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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란데아 경!”
“지휘관님!”
일주일 만에 자유로워진 나를 라파엘과 로라가 최선을 다해 환대해 주었다. 그래 봤자 의무실에 있었던 건데도 말이다.
“경! 드십시오.”
나는 라파엘이 빙긋빙긋 웃으면서 내미는 것을 보고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흰 소금 빵인데요. 근신에 준하는 처벌을 받다가 나오셨으니 드셔야지요. 군부 관례입니다.”
“…….”
그래, 알지. 알아.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도 걸핏하면 갇히던 남주가 먹던 거라서. 나는 일단 입 안에 흰 소금 빵을 넣었다.
의외로 버터 맛이 짭짤하게 감도는 게 맛있었다.
어쩐지 그 지랄발광이 특기인 남주가 이건 나올 때마다 조용히 받아먹더라.
나는 빵을 씹어 삼키고 물었다.
“프로키온 경에게 보고도 하러 가야 해?”
“아닙니다. 제가 이미 보고 드렸습니다.”
라파엘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런데 블란데아 경.”
“응?”
“그…. 음음.”
“왜? 말해.”
“총사령관님이 그렇게 무서우십니까?”
“무섭지, 그럼. 근데 왜?”
그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일주일 전에 …총사령관님의 지나친 말씀엔 좀 화를 내도 되셨을 텐데요.”
“지나친 말? 아….”
무슨 말을 이야기하는지 알겠다. 내 몸이 내 것인 줄 아느냐고 하던 슐로이츠의 말… 그걸 말하는 거겠지.
“블란데아 경은 왜 그렇게 총사령관님 한정으로 목화솜처럼 구십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로라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라파엘 지휘관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총사령관님한텐 다들 공손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리야 당연하지만, 음….”
라파엘이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블란데아 경은 솔직히 아니시잖습니까?”
“음….”
“경께서는 일단 르페브르의 영애시고요.”
“아, 가호도 있구나.”
“예. 그렇습니다.”
“…혹시 내가 프로키온 경과 싸우기를 바라는 거야?”
내가? 감히 슐로이츠에게? 라파엘이 깜짝 놀라더니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그날은 총사령관님께서 좀… 너무하셨잖습니까.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냐. 라파엘 경이 프로키온 경의 부관인지, 내 부관인지 아리송해서.”
“저 진지합니다, 블란데아 경….”
나는 픽 웃었다.
하긴 이젠 내 호위로 역할이 바뀌었으니까 슬슬 내 편을 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 말이 많이 충격적으로 들렸거나. 나는 라파엘을 달래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하면 납득을 시켜 줄 수 있을까?
“화를 내고 싶어도 그때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어.”
“…아. 참. 그렇죠. 쓰러지셨으니까요. 저는 그날 경이 너무 크게 상처를 입어서 아무 말씀도 못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라파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뺨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으면 숨이 턱 막히잖습니까. 아무 말도 못 하게 되고요.”
말하던 라파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진짜 그러신 거였습니까?”
‘…일부러 이러나?’
아프다고, 내 양심이.
라파엘 클로비스는 절대 모를 거다. 지금 내게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내 양심을 쑤셔 대는 말들이라는 걸.
이 정도면 슐로이츠가 보낸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 린 없겠지만.
“블란데아 경?”
나는 라파엘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난 프로키온 경께 어떤 유감도 없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
“걱정이 되니까 말이죠.”
아그네스는 쌩쌩해진 눈으로 말했다.
“솔직히 그렇잖습니까? 블란데아 경은 라자크 귀족의 의무 때문에 기한을 두고 입단하신 분인데…. 사실 7할 이상의 귀족들이 의무 때문에 군부에 오시죠. 그리고 그런 귀족들은 거의 다 왕도로 무탈하게 돌아가시잖아요.”
듣던 라파엘이 흐음 하면서 팔짱을 꼈다. 아그네스가 말을 이었다.
“르페브르의 직계께 이변이 생기면 왕국이 뒤집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왕도의 귀족들이 입단에 관한 법례를 수정하자고 여론을 형성할 수도 있잖습니까?”
“너 되게 냉정한 놈이구나.”
“예? 제가요?”
“블란데아 경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군부에 들어올 귀족들의 물이 흐려지는 걸 걱정하고 있잖아.”
아그네스가 머쓱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만…. 블란데아 경에겐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하지 마시고요.”
“아그네스.”
라파엘이 두 손을 모아 겹친 후 경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블란데아 경에게 목숨을 구명 받은 사람이야.”
“…예?”
“그런 내가 어떻게 블란데아 경에게 감히 진실을 감출 수 있겠어? 거기에다 나는 기사이기도 한걸.”
“아니, 잠깐만요…. 라파엘 경?”
아그네스가 토끼 눈을 떴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사실 군부에 입단하는 귀족들의 질이 떨어지면 블란데아 경에게도 좋을 게 있습니까? 어쨌든 1년은 블란데아 경도 여기 계셔야 하는걸요.”
“그야 그렇지.”
“저희는 평생 군부에 있을 거고요.”
“맞아.”
“그러니까요. 총사령관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도 없고, 저 블란데아 경께 도움을 받은 적도 많으니 진짜 최선을 다해서 신경을 쓰고 있다고요.”
마지막은 거의 애원조였다. 라파엘은 키득키득 웃었다.
아그네스의 뒤로는 잔뜩 쌓인 서류들이 있었다.
디오스와 라파엘이 복귀하면서, 슐로이츠의 보좌 업무는 온전히 디오스에게로 넘어갔다. 2할 정도는 라파엘이 가변적으로 확인하게 되었으며, 아그네스는 네펠레 영지에서 있었던 일을 전담해 조사하고 있었다.
라파엘이 턱을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근데 넌 아까부터 거기서 뭘 찾고 있는 거냐?”
디오스는 색인을 확인하며 서류 몇 개를 꺼내 들려다가 아그네스에게 제지당했다.
“죄송하지만 여기 서류들은 총사령관님 직인이 있어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순순히 서류를 내려놓은 디오스가 물었다.
“아그네스.”
“예, 디오스 경.”
“네펠레 영지에서 일어난 사건 말이다. 한밤중에 일어났나?”
“예.”
“불이 다 꺼져 있었어?”
“그렇습니다.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아니, 중요한 건 아니….”
“이 자식 이거.”
라파엘이 갑자기 턱을 쑥 들이밀었다.
“견적이 나왔네. 의무실에서 한밤중에 무슨 일 겪은 모양인데.”
디오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뭔데. 빨리 말해.”
“…….”
“뭐냐고. 알아야 도움을 줄 거 아냐!”
디오스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자 라파엘이 헉하며 말했다.
“혹시 그 괴물이 너한테도 찾아왔냐? 아그네스! 안 되겠다. 역시 이쪽에도 조사를….”
“아니니까 좀 닥쳐 봐.”
“아니라고? 그러면?”
디오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 하면서 운을 뗐다.
“한밤중엔 불빛이 없으니 아예 잠을 못 자던데. 의무실의 온 침대를 다 뒤져서 등을 찾는 것 같더니 없으니까 한숨만 계속 내쉬고 벌벌 떨다가 결국….”
말을 하면서도 디오스는 뭔가 민망했다. 라파엘과 아그네스가 자신을 너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고, 남의 약점을 입에 올리는 것 같아 불편했기 때문이다.
“…울었어.”
라파엘과 아그네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침음성을 흘렸다.
“블란데아 경은… 첫 토벌 때도 놀란 티를 하나도 안 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강철 심장인 줄 알았는데 오해였네.”
라파엘의 말에 아그네스가 대답했다.
“오파츠를 만들어 낸 르페브르 가문의 영애시잖습니까. 예전에도 괴수를 몇 번 보셨을 겁니다.”
“그렇지?”
“예. 그리고….”
아그네스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레이의 시신을 가장 상세하게 확인한 이들 중 한 명이 그였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블란데아 경을 덮쳤던 그 괴이한 인물은, 얼굴 가죽이 조각보처럼 기워져 있는 여자였거든요.”
“…나라도 울겠다.”
“저도 울었을 겁니다.”
“차라리 괴수가 낫지.”
“그렇죠. 심지어 괴이쩍은 걸로 끝난 것도 아니고, 블란데아 경을 납치하려고 했었으니까요.”
네펠레 영지에서 있었던 사건은 당연히 보고받아 알고 있지만, 상세한 묘사는 지금 처음 전해 듣는 디오스가 한 손으로 입매를 감쌌다.
침대에서 몸을 웅크리고 숨죽인 채 울고 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라파엘이 디오스를 툭 치며 물었다.
“블란데아 경 잘 달래 드렸지?”
“…등불을 양보했어.”
그녀에게 손수건을 줬다는 말은 왠지 하고 싶지가 않아서 삼켰다.
라파엘이 물었다.
“끝?”
“끝이지.”
“그래, 뭐…. 블란데아 경에게 불친절한 네가 한 것치곤 나쁘지 않네. 나쁘지 않은 정도야.”
디오스에게 기대치가 낮다는 티를 여실히 풍기며, 라파엘은 블란데아를 보러 가겠다며 휙 나가 버렸다.
마찬가지로 네펠레 영지의 일을 조사하느라 바쁜 아그네스 역시 양해를 구하고 서류를 든 채 가 버렸다. 털썩 앉은 디오스는 괜히 창밖이나 한번 쳐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연거푸 얼굴을 쓸어 넘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