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오해는 오해를 부른다-(9) (75/190)

“도련님. 아가씨의 몸에 큰 충격이 가면서….”

의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엔리코르가 답답한 듯 목에 매고 있던 타이를 잡아당겨 풀었다. 눈이 충혈된 그가 침대맡에 앉았다.

“괜찮아.”

“…….”

“다들 독감에 걸리면 어린애처럼 잠이 많아지잖아. 너도 어릴 때처럼 목이 잠깐 나빠진 것뿐이야.”

“응….”

“목에 영구적 손상이 간 것도 아니라잖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또다시 목이 너무 간지러웠다. 의사가 쥐여 줬던 천에 입술을 파묻고 기침을 하자 피가 튀었다.

피를 토하는 건 난데 엔리코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런데도 그는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차갑고 침착한 얼굴로 의사에게 약을 받아 내게 먹였을 뿐이었다.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허브 잎을 띄운 따뜻한 물을 마시는데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르페브르의 기사가 가볍게 묵례하더니 말했다.

“아가씨. 제2 지휘관이 찾아오셨습니다. 총사령관님 명으로 아가씨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는데요.”

순간 들고 있던 물그릇을 떨어뜨렸다. 반도 마시지 못한 물이 이불 위에 엎질러졌다.

나는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에, 엔리…. 나… 쓰러진… 거… 프로키… 온… 경이… 알아?”

“당연히 알지. 애초에 여기가 르페브르에게 내준 별관이잖아. 널 지휘관 숙소가 아닌 여기에 데려다 놓으려니 이유가 필요했어.”

“쓰러진… 이유… 뭐라고… 말했… 어?”

“새로운 오파츠로 인한 부작용이라고, 일단은 그렇게 말해 놨어.”

“아….”

괜찮은 변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디오스를 볼 수 없었다. 정확히는 슐로이츠를 절대 봐서는 안 됐다.

“나… 수면… 제… 들어간… 약… 먹어야… 해서… 정신… 못… 차린… 다고… 그래….”

“뭐? 왜?”

“빨리…!”

그리고 진짜로 수면 효과가 있는 약을 처방받아 기절해 버렸다. 기감이 뛰어난 디오스라면 내가 가짜로 자는 척을 해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일부러 자는 척을 한다는 걸 알고, 슐로이츠한테 보고라도 했다간 정말로 큰일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란 숫자가 순식간에 지났다.

“이렇게… 며칠 더… 버텨야… 하는데….”

디오스가 하루에 세 번씩 찾아왔다는 얘기를 들었고, 한번은 아예 내가 자는 모습을 기어이 확인하고 갔다고 했다.

모골이 송연했다.

나는 제발 내가 목이 다 나을 때까지, 슐로이츠가 찾아오지 않기를 빌었다.

아니어도 말이 절반 이상이라도 똑바로 나오기를 매시간마다 물 떠 놓고 기도했다.

그래도 잘만 하면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어쨌든 디오스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게 아니라, 약을 먹고 곯아떨어진 환자인 거니까.

***

“…또 주무신다고?”

디오스는 굳게 닫힌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아홉 번째 같은 말을 듣고 있었다. 시간차를 두고 왔는데도 계속 블란데아는 자고 있다고 했다.

“확인해 봐도 되나?”

“예, 됩니다.”

블란데아는 군부 소속이었고, 디오스가 ‘확인을 해도 되나?’ 하고 물어보면 절대 거절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놓았다.

디오스 이젤이 제2 지휘관이긴 하나 총사령관의 직속 부관인 점, 그리고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인해 온 것이니 거절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는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블란데아는 이번에도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찌 된 일인지 며칠 전부터 길어져 있었다. 햇살 같은 금빛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흐트러져 있었고, 평소와 달리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

깊이 잠들어 있으니 미동도 없다. 물먹은 솜처럼 한없이 축 늘어져 있는 몸. 매번 깃털처럼 가볍게 뛰어다니던 모습과는 흑과 백만큼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움직이는 거라곤 숨을 쉴 때마다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전부. 그쪽으로 갔던 시선을 디오스는 조금 당황해 돌렸다.

계속 똑같은 모습만 보고 있으니, 디오스는 자신의 앞에 잠들어 있는 블란데아가 사람이 아니라 실은 조각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블란데아 경.”

혹시나 싶어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디오스는 그녀를 깨우는 건 좋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슐로이츠는 쓰러졌다는 블란데아의 상태를 확인해 보라고만 했지, 그녀를 흔들어 깨운 후 대화를 나누고 오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기도 했고.

대신 디오스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조금 더 기다렸다.

조금 더.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을 가만히 본다.

조금 더.

보송한 솜털이 나긋나긋한 뺨을 본다.

조금 더.

잠든 모습일 뿐인데 빛이란 빛을 모두 빨아들이는 것 같다.

“…블란데아 경.”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붉은색의 선명한 눈동자가 감춰져 있을 햇솜 같은 눈매.

무지개가 눈앞에 아른거리면 손을 뻗고 싶다. 평생 잡아 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빛 덩어리지만, 바로 앞에 있다면 한 번은 움켜쥐어 보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천성이다.

블란데아의 이마에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고, 디오스는 그쪽으로 움직이려던 손에 힘을 주었다.

해서는 안 될 행동이란 걸 아는 것도 기사의 천성이다. 적어도, 그녀가 두 눈을 온전히 뜨고 있을 때 해야 하는 일이란 것도 알았다.

디오스는 아주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한 번도 깨지 않았다.

***

“아, 아직도 자고 있다고.”

“예, 총사령관님.”

“이렇게 하루 종일?”

보고를 하러 온 디오스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제가 확인해 볼 때마다 르페브르 경은 아주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슐로이츠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손가락을 펼쳐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가볍게 인상을 쓴다.

“오파츠의 가호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니, 엔리코르 르페브르 공자에게 임시로 가호를 내려 달라고 요청해라.”

“알겠습니다.”

“하나 더 전해.”

슐로이츠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때때로 날카롭고, 그보다 자주 무심한 눈이 습관처럼 창밖에 흐드러진 새하얀 꽃들을 바라본다.

“내일 내가 자리에 없을 거라고 알려라.”

“예?”

“임시 토벌을 다녀올 테니, 혹시 오파츠에 관해 전할 말이 있으면 오늘 전해 놓으라고 전달해.”

“예, 총사령관님. 바로 전달해 놓겠습니다.”

***

슐로이츠가 임시 토벌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벌었다.’

엔리코르가 가호를 간부진에게 대신 내려 주겠다고 해서 자리도 비운 상태였다.

나는 며칠 만에 약에 들어가는 수면제를 뺄 수 있었다. 디오스가 자꾸 불쑥불쑥 찾아오는 바람에 낮에는 그냥 약을 관성적으로 먹었더니….

사흘이 순식간에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 정도면 더러워져야 하는데, 르페브르의 몸이란 참 신기했다. 그래도 피를 간헐적으로 토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어서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고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싼 나는 곧 당혹감을 느꼈다.

머리가 갑자기 훅 길어지니까 말리는 게 전처럼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로라한테도 한마디도 할 수가 없어서 그녀도 보지 못한 게 벌써 사흘째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마른 수건으로 꾹꾹 누르며 두 무릎을 침대에 디뎠다. 신고 있던 슬리퍼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무릎걸음으로 침대를 가로지른 나는 커튼을 쳐 놓은 창가로 다가갔다. 그대로 허리와 허벅지만 곧게 펴 창밖의 하늘을 내다보았다. 두 손은 여전히 머리카락을 말리는 중이었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직후였다.

이쯤 되어 들어올 사람이라곤 의사밖에 없었다.

“약이… 또….”

“약이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순간 온몸이 굳었다.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르페브르 경.”

나는 딱딱하게 굳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운이 좋은 건지, 디오스가 운이 나쁜 건지 모르겠군.”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토벌을 갔다고 했던, 그래서 오늘은 종일 없을 거라고 했던 슐로이츠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침실 앞을 지키던 르페브르의 기사가 흙빛이 된 얼굴로 급히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침실을 한번 둘러본 슐로이츠가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입도 다물지 못하고 슐로이츠를 바라만 봤다. 그리고.

“아가씨…. 헉.”

이번에 침실로 들어선 건 진짜로 의사였다. 그는 약을 든 채 돌처럼 굳었다. 뒤를 돌아본 슐로이츠가 의사가 들고 있는 약을 훑었다.

“아. 저 약이 수면제가 들어 있다던 그 약인가?”

“그… 수면제가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아가씨 몸을 보하는 약초 중 수면 효과가 유독 강한 게 있어서….”

“가져와.”

의사는 벌벌 떨면서 약을 가져왔다. 쟁반을 받쳐 든 손이 어찌나 떨리는지 약이 조금 튀었다.

슐로이츠가 명령했다.

“앉아. 어정쩡하게 있지 말고.”

나는 후다닥 침대에 앉았다.

가까이 다가온 슐로이츠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아 말했다. 진귀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 남자는 나를 이해하기 어려운 골칫덩이처럼 보고 있었다.

“안색 한번 가관이군.”

“…….”

“왜. 계속 나를 피하다가 잡히니 놀랄 양심은 남아 있나 보지?”

“……!”

허를 찔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지? 동시에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임시 토벌에 간다고 한 것, 하루 종일 자리를 비운다고 한 것.

전부 눈 뜨고 있는 나를 잡아내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건가…?

추측은 금세 확신이 되었다. 슐로이츠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요리조리 도망치다가 결국 목덜미가 붙잡힌 말썽거리가 된 것만 같았다.

“뭐가 불만이야, 르페브르 경.”

“…….”

“이유가 뭐냐고. 이런 식의 시위는 처음이라 도대체 짐작이 안 가는군.”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다. 하고 싶지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슐로이츠는 느슨하게 팔짱을 낀 채 턱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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