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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란데아 지휘관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죽을 것 같아….”
로라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한 후 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일주일간 쉬었던 걸 계산해 보니 원래의 체력으로 끌어올리려면 나흘간 최소 평소의 두 배는 연무장을 뛰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할 일이 배정되어 있는 덕에, 새벽부터 온종일 연무장만 돌 순 없었다.
덕분에 지금도 밤이었다.
정말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뿌듯한 사실은 있었다.
‘성검 휘두르는 실력은 확실히 늘었어.’
의무 토벌을 죽어라 나간 보람도 있었고, 라파엘도 교련을 해 준 덕이었다.
적어도 괴수 한 마리 정도는 오파츠 없이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직급만 비정상적으로 높지, 사실 입단한 지 두 달이나 된 갓 태어난 생도 수준이었는데도.
생도들은 여섯이서 한 마리를 잡는 것도 버거워하는 걸 생각하면, 내 실력은 스스로 뿌듯해해도 괜찮을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을 때까지 앉아서 쉬다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사이 얼음이 동동 뜬 차가운 주스를 공수해 온 로라가 말했다.
“블란데아 지휘관님! 삼십 분 전에 대저택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로라는 르페브르 저택을 대저택이라고 불렀다. 차가운 주스로 목을 축인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지? 가져왔어?”
“예, 여기 있습니다!”
나는 로라가 내민 편지… 가 아니라 거대한 소포를 받아 들었다. 아주 묵직했다. 누가 봐도 그냥 편지가 아니었다.
뭔가 있다는 느낌이 왔다.
나는 숙소까지 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군부령에 무지막지하게 심어 놓은 꽃나무 밑에는 벤치들이 있었고, 색을 맞춘 야외 테이블들도 딸려 있었다.
키 큰 가로등이 밝은 빛을 뿜고 있으니 글자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잘 봉인된 봉투를 뜯으려고 하는데 로라가 어디서 났는지 페이퍼 나이프를 내밀었다.
“이걸 왜 목에 달고 다녀?”
“라파엘 경이 달고 다니라고 하셨습니다!”
“내 준사관에게 뭘 시키는 건지 모르겠네.”
“뺄까요?”
“마음에 들면 계속 하고 있어.”
“전 마음에 듭니다!”
나는 픽 웃으면서 페이퍼 나이프를 받아들였다. 나중에 보석도 하나 박고, 크기도 좀 작은 것으로 주문해서 선물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는 늘 그렇듯 안부 편지와 함께 책자 수준의 두꺼운 서류가 두 부 들어 있었다. 하나는 내가 읽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슐로이츠에게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후자는 르페브르 가문의 인장으로 한 번 더 봉해져 있었다.
편지는 나중에 읽기 위해 뒤로 보내고, 내 이름 앞으로 온 서류를 읽어 본 나는 발꿈치로 툭툭 바닥을 두드렸다.
“왜 이렇게 소포가 크나 했더니 그럴 만하네.”
얌전히 서 있는 로라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프로키온 경을 뵙고 와야겠어.”
“예!”
뜯어 본 서류를 갈무리한 후, 나는 로라와 함께 중앙 청사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대화라도 했을 텐데, 사실 긴장이 되어서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무실에 반 감금된 날 이후 처음 슐로이츠를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잔뜩 했던 긴장도 무색하게, 슐로이츠의 집무실이 있는 중앙 청사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교대로 청사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슐로이츠가 이미 관저로 돌아갔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럴 땐 슐로이츠의 임시 보좌관이었을 때가 좋았네.’
그냥 열쇠로 따고 들어가서 책상에 올려 두면 되니까.
“어쩔 수 없네. 돌아갈….”
“블란데아 경?”
놀라서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그네스가 다른 준사관들과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걸음을 바삐 해 서둘러 내 앞에 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프로키온 경에게 드려야 할 서류가 생겨서 왔는데 자리에 계시지 않네.”
“아! 오늘 총사령관님께 손님이 오셨거든요.”
“손님?”
“예. 그래서 총사령관님께서 평소보다 일찍….”
아그네스가 말끝을 흐렸다. 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일찍은 아니시지.”
“그렇지요?”
함께 웃은 아그네스가 말했다.
“어쨌든 총사령관님께서는 평소보다 이르게 관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나는 아그네스에게 다가가 소포를 건넸다.
“그럼 나 대신 프로키온 경께 좀 전해 드릴래?”
생각보다 두툼한 소포를 본 아그네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르페브르 가문에서 왔다면 분명 중요한 것일 텐데…. 이 정도면 지금 저와 같이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총사령관님이 서류에 관해 물어보실 수도 있잖습니까.”
“…그런가?”
“예.”
나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아그네스를 따라갔다. 자연스럽게 로라가 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아그네스가 만류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관저에 손님이 와 계셔서요. 가능한 한 간소하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라 준사관은 먼저 보내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로라 준사관 대신 숙소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알겠어. 그게 좋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로라를 보았다. 그런데 로라의 표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의욕 과다인 표정인데.
‘왜 저러지?’
나는 아그네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사람들과 떨어져서 물었다.
“로라. 표정이 왜 그래?”
“혹시 지휘관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제8 지휘관님을 고발하려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녀답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 로라의 눈썹이 이윽고 축 처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네펠레 영지에서의 악몽에서 덜 벗어났나 봅니다. 정진하겠습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마찬가지로 어두운 곳에선 호러 서스펜스 악몽을 꾸느라 잠을 못 자게 된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오늘 수고 많았어. 가서 쉬어.”
“예! 내일 뵙겠습니다!”
로라를 보낸 후, 나는 아그네스와 함께 봄꽃 향기가 가득한 밤을 걸었다.
“그런데 프로키온 경께 어떤 손님이 오신 거야? 왕실에서 온 건가?”
“아. 아닙니다. 블란데아 경. 총사령관님의 개인적인 손님이십니다. 프로키온 영지에서 가신들이 왔다는군요.”
“그래?”
생각보다 더 개인적인 손님들이구나.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 슐로이츠는 영지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걸로 나온다.
작중에서 슐로이츠는 프로키온의 가주 자리는 기어이 손에 꿰찼으나, 정작 영지 자체엔 무관심하게 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계모가 어릴 적에 먹인 독 때문이었다. 본인의 건강 상태며 수명의 정도를 가늠하고 있던 슐로이츠는 프로키온 영지에까지 신경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중독도 되지 않았고, 건강하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
“들어오라고 해.”
“예, 총사령관님.”
열린 문틈 사이로 들리는 슐로이츠의 목소리.
잠시 후, 기사가 나와 슐로이츠가 만남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는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슐로이츠의 침실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눈이 동그래졌다.
물론 슐로이츠가 혼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프로키온 영지에서 가신들이 왔다고 했으니까.
가신 셋이 슐로이츠의 곁에 주르륵 서 있는 것도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아버지 집무실에 가끔 놀러 갈 때도 비슷한 장면을 보았으니까.
내가 놀란 이유는 탁자 위에 놓인 술병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나는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르페브르 경.”
순간 나를 보던 가신들이 동시에 토끼 눈을 떴다. 슐로이츠도 그들의 이상 반응을 감지했는지 이마를 찌푸렸다. 가신들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분위기가 떠오르자 슐로이츠가 물었다.
“왜. 르페브르 경에게 할 말 있나?”
“해, 해도 됩니까?”
“뭔데 그래. 해 봐.”
“와아아아악!”
나는 움찔 놀랐다. 가신들이 허겁지겁 내 앞으로 뛰어오더니 각자 손수건을 꺼내 손을 벅벅 닦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내 앞에 몸을 굽혔다. 셋이 동시에 이러니 나는 잠깐 당황하다가 손등을 내밀었다.
와다다 달려든 것과 달리, 그들은 격식과 예법에 맞춰 내 손등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정제되지 않은 흥분이 가득 차 있었다.
“말로만 듣던 르페브르의 직계시군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만나서 반갑네.”
가신들의 눈이 반짝였다.
“르페브르 경!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것도 인연인데, 프로키온 영지에 한번 방문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너희가 가주인가? 왜 멋대로 내 영지에 초청을 해.”
슐로이츠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가신들은 움찔 어깨를 떨었지만 기대와 미련이 넘치는 표정으로 날 다시 쳐다보았다.
당황스러웠다. 프로키온의 가신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긴 했는데. 슐로이츠 앞에서 날 이렇게 심하게 반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슐로이츠 앞에서 엄청 쪼그라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슐로이츠를 무서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저 정도야 뭐.
막연히 슐로이츠와 가신들이 가깝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던지라 신기했다.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긍정적인 공수표를 날려 주는 게 좋겠지? 이렇게 눈을 반짝이는데.
“초대해 준다면 시간이 될 때 방문해 보겠네.”
“정말이십니까!”
“좋은 소식을 가져가게 되었군요, 가주님! 이렇게 된 것 지금 당장 초청장을 쓰도록 하지요!”
“오기만 해 주신다면 바로 성대한 연회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비록 영지에 안주인이 계시지 않지만 레이디 레슬….”
슐로이츠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가.”
“예?”
“군부령에서 아예 나가서 일주일 안으로 영지로 귀환해라.”
“예? 하, 하지만 가주님….”
내로라하는 기사들도 못 버티는 게 슐로이츠인데 한낱 가신들이 버텨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그들은 내게 연신 악수를 청한 후 마지막엔 기쁜 표정으로 물러났다. 혼이 빠져나가서 그랬지만, 사실 나는 제법 긴장해 있었다.
난 따지고 보면 반쯤 근신 처분을 받고 나온 거니까. 슐로이츠의 반응이 예상이 가지 않았는데….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 놓인 잔에는 진한 붉은색의 술이 담겨 있었다.
“오파츠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있나?”
“아. 네, 프로키온 경. 저택에서 중요한 서류가 왔습니다.”
나는 아그네스를 쳐다보았다.
아그네스가 내내 들고 있던 묵직한 소포를 슐로이츠 앞에 내려놓았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아그네스는 책상에서 금세 페이퍼 나이프를 가져와 공손히 내밀었다.
슐로이츠는 서류를 확인하고 말했다.
“르페브르에서 정식으로 오파츠를 가지고 오겠다고.”
“네. 총 250개의 오파츠를 수급해 제 오라버니가 직접 가져오겠다고 합니다. 정기적인 공급 일정 등 상세한 사항은 그때 같이 논의했으면 한답니다.”
“의전 준비해야겠군.”
슐로이츠가 아그네스에게 말했다.
“디오스더러 지금 오라고 전해라.”
“예. 총사령관님.”
아그네스가 바로 밖으로 나갔다.
‘의전까지 준비하는구나.’
새삼 슐로이츠가 오파츠에 관심이 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기야, 나도 오파츠가 아니라면 그와 크게 엮일 일이 없었을 거라고….
며칠 전의 나였다면 순진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잘 알고 있다.
슐로이츠는 오파츠가 아니어도 내게 충분히 신경을 써 줬을 거라는 사실을.
그는 내게서 엔리케 시에도를 넘겨받고 싶어 했으니까.
벌써 몇 번째 하는 건지도 모를 생각을 또 곱씹어 보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