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오해는 오해를 부른다-(6) (72/190)

그날 이후 군부 기지는 영접 의전을 준비하느라 몹시 바빴다.

그 바쁜 인원엔 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나 바빴는지, 그날의 일조차 제대로 되짚어 볼 겨를이 없었다.

제대로 잠들 시간도 확보하지 못하고 계속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했으니까.

‘사람은 도대체 언제 보충되는 거야?’

선대 총사령관이었던 매드로스 공에게 새삼 분노가 차올랐다.

정말 이렇게 바쁜데, 한 명이라도 빠졌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새삼 그날 큰 탈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양쪽 손바닥에는 붕대가 감겨 있긴 했지만 말이다. 깃펜을 살살 쥐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청사 깃발 관리 누가 한 거냐?”

특히 라파엘은 웃고 있었으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난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정한 낯으로 내뱉는 말은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와, 얘네 봐라. 진짜 제대로 빠졌네. 가장자리가 2mm나 찢어진 걸 여태껏 달아 놓고 있었냐? 어? 편하지? 군부에 사람이 없으니까 편하고 좋지? 이참에 평생 편하게 만들어 줄까?”

“아닙니돠아아아악!”

“시정하겠습니다아아악!”

‘귀 따가워.’

외부 인사를 맞는 공식적인 일정은 처음이라 그런지, 새로운 면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때, 나를 발견한 라파엘이 헉하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블란데아 경!”

순식간에 내 앞에 선 라파엘이 물었다.

“그 손으로 깃펜 잡으셔도 됩니까?”

“그럼. 이렇게 잡으면 쓸 수 있어.”

보드라운 솜털이나 겨우 쥘 법한 느낌으로 손을 살살 접어 보이자 라파엘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죄송해서 죽고 싶습니다.”

손바닥에 유리 조각들이 우수수 박힌 날부터 매일 듣는 말이었다.

“라파엘 경. 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아?”

“저와 디오스를 죽이겠다는 생각이요?”

“아니.”

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난폭한 생각 하지도 않았어.”

“죄송합니다. 그럼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무도 근신 처분 안 받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어.”

“일이 좀… 많죠?”

“아주 많지. 경은 좀 잤어?”

라파엘이 웃음을 흘렸다. 웃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나중에 보자고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블란데아 경!”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아그네스가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이제 오십니까?”

“밤새웠어?”

“예….”

“어제도 못 잤잖아.”

초췌한 얼굴의 아그네스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내일은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젊을 때 자야 하는데. 과로를 하다가 죽기까지 한 나는 좀 심각하게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라파엘 경이랑 디오스 경이 있어서 다행이네.”

“그럼요. 블란데아 경도 계시고요.”

나는 아그네스의 맞은편에 앉아서 의전 순서를 다시 확인했다. 준비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눈이 핑핑 돌아갔다.

“군부와 르페브르 가문의 조화로운 관계와 미래 지향적인 협력 방식을 대표적으로 상징할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라고…? 그런 게 뭔데?”

“놀랍게도 이제 그걸 저희가 알아내서 정해야 합니다.”

“…정하기만 하면 주방에서 준비는 할 수 있고? 그들과 합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닙니다. 목록만 정해서 넘겨주면 준비는 주방에서 알아서 할 겁니다.”

“알아서?”

이 무책임한 말은 뭐지?

“그럼… 내가 당장 송로버섯 기름을 뿌린 신선한 굴을 전채로 준비하고, 블리고 왕국산 와인에 재운 칠면조구이에 로스트비프와 북해에서 공수한 바닷가재 샐러드를 준비하라고 해도?”

육해공에서 조화를 찾으라고 대충 말해 보았는데도, 아그네스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선선히 되물었다.

“제 경험으로 주방에서 웬만한 건 거의 다 공수해 내고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할까요?”

“아냐. 농담이었어.”

연신 “괜찮지 않나요?” 하고 중얼거리는 아그네스도 그다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외빈이 방문하실 때마다, 어떤 음식과 술을 준비해야 할지 항상 골머리를 앓았는데 경이 르페브르셔서 참 다행입니다.”

물론 외빈이 먹지 못하는 음식의 종류는 미리 서류로 전달을 받긴 하지만 안 그래도 없는 사람들끼리 의전을 급하게 준비하는 중이니 가문 사람의 의견이 매우 소중한 상황이었다.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 아무것도 대접 못 하긴 했겠네.”

“그러니까요.”

엔리코르… 굶길 뻔했는걸…?

나는 예전 의전 사례를 기록해 둔 자료집들을 찾아보며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현재 군부 기지에는 의전대가 없었다. 기존에 의전을 맡던 간부와 이하 기사들까지 거의 다 숙청당했던 것이다.

인수인계?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미 나간 선임자한테 연락?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비록 대귀족 가문의 영애로서 배운 건 많았지만, 그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외빈 의전을 준비하는 교육은 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매드로스 공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산처럼 쌓인 의전 자료집들을 부지런히 살폈다.

원래는 내가 의전관이 될 예정이었는데, 양손이 이 모양이라 반려되었고, 말쑥하고 직급 서열도 적당히 높은 라파엘이 이번 의전관으로 결정되었다.

이틀을 꼬박 자료를 찾고 주방도 다녀오며 고민하던 나는 심각한 얼굴로 정찬 메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거면 됐겠지?”

정찬의 주요 메뉴로는 겉껍질을 바삭하게 구운 농어구이를 택했다. 농어가 짠물과 민물에 걸쳐 사는 물고기이니, 일단 거기서 조화의 의미를 찾으라고….

여기에 소금에 절인 하몽에 멜론을 겹친 요리를 추가했다. 그 밑에 이 두 메뉴를 선택한 이유를 최선을 다해서 포장해 써 놨다.

상기 요리는 두 가지 재료만으로 조화로운 맛을 내기 때문에 만찬 요리로 손색이 없으며, 또한 본래 강조하고 싶은 의미인 ‘조화와 협력’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것으로….

그 외의 요리들도 하나같이 어떻게든 조화라는 의미를 짜낼 수 있는 요리들로 구성했다.

물론 샐러드까지 겹친 요리로 만들 수는 없었다. 잘못하다간 개밥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민에 고민을 하던 나는 아카시아꽃을 뜯어 넣기로 결정했다.

‘괜찮겠지?’

원래 르페브르라는 가문은 정화라는 이능 때문에 흰색 꽃에 많이 비유되곤 한다. 그 점을 강조해 적긴 했는데….

‘괜찮겠지? 모르겠다.’

그렇게 열다섯 개의 요리를 준비한 후, 와인은 르페브르산 와인과 프로키온 영지의 와인을 각기 준비했다.

뭘 준비하든 엔리코르야 조용히 먹을 것 같긴 한데, 공식 접빈 음식은 항상 공문서로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만찬 음식을 준비하면 그 밑에 왜 이런 요리를 준비했는지 무조건 납득이 가는 이유를 적어 놔야 했다.

여기에 접빈관도 정리를 해야 했고, 의장대 사열도 준비해야 했고 공식 환영식, 수행원들과의 인사, 공식 의전이니만큼 취재를 원하는 기자들의 명단 확인, 르페브르에서 오는 행렬이 머물 숙소까지 준비를 해야 했다.

하루 종일 준비를 하다 보니 며칠간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나는 그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은 밤이 아니고 새벽입니다! 블란데아 지휘관님!”

“안 피곤해?”

“조금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피곤한 기색이면서 쩌렁쩌렁 소리치는 로라를 보면서 나는 힘내라고 말하고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

“다 했어….”

며칠 후.

나는 흐느적거리며 책상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눈이 다 아팠다.

아그네스와 함께 오늘은 진짜 잘 수 있겠다고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블란데아 지휘관님!”

“로라? 무슨 일이야?”

앉아 있을 힘도 없어서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내가 부스스 일어났다.

“그… 급보가 왔습니다!”

“…무슨 급보인데?”

“나흘 후 의전 일정에 왕실에서도 왕족이 포함된 사절을 보내겠다고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뭐?”

내 얼굴에서 핏기가 쭉 사라졌다.

의전 일정은 외빈이 대령하는 수행원 숫자까지 정확히 맞춰 준비가 된다. 일고여덟 명의 오차가 있을 수는 있으니, 그 정도는 감안해서 준비하지만….

왕실에서 보내는 사절 규모가 작지도 않을 텐데. 적어도 오십 단위일 텐데, 막 의전 일정을 거의 다 맞춘 곳에 갑자기 추가로 보내겠다고?

“…아그네스 경.”

“예, 블란데아 경….”

“혹시 왕실까지의 화합을 고려한 음식으로… 만찬 메뉴를 다시 준비해야 해? 숙소도? 접빈관도 다시? 접견 순서도?”

“…….”

“아그네스 경…. 울지 마.”

내가 달래자 울먹이던 아그네스가 창피한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나도 울고 싶었다.

***

“군부에서 왕실의 방문을 거절했다니?”

뜻밖의 소식에 왕비 에스핀의 아름다운 얼굴에 깊은 불쾌감이 서렸다. 그녀의 앞에는 1왕자 로티스가 서 있었다.

“몇 시간 전에 돌아온 답변입니다, 어마마마. 총사령관이 직접 거절을 했더군요.”

“네 아버지는….”

하고 말하던 에스핀 왕비가 얼굴을 미약하게 일그러뜨리며 말을 바꿨다.

“전하는 무어라 하시던?”

“르페브르와 군부 사이의 거래 문제라 왕실이 간다는 걸 거절해도 그러려니 하시지요. 이미 왕실 확인도 끝난 거라 틀린 말씀이 아니기도 하고요.”

“그래, 늘 그러셨지. 다른 이들의 사정은 어찌나 잘 헤아려 주시는 분인지.”

왕비의 뼈 있는 말에도 로티스의 달콤한 미소가 서린 낯에는 변화가 없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어마마마. 일단은 정당한 사유도 있습니다. 지금 왕실의 의전까지 다시 준비하려면 일정을 맞출 수가 없다더군요.”

하지만 왕비의 표정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젊은 총사령관이, 매드로스 공의 세력을 아주 흉포하게 쳐 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단다. 이전까지는 정석대로 정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알 수가 없으니.”

그녀는 새하얀 도자기 찻잔도 내려놓고, 푸른색 비단 드레스로 덮인 무릎을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로티스 왕자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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