수율이 전혀 다를 거라는 사실은 굳이 시연해 드리지 않아도 이해 가시죠?”
“징그러워.”
“징그러워도 사실이랍니다. 어쨌든요. 모든 진리에는 결국 공통분모가 있는 법이고요.”
“…그래서? 어디에 내리라고 이러는 거야?”
“안쪽으로 파고들기 좋은 곳이요. 그리고 피부 표면이 다른 곳보다 아주 얇은 곳이요.”
헥토르의 설명이 심상치 않았다. 적어도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서서히 등골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입술에다가 내려 주시면 됩니다.”
“미쳤어?”
“제 좌뇌와 우뇌는 정상이에요, 아가씨.”
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헥토르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수줍으신 건 이해하는데요. 이게 공적인 업무에서는…. 사실 제가 보기엔 인공호흡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따지고 보면 인공호흡보다 닿는 면적은 적죠.”
“…헥토르.”
“네, 아가씨?”
“진짜 미쳤어?”
“저 그 말 엔리코르한테 똑같이 듣고 왔습니다만…. 아가씨. 그냥 약품이 담긴 비커에 손가락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를 넣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이렇게 산뜻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심으로 헥토르의 머리를 따서 열어 보고 싶었다.
“…구혼자랬잖아.”
“저요? 그럼요.”
“인공호흡 같은 거니까 상관없는 거야?”
“그렇죠. 아가씨가 총사령관을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
“게다가 저 말고도 다른 구혼자들이 즐비할 텐데, 그들이 아가씨가 다른 남자에게 가호를 내린다고 해서 질투를 할까요? 아닐걸요? 저는 지금도 너무 자랑스러워서 숨이 안 쉬어지는데요.”
“…….”
저 정신 나간…. 헥토르를 노려보는데 어쩐지 시야가 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실까요? 얼굴이 너무 창백하시네요.”
나는 헥토르가 끌어 준 의자에 앉았다.
“엔리는 그 말을 듣고도 지금 좋다고 허락을 해 준 거야?”
“처음엔 냅다 맞았죠.”
“그런데?”
“사실 효율을 따지면 맞는 말이니까요? 제가 듣기로 총사령관은 성검의 능력이 너무 대단해서 거의 최전방에서 괴수를 사냥한다면서요. 그런데 오파츠의 내상도 별거 아닌 걸로 넘겨 버리니 아가씨가 계속 옆을 따라다니면서 가호를 내려야 한다는 소리잖아요.”
“…….”
“엔리코르 생각에도 이쪽이 더 효율이 좋다고 판단한 겁니다. 사실, 이쪽이 아가씨가 더 안전하기도 해요. 아가씨는 직급만 심하게 높으신 거지 따지고 보면 생도 수준인 걸 제발 기억하세요.”
헥토르의 말을 들으며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슐로이츠에게 어떻게 입을 맞췄는지 되짚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어리고 순진했던… 물론 나는 순진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순진한 어린이였음을 감안해서 정말 말 그대로 입술만 가볍게 부딪혔다.
가호랑 다를 바가 없군….
차마 이 얘기를 하면서 헥토르를 때릴 수도 없는 나는 얼굴만 연거푸 쓸어 넘겼다.
“입 맞추고 싶지 않아.”
목소리가 너무 서럽게 흘러나왔다. 저 정신 나간 광인 헥토르가 움찔 놀랄 정도였으니까.
“…왜요? 아가씨. 그렇게 총사령관님이 무서우신가요? 하지만 업무 수행 능력은 최상위로 계속 판정받고 계시던데요.”
“그건 또 언제 찾아봤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엔리코르도 작중에선 언제나 완벽한 지휘관이었으니까 그 정도는 유지해 주고 싶었다. 거기다가 절반 이상의 업무가 오파츠에 관련된 것이라 어려울 것도 없었고. 관대하게 평가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헥토르가 목소리가 약간 물러졌다.
“무사히 나오셨으면 좋겠어요. 대규모 참변이 역사 속에 몇십 번이나 기록되어 있었는지 잘 아시잖아요. 물론 최근엔 그런 일이 없었다지만, 기다리는 사람들 입장은 또 다르니까요.”
“…….”
그야 그렇지만…. 나는 엔리코르가 저렇게 오파츠 연구에 죽어라 매진하는 이유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엔리코르는 좋은 가족이다. 좋은 오빠고. 오파츠에 필요한 게 르페브르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생혈이었어도 그는 충분히 피를 내는 짓을 감수했을 것 같았다.
“참, 그리고 혹시 몰라서 총사령관에게는 벌써 전달해 놓았어요.”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헥토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