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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오해는 오해를 부른다-(1) (67/190)

06. 오해는 오해를 부른다

‘의무실에서 나가면 몇 바퀴나 뛰어야 할까?’

어쩌면 하루 종일 연무장을 뛰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이나 가만히 의무실에 갇혀 있어야 하니 말이다.

나는 일인용 침대 옆에 난 창틀에 턱을 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달콤한 배꽃 향기가 흘러들어 오는 밤이었다.

몇 시간 전, 슐로이츠에게 가호를 내린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일어났을 때에는 로라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고, 옆에는 군의관이 휘갈겨 놓은 진단 카드가 있었다.

일주일간 외출 금지.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의무실은 사방이 조용했다.

작중에서도 시끄러운 건 생도들이 사용하는 병실이었다. 간부 전용 의무실은 조용한 편이었다.

간부들은 생도들보다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 다치는 경우가 적었다. 다치지 않는 대신 그냥 죽어 버리는 경우가 훨씬 잦았다.

평소엔 비어 있는 경우가 더 많은 이곳에, 지금은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긴 했지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슬리퍼에 발을 꿰고 커튼을 젖혔다. 가장 먼 병상에 한 명이 누워 있었다.

아니, 누워 있는 줄 알았다. 그쪽도 커튼이 두껍게 쳐져 있으니까.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불렀다.

“디오스 이젤 경?”

“…….”

“자나?”

자는 건가 싶어서 돌아서려고 하는데, 낮은 목소리가 커튼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깨운 건가? 하지만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혹시 내 쪽에 불을 켜 놓고 자도 될까?”

“…….”

“밝진 않을 거지만, 불편하면….”

“…됩니다. 켜 놓고 주무십시오.”

“고마워.”

나는 다시 돌아와 커튼을 쳤다.

협탁 위에는 작은 등불이 놓여 있었다. 마법 수정구가 들어가 있는 고가품이었다. 비너스가 몇 년 전 내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들고 오긴 했는데 이렇게 쓸 줄이야.’

은은하게 퍼지는 불빛이 나를 안심시켰다.

침대에 누워 의무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 넓고 조용한 의무실에 솔직히 디오스가 있어서 덜 무섭긴 했다.

그레이 같은 게 또 나타나도 쟤가 분명 이기겠지?

처음에는 디오스와 같은 공간에서 자야 한다는 게 어색했는데, 강한 사람이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잠이 더 잘 왔다.

‘디오스는 긴급 토벌에서 다쳤다고 했지.’

라파엘도 오파츠가 깨졌다고는 했는데, 그래도 의무실에 올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다.

거의 반 근신 상태로 의무실에 강제 입원하게 된 것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로라는 매일 식사를 가져다주었고, 뭐 별달리 나쁠 게 없었다. 나가서 연무장을 뛰어야 할 걸 생각하면 그거나 좀 두려웠지.

‘디오스도 생각보다 오래 있네. 얼굴은 한 번도 못 봤지만.’

나는 일단 총사령관한테 깨진 지휘관이라, 병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암묵적으로 지켜야 하는 품위라는 게 있으니까.

그래서 로라가 가져다주는 책이나 읽으면서 최대한 조용히 있었다. 디오스와 내내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퇴실을 앞둔 전날 밤.

나는 수정구를 툭툭 두드려 보다가 절망했다.

‘안 켜지잖아!’

군부령으로 돌아온 내내 밤마다 켜 놓고 잤더니 수정구가 다 닳은 모양이었다. 수정구를 새로 갈아 끼워야 했는데, 새 수정구는 내 방에 있었다.

나가서 가져올 수도 없잖아.

나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싶어서 의무실의 다른 침대들을 하나씩 확인해 보았으나 협탁에 소형 조명이 비치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침대로 돌아온 나는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물론 천장에는 등이 달려 있긴 했지만, 이걸 켜면 의무실 전체가 밝아진다.

디오스의 잠을 깨우는 건… 사실 별문제 아니긴 했는데, 군의관까지 오게 될 것 같았다. 야밤에 너무 큰 소동이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세운 무릎을 끌어안았다.

‘로라한테 확인해 달라고 그럴걸.’

계획대로 내일 연무장을 뛰려면 오늘 잘 자 놔야 할 텐데. 뭐, 일주일 동안 많이 자서 괜찮을 것 같긴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아침에 로라에게 들었던 얘기를 생각했다.

저택에서 편지가 몇 통 왔다는데, 슐로이츠는 내게 가져다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것도 업무의 연장선이니까.

무슨 편지가 와 있을까?

생각의 고리가 끊어질 즈음하면 다른 생각을 아무거나 떠올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와, 진짜 안 되겠다.’

목덜미에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무실은 그러잖아도 환자들의 편안한 숙면을 위해서인지 유독 어둡게 조명되어 있었다.

또 어디서 날 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찢어진 여자가 나타날 것 같았다.

머리 위나, 침대 아래나, 이불 밑이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슬리퍼에 발을 뀄다. 와중에 맨발로 뛰어가지 않은 내 자신이 대견하다고 생각하며 총총 걸어갔다.

내가 향한 곳은 디오스와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침대였다. 커튼을 칠까 하던 나는 결국 공포에 굴복했다. 그냥 커튼도 열어 둔 채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았다.

‘디오스는 왜 저렇게 조용히 자지.’

좀 잠버릇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은 채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묘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천천히 무릎 위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고, 그대로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흉측한….

“…디오스?”

나를 응시하던 디오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블란데아 경.”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나는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디오스가 한 발 가까이 걸어 들어왔다.

“왜 여기 있습니까?”

“…….”

“……?”

나는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불이 나가서.”

“…….”

디오스가 돌아섰다. 다시 돌아오는 그의 손에는 소형 등이 들려 있었다.

비너스가 내게 선물해 준 것처럼, 값비싼 장식이 붙어 있는 고급품은 아니었지만 일단 밝은 빛을 냈다. 그거면 충분했다.

사위가 밝아지자 디오스의 얼굴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얼굴의 절반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얼굴을 다쳤어?”

“괴수의 발톱에 관자놀이를 긁혔습니다.”

“눈은?”

“…멀쩡합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왜 붕대를 그렇게 칭칭 동여맸어?”

놀랐잖아.

“애매한 곳을 긁혀서 고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디오스와 대화를 하면서 차차 안정을 찾았다. 사실은 이 어둠을 몰아내는 빛 덕분에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 벌벌 떨면 한여름에도 덥지 않겠는걸.’

불만 껐다 하면 이렇게 등골이 서늘해지는데 무슨 냉기가 필요하겠어. 아주 효율적인 몸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오스 경. 그 등불 빌려 줄 수 있어? 아침에 돌려줄게.”

“그러십시오.”

“고마워.”

손을 뻗었으나, 디오스는 조명을 내게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침대 위 협탁에 조명을 올려 두었다. 잠시 멀어지는 걸음. 얼마 있지 않아 디오스는 이불과 베개를 가져왔다.

내 침대에 있던 거였다. 아깐 너무 경황이 없어서 그냥 우다다 디오스가 있는 쪽으로 날 듯이 걸어왔는데.

‘이 침대에서 그냥 자라는 건가?’

조명이 있으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기껏 배려해 준 사람 앞에서 휙 돌아가기도 그래서, 나는 그냥 고맙다고 말했다.

“블란데아 경.”

나는 그제야 디오스가 나를 평소와 다르게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소엔 르페브르 경, 하고 딱딱하게만 부르더니.

얘도 이젠 제2 지휘관답게, 제1 지휘관과 어느 정도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그건 안 돌려주셔도 됩니다.”

손수건이었다. 디오스는 가볍게 묵례하더니 커튼을 치고 가 버렸다.

‘이걸 왜 주는 거지?’

디오스의 의도를 해석하지 못해 손수건만 내려다보던 나는, 한 박자 늦게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러 보았다.

“…….”

손등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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