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오해는 오해를 부른다-(7) (73/190)

“어마마마. 정 그러시다면, 의전을 받지 않기로 하고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이스 공주도 싫어하진 않을 겁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르페브르에서도 대규모 의전을 받아서 당당히 가는데 내 아이들이 뭐가 부족해서?”

“르페브르가는 공적인 업무 때문에 군부에서도 의전을 준비한 거잖습니까. 경우가 달라요. 어마마마.”

“격식이 왜 격식인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알고 있지만, 항상 차릴 필요는 없지요. 게다가, 얼굴을 봐야 정이 들지 않을까요?”

“…좀 더 생각해 보마.”

그날 저녁, 왕비는 결국 로티스 왕자에게 네 뜻대로 하라고 허락을 해 주었다.

로티스 1왕자는 다음 날, 가장 빠른 말까지 내어 주며 군부로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의전을 포기하겠다고 했는데도 거절 답안이 왔습니다, 왕자님.”

“흠…. 곤란한데. 방법이 없겠나?”

“꼭 지금 가셔야겠습니까? 나중에 가셔도 괜찮을 듯한데요.”

“아니. 난 지금 좀 보고 싶어서 말이야.”

“총사령관이 왕도에 잘 올라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래. 그쪽이라고 해 둘까.”

로티스 왕자는 잠시 창밖을 내다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사교계의 수많은 레이디와 귀부인들을 그토록 설레게 한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르페브르와의 공식 접견이 끝나고, 군부에서 일정이 충분히 정리되면 방문하겠다고 요청해. 의전은 필요 없다고 거듭 강요하고, 원하면 수행인도 최소로 데려간다고 하지.”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총사령관의 비위를 맞추려면 어쩌겠는가? 괜찮아. 그만한 능력자한테 납작 기는 건 자존심도 상하지 않아.”

그가 자존심이 상하는 건 능력도 없는 이에게 납작 기어야 하는 경우였다.

“총사령관이 또 들은 척도 않고 거절하면 정말 곤란하니….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용건 하나는 들고 가야겠군.”

로티스가 무어라고 지시하자 수행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티스는 턱을 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자주 봐야 정이 들지. 그럼.”

***

슐로이츠는 왕실의 방문을 거절했다.

사실 나와 아그네스는 반쯤 떨면서 슐로이츠의 집무실로 갔는데, 서류를 확인하고 있던 슐로이츠는 고개도 들지 않고 거절하겠다고 대답했다.

왕실에서 내려온 궁정인은 몹시 당황해했지만 슐로이츠는 재고의 가치도 없는 듯 상대도 해 주지 않았다.

그날 아그네스는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정말 심하게 감동을 받은 얼굴로, 청사에서 돌아오다가 결국 소매로 눈가를 닦길래 내가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정말 눈물이 많네.”

“블란데아 경이 저보다 어리시잖습니까.”

“나는 안 울잖아.”

“민망하네요….”

둘러본 군부 기지는 전과는 다르게 모든 곳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예전에도 깨끗하긴 했는데 이번에는 아주 힘을 주어 구석구석 쓸고 닦아 낸 상태였다.

하기야 슐로이츠에게 확인받을 게 있어서 청사에 갈 때나, 지휘관 회의실로 갈 때나, 라파엘에게 물을 게 있어서 걸어갈 때나 언제나 병사들은 쭈그려 앉아 여기저길 박박 닦고 있었다.

기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손이 모자라니 노동을 해야 하는 직급이 계속 위로 올라왔고, 로라조차도 호출받아 어딘가를 청소하고 왔다고 했다.

군부 기지는 청결을 담당하는 청소부들이 상시 고용되어 있긴 했지만 그들만으로는 라파엘의 뾰족해진 신경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걸 그림으로 그려서 부모님께 보여 드려야 하는데.’

내가 엔리코르 하나 접견하자고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하는데.

요 며칠 몹시 바빠서 저택으로 편지도 한 통 못 보냈다.

“그래도 이제 끝났겠지? 슬슬….”

…라고 말하기 무섭게 뒤에서부터 우다다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발소리의 주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블란데아 지휘관님! 큰일 났습니다!”

“…왜?”

나는 벌벌 떨면서 로라를 바라보았다.

“의전에서 쓰려고 준비한 만년필들을 전부 바꿔야 된답니다!”

“왜… 왜?”

“왕실의 방문을 거절했으니 국왕 전하가 하사하신 만년필을 그 의전에 쓰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나는 얼굴을 쓸어 넘겼다.

“군부령 시가지에 만년필을 제작하는 장인이 있던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로라가 우다다 뛰어가고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자들 못 들어오게 하면 안 되겠지?”

“문 닫을까요?”

“농담이야… 아그네스 경.”

보충 인원이 간절히 필요했다. 나는 분명히 제1 지휘관인데 왜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엔리코르가 도착하기 10분 전까지도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

군부 기지는 군사적 목적으로 인해 높은 담벼락으로 빙 둘러져 있었다. 담벼락 사이사이에는 총 17개의 문이 나 있었는데, 전부 기사들의 감시하에 엄격히 지켜지는 문이었다.

중앙에 난 가장 큰 문은 17문이라고 불렸는데, 팔두마차가 들어와도 될 정도로 아주 넓었다.

“외빈 입장하십니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늘은 청명했고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 아주 완벽한 날씨였다.

17문 앞에 깔린 긴 붉은색 카펫.

내가 확인한 거다.

예장을 갖추고 사열해 있는 기사들.

내가 확인한 거다.

슐로이츠의 뒤에 서서 웃고 있는 라파엘을 비롯한 의전관들.

내가 확인한 거다.

살짝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의장대도 칠 할 이상 숙청당한 이 군부에서 내가 기어이 성공했구나….

내가 혼자 감동에 젖어 있는 동안 군악대 악장이 지휘봉을 힘차게 움직였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합주곡. 군악대가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환대와 환영의 의미를 담은 웅장하고 경쾌한 곡이었다.

엔리코르가 17문 중앙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화려하고 근사한 정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격식 있는 차림새보다 나를 놀라게 한 건 다른 것이었다.

‘엔리코르 머리카락… 뭐지?’

분명 까슬까슬하게 짧던 엔리코르의 머리카락이 오파츠 연구에 매진하기 전처럼 길어졌다. 한 갈래로 단정히 묶은 머리카락은 순간 가발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내가 그의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동안, 엔리코르는 성큼성큼 카펫을 밟고 들어섰다. 르페브르 가문의 문양이 수놓아진 흰 망토가 가볍게 펄럭였다.

카펫 양옆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은 검집을 끼운 검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미동도 없었다. 흠잡을 곳 없을 만큼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엔리코르가 충분히 걸어왔을 즈음에, 슐로이츠가 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슐로이츠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붉은 카펫을 밟고 걸어간 슐로이츠는 엔리코르 앞에 서서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환영하네, 르페브르 공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총사령관님.”

엔리코르가 슐로이츠의 손을 잡으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세계에 카메라가 있었다면 기자들이 셔터를 열심히 눌러 댈 장면이었다.

‘아닌가? 군부령이라 보안상의 이유로 안 되려나?’

비록 카메라는 없어도 많은 기자들이 열심히 필기구를 놀리고 있었다.

두 눈은 엔리코르의 머리카락을 바쁘게 훑고 있었지만, 나 역시 본분을 잊지 않았다. 슐로이츠의 뒤에 서서 열중쉬어 자세로 열심히 웃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헤벌쭉 웃었다는 소리는 아니고, 의전 매뉴얼에 적힌 것처럼 ‘외빈에게 정중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신뢰감 가득한 미소’라는 걸 틈틈이 연습했다.

그때였다.

엔리코르의 눈동자가 흘긋 나를 향했다. 나를 본 그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어서 약간 민망해졌다. 분명히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은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긴장해 각을 잡고 있는 게 엔리코르 눈엔 웃겼던 모양이다. 엔리코르가 슐로이츠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기면서 말했다.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 특히 묘사가 자주 되었던, 온화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의전이 훌륭하군요, 총사령관님. 르페브르를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의전 만찬에는 프르미에 그랑 크뤼급 와인을 세팅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와인은 환대를 상징하는 품목으로, 외빈에 따라 급은 낮아도 특색 있는 와인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만찬 테이블에는 깨끗한 흰색 천을 까는 것을 권장하며, 테이블 장식으로 꽃은 가급적 피하고 탐스러운 제철 과일을 우선으로 한다. 향기가 강한 꽃은 음식의 맛을 해치고 와인을 음미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양초 또한 만찬 테이블에 반드시 준비해야 할 장식이다. 양초의 개수는 홀수로 준비해야 하며, 양초가 만찬 도중 절대로 꺼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미리 만찬 시간을 계산해….

나는 책상에 산처럼 쌓인 의전 자료집을 홀가분한 심정으로 덮었다.

이런 자료와 문장들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어서 그냥 내친김에 정리를 해 버렸다. 후임자가 나처럼 고생하지 않길 바라는 뜻이었다. 비상사태는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니까.

하기야 슐로이츠 같은 천재는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니, 이런 텅 빈 군부령이 또 생길 것 같진 않지만.

“안녕히 주무십시오, 블란데아 지휘관님!”

“로라도 잘 자. 수고했어.”

“아닙니다!”

로라도 내내 못 잔 건 마찬가지였고, 오늘은 드디어 편하게 잘 수 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도 못했지만 어쩌다가 선잠이 들면 글자가 동동 떠다녀 벌떡 일어나곤 했다.

엔리코르는 이틀간 머물 예정이었지만, 공식적인 의전은 첫날에 집중되어 있었다. 라자크 왕국의 관례였다.

협탁 위의 등불을 켜 놓은 나는 그대로 베개 위에 얼굴을 묻었다.

‘엔리가 식사 잘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들었고, 다음 날 일찍 눈을 떴다.

계절이 익어 갈수록 좋은 점은 해가 일찍 뜬다는 점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일어날 시간이 아니라 조용한데, 사위는 푸르게 밝아 오니. 난 동이 막 텄을 때의 이 고요함이 무척 좋았다.

연무장으로 간 나는 오늘도 늘 그랬듯 정해 놓은 만큼 달리고 나왔다.

“넌 여기서도 정말 하루 종일 뛰는구나.”

뒤를 돌아본 나는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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