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오해는 오해를 부른다-(8) (74/190)

“엔리!”

그쪽으로 뛰어가자 엔리코르가 나를 가볍게 껴안았다가 놓았다.

“의전 준비 잘했더라.”

순간, 정수리 끝까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뿌듯함이 짜릿하게 차올랐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이상했는지 엔리코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니. 엔리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갑자기 너무 보람차. 두 번 할 자신은 없지만…. 다들 이래서 성공하는 삶을 살고 싶은 건가 봐.”

“괜히 칭찬했네, 이거.”

엔리코르가 바로 눈썹을 찌푸렸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너 분명히 1년만 있다가 퇴단하기로 약속했어.”

“그럼. 바로 나갈 거야.”

엔리코르는 흐음, 하며 팔짱을 꼈다. 턱을 삐딱하게 기울인 채 나를 살피던 그가 이윽고 웃음을 흘렸다.

“뭐. 매드로스 공의 인사를 다 쳐 내고 처음으로 여는 공적인 의전인데, 잘해야지. 잘했어.”

그것 때문에 다들 신경이 더 곤두서 있었던 것도 맞았다. 나는 빙긋 웃었다.

“머리는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길어졌어?”

“아, 연구에 성공했어. 혹시 헥토르한테 들은 적 있는지 모르겠는데 약을 드디어 개발했거든.”

“머리카락이 길어지는 약?”

“맞아.”

“그런 약을 진짜로 만들 수 있는 거였어?”

“뭐…. 일단은.”

“일단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문제 같은 거라도 있나 봐?”

“설마. 별문제 없어 블란아. …아직은? 헥토르한테 말하진 말고.”

엔리코르가 그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며 말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 비공식적 의전의 마지막인 점심 정찬은 무사히 끝났다.

국왕이나 르페브르 가주가 아닌 이상 군부의 총사령관이 배웅까지 하는 의전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의전은 모두 마무리가 된 셈이다.

“아가씨!”

“헥토르?”

반색하며 다가오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본 건,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시간 중이었다.

의전 수행 중에는 내내 바빴기 때문에 그와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눌 틈도 없었다.

공식 의전은 끝이었지만 외빈은 머무는 내내 품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헥토르 역시 첫날처럼 정복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열어 보세요.”

“……?”

“얼른요.”

상자를 열자 안에는 붉게 반짝이는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어 있었다.

“청혼 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눈이 좋으시네요.”

라자크 왕국에서는 청혼 반지의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반년 치 이상의 봉급을 전부 쏟아부을 만큼 고급품일 것. 그리고 메인 보석은 구혼자의 눈동자 색깔일 것.

구혼자의 눈동자 색깔이 특이해 마땅한 보석을 구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무색 다이아몬드를 세팅하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헥토르의 눈동자는 광기 어린 노란색이었고, 노란빛을 띠는 보석은 시중에 정말 흔하고 많았다. 호박, 토파즈, 투어말린, 시트린 등등.

나는 반지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갑자기 주는 선물이야? 난 지휘관이라 반지를 끼고 다니는 건 좀 어려운데.”

“아가씨, 엔리코르 머리카락 보셨죠?”

“봤지. 아, 약을 개발했다고 들었어. 나도 한 병 보내 줘.”

“약이 충격에 약해서 흔들리면 쉽게 변질이 되거든요. 그래서 가져올 수는 없었고, 대신 제가 아가씨를 생각하며 틈틈이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 무슨 연구?”

“그 반지가 연구의 산물이에요. 선물이고요. 이름은 모이라 반지예요. 엔리코르가 마신 약이랑 이름이 똑같죠.”

헥토르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손가락에 끼고 있으면 머리카락이 자라게 돼요, 아가씨.”

“그런 게 된다고?”

“그럼요?”

마법 아닌가? 하기야 이 세계엔 이미 마법이 있긴 하니까….

“신기하다.”

반지 안쪽에는 가느다란 선으로 이어진 복잡한 문양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저게 무슨 작용을 하는 모양인데….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마워.”

“고마우면 저랑 결혼해 주시겠어요?”

“싫어. 아무 데나 끼워도 돼?”

“예. 근데 아가씨 왼쪽 두 번째 손가락 사이즈에 맞춰서 만들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하녀들한테 반지 하나 빌려 얻어 냈죠.”

“돌려다 놨지?”

“그럼요. 갖다 주는 걸 깜빡했더니 하녀들이 칼같이 찾으러 오던데요.”

나는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가느다란 끈을 풀어냈다.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어 내린 다음 헥토르가 준 반지를 왼쪽 검지에 끼워 보았다.

반지의 면적이 닿은 곳에서부터 온기가 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동시에 날개 뼈에나 닿던 머리카락이 파도를 치듯 풍성하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식간에 길어진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진짜 길어지네?”

헥토르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었지만, 역시 그 미소는 새로운 영양제를 먹고 쑥쑥 자라는 희귀한 약초를 보는 미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기해. 다른 사람들도 머리카락 길이를 막 늘일 수 있는 거야?”

“아, 그건 아뇨. 전 껴 봤자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긴 머리채를 갑자기 뭉텅 잘라 내면 가벼운 느낌이 들 듯이, 한 번에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길어지자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조금씩 알뜰살뜰 잘라 내 모으던 관성이 남아 있는지, 머리카락이 길어지자 부자가 된 것 같은 희한한 느낌도 들었고.

나는 머리카락을 한 줌 그러쥐어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기존 머리카락의 상태가 이어지는 것인지 머릿결에는 윤기가 흘렀다.

그때였다.

“…아가씨?”

갑자기 뺨이 두 손으로 잡혀 들어 올려졌다. 헥토르였다. 평소에는 은은하게 돌아 있는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지금은 깊은 당혹감으로 젖어 있었다.

“왜 그래?”

헥토르가 손끝으로 내 눈 밑을 쓸었다. 나는 눈동자만 내려 그의 손가락을 보았고, 곧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피가 묻어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헥토르의 손에 갑자기 피가 묻어난다는 건… 내 눈에서 설마 피가 흐른다는 건가?

소름이 쫙 돋는 것과 동시에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왔다. 목 아래가 몹시 간지러운 기분.

이 불쾌한 느낌…. 익숙한데?

거의 동시에 기침이 터졌다. 바로 앞에 있던 헥토르가 내가 토해 낸 피로 새빨갛게 물드는 장면을 생생히 본다.

일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

“진짜 미친 새끼 아냐!”

주먹으로 뺨을 맞은 헥토르의 목이 꺾였다. 왼쪽 어금니가 깨진 것 같았다. 입술은 이미 터진 지 오래였다.

“도련님, 진정하십시오.”

르페브르의 수행 기사가 엔리코르를 말렸다.

“군부령입니다. 과한 소란은 가문에 좋지 않습니다. 아가씨의 현 위치도 생각하셔야 하고요.”

“…….”

엔리코르가 씨근덕대며 헥토르의 멱살을 놓았다.

헥토르가 피를 닦아 내며 입을 열었다.

“변명해도 돼?”

“해.”

“너는 모이라 약을 마셔도 아프다고 안 했잖아.”

헥토르는 정말로 억울했다.

어차피 엔리코르가 마셨던 약과 블란데아에게 선물한 반지는 같은 원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하나는 몸에 직접 흡수되는 거고, 하나는 특수한 금속을 이용해 피부 표면에 마찰해 원하는 반응을 일으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엔리코르는 모이라 약을 복용했을 때도 별 반응이 없었다가….

헥토르가 그제야 깨달은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뒤에 가서 피를 토했구나.”

“…….”

“왜 말을 안 했어? 해야 알잖아!”

“하면 뭐. 또 블란이한테 가서 머리카락 구걸해 오게?”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잖아.”

과민 반응 아니냐고, 사실 헥토르는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엔리코르가 이를 악물었다.

“너는 걔가 어릴 때를 못 봐서 그렇지!”

“…….”

“걔한테 어떤 식으로든 손대는 게 싫다고! 젠장, 내 오파츠 연구 때문에 멋대로 입단까지 한 앤데!”

엔리코르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내 허락 없이 블란데아한테 연구 결과 적용하지 마. 한 번만 더 이딴 일 있으면….”

그가 이를 가는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는 거의 동시에 들렸다. 급하게 뛰어온 기사가 말했다.

“도련님! 아가씨가 깨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상태가 조금….”

***

쿨럭.

나는 기침을 하면서 눈을 떴다. 옆에서 의사가 서둘러 흰 천을 입에 갖다 대 주었다. 나는 천으로 입을 감싸고 기침을 쏟아 냈다. 붉은 피가 정신없이 튀었다.

“아가씨. 드셔야 합니다.”

약과 물이 차례로 흘러들어 왔다. 눈앞엔 가문의 의사가 있었다. 엔리코르가 군부로 내려오면서 데리고 온 가문의 의사들 중 하나라, 내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엔리코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엔리… 는….”

떠듬떠듬 이어지는 목소리.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어?

“말이… 왜… 이렇… 게….”

끝까지 말을 잇지도 못했다. 나는 당황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가씨.”

의사는 나보다 훨씬 차분한 기색이었다. 아니, 내가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어른스럽고 침착한 목소리를 내 주는 것 같았다.

“어릴 적에도 아프실 때는 특히 목소리를 내는 게 힘이 들었던 것 기억하시지요? 몸에 심하게 충격이 가서 그렇습니다. 일주일 정도, 아니 며칠만 있으면 분명 회복되실 겁니다.”

일주일이란 의사의 처방에서 내 얼굴에 핏기가 쑥 빠졌다. 의사는 서둘러 ‘며칠’이라고 정정했지만 내 몸 상태를 내가 모를 수 없었다.

의사의 말대로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 목이 정상이 될 것 같은데….

“안… 되는… 데….”

머리가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일주일이나 내가 슐로이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나?

“블란아!”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엔리코르를 보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에, 엔리… 나… 지금… 목이….”

엔리코르의 표정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얘 목 왜 이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