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로이츠가 그런 걸 신경을 써 주는 성격은 아니지 않았나?’
작중에선 엔리코르한텐 막 대했던 것 같은데.
***
다음 날.
건강에 더 이상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때문에, 나는 슐로이츠의 집무실로 향했다.
늘 사람이 한둘은 있었던 그의 집무실에 웬일로 사람들이 없었다.
“르페브르 경.”
보고를 끝낸 내게 슐로이츠가 말했다.
“2주 후부터 군부 간부 전원에게 오파츠를 지급할 예정이야.”
“르페브르에서 오파츠 지급이 가능하다고 하던가요?”
“오늘 편지가 왔어. 읽어 봐.”
슐로이츠가 편지를 건네주었고, 읽어 본 나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엔리코르가 2주 후부터 지급하는 오파츠의 양을 대폭 늘리겠다고 적어 놓은 것이다.
‘머리카락도 그렇게 짧으면서 어떻게 하려는 거지?’
일단 뭐 본인이 된다고 하니…. 또 어떻게 방안을 마련한 듯했다.
“가호를 내릴 일정은 라파엘과 함께 계획해 놓도록 해. 오파츠는 일주일에 한 번씩만 새로 지급하기로 우선 결정했으니 빡빡하게 짤 필욘 없겠지.”
“네, 프로키온 경. 일정표는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
“내일까지.”
“알겠습니다. 참, 그런데 라파엘 경이 지금 기지에 없습니다.”
“유적으로 갔나? 의무 토벌이 밀렸을 테니.”
“맞습니다. 아, 디오스 이젤 경도 그래서 보이질 않는 건가요?”
“그래.”
“…아그네스 경은요?”
슐로이츠가 서류를 보다 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경이 하염없이 가여워 해 주길래 이틀 휴가를 줬어. 침대에 기절해 있겠지.”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아그네스 경은 좀 자야 하니까요.”
슐로이츠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와중에도 그는 전혀 한가해 보이지 않았다. 본인한텐 휴가를 줄 수도 없겠지?
그러니 결국 남은 일꾼은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어느새 슐로이츠의 옆에서 보좌 업무를 돕고 있었다.
‘내 이름이네?’
서류를 정리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내용을 보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내용에 내 이름이 삽입되어 있을 경우엔 더더욱.
네펠레 영지에서의 괴변에 관한 서류가 많았다.
군부에 사람이 없는 특수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더 집요하게 들어가는 조사에, 내가 요청했던 그레이의 초상화도 내일쯤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급하게 가져와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군의관이 결정한 일이야.”
“군의관이요?”
“아니면 경이 밤에 잠도 못 잘 것 같다던데.”
“그….”
이렇게까지는 안 해 줘도 되지 않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리코르가 했던 말이 머리에 달라붙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슐로이츠는 내게 신경을 많이 써 주고 있었다.
내가 르페브르의 직계이기 때문에, 오파츠의 가호를 내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니면 그의 부하이기 때문에?
하지만 슐로이츠는 부하의 목숨은 구해 줄지언정 부하를 세심하게 돌봐 주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의 그는, 확실히 나를 여러모로 생각해 주고 있었다.
왜일까?
엔리코르의 말대로, 어쩌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프로키온 경.”
나는 슐로이츠를 보며 물었다.
“제게 왜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는 건가요?"
"왜 이렇게 신경을 써 주냐고?”
슐로이츠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주님에게 넘겨받고 싶은 여자가 한 명 있어서.”
순간 온몸의 혈관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요?”
“당장 알 건 없고. 르페브르 휘하 가문의 영애인 정도로만 알고 있으면 되겠군.”
“넘겨받고 싶다고 하시는 게 통상적인 의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통상적인 의미?”
슐로이츠가 펜을 움직이다 말고 멈췄다.
“아. 결혼을 말하는 건가?”
동시에 나는 그의 얼굴에 어리는 아주 명백한 조소를 보았다. 손을 대면 꼭 냉기가 묻어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좋은 의미가 아니야. 죽일 생각이어서.”
“…….”
누군가에게 목이 졸린 듯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 수 있었다.
“불유쾌한 일이… 있으셨던 모양이네요.”
“있었지. 경은 알 필요 없지만.”
“…네.”
“그러니 경은 내가 해 주는 배려를 하나하나 잘 기억하고 있어.”
슐로이츠는 정말로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지금 그녀의 목숨값을 미리 계산해 주고 있는 거니까.”
“…….”
표정 관리해. 표정 관리해. 표정 관리하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내면의 비명과는 달리 입매는 그저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손발도 아주 싸늘하게 식어, 이대로 그 부위들이 잘려 나가도 알아채지 못할 것 같았다.
슐로이츠는 문득 내 이상함을 감지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피할 새도 없이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훑어본 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경이 떨고 있나?”
“죄송합니다.”
“왜 경이 떠냐고 물었어.”
죽이겠다는 말에 놀라서?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듣지도 못했는데?
정체도 모르는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나 벌벌 떨 만큼… 내가 유순하고 동요가 심한 인상은 아닐 터다.
목 아래가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와중에도, 내 머리는 미친 듯이 굴러가고 있었다.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좀 과감하게 들려도 괜찮았다. 한 스푼이라도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제가 나름대로 지휘관으로서 괜찮은 능력을 보여 드려서…, 프로키온 경께서 제게 신경을 써 주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
“아시다시피 귀족들은 자존심이 강하잖아요. 순간 제가 부정당한 기분에 모욕적… 시정하겠습니다. 당황했습니다.”
내가 말하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억지 같긴 했지만, 아무튼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다.
그래. 매번 나한테 르페브르의 공주님, 하면서 빈정거리던 슐로이츠이니.
차라리 내가 본인의 능력으로 자만에 빠져 있다가,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받은 자아 비대한 대귀족 레이디로 보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사람은 겁을 먹어서 떨기도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을 때도 떠니까.
슐로이츠는 나를 훑어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무심하게 깃펜을 다시 움직이는 손.
“경 역시 왕도의 귀족이긴 하군.”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착각도 심하고.”
“…시정하겠습니다.”
넘어간 건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번 식은 손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로라도 물리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무서워.’
날 찾아서 죽이려는 거 맞잖아.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를 굴렀다.
‘곱게 죽이지 않겠지? 나도 막 입을 찢을까? …마르크 헌트처럼?’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물론 나는 르페브르의 직계고, 대귀족 가문의 영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배경이 더 문제였다.
부모님도 엔리코르도 나를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었다. 거대한 두 개의 세력이 반목을 하는 경우가 아주 쉽게 그려졌다.
최소 전쟁이었고, 최대도 전쟁이었다.
‘그럼 조용히 끌려가 죽어야 하나?’
말이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 찬물을 붓고 얼굴을 처박고 나니 좀 정신이 들었다.
‘엔리케 시에도.’
그 애는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처리해 주신 일이었다.
왕국 최고 귀족가의 안주인답게, 어머니는 아주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해 놓으셨다. 진짜로 미혼의 귀족이 죽었을 경우 마땅히 정리해야 할 법적인 문제 처리까지 전부 끝내 놓으셨으니까.
슐로이츠가 시에도 가문을 찾아간다고 해도, 다른 시체가 들어간 관이나 겨우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포기를 해 주면 다행이긴 한데…. 막연히 안심하기에는 영 걸리고 무서웠다.
슐로이츠는 어마어마한 권력자였다. 최연소 군부의 지배자라는 사실이 내 등골을 자꾸 오싹하게 만들었다.
시에도 가문 사람들이 칩거를 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르페브르령의 깊숙한 곳에 들어갔으니, 정당한 사유가 없으면 왕족이라고 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슐로이츠는 왕족 그 이상이잖아.’
당장 슐로이츠가 시에도 가문을 안 찾아가는 이유는 뭘까? 엔리케 시에도를 오래오래 고문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인가?
아냐. 그 정도로 무섭진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비너스가 제시해 주었던 ‘슐로이츠 앞에서 점점 주눅 들어라’라는 사안은 잠정적으로 폐기 처분을 해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슐로이츠에게 ‘죽이겠다’는 말을 들은 후에 겁을 먹은 모습을 보여 주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까.
배우 뺨치게 섬세한 연기를 펼치면 모를까… 솔직히 그럴 자신은 없었다. 이게 군부에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극단에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을 했으니까…. 수습부터 해야겠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자존심이 크게 상한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는 의욕이 완전히 꺾여 버려 될 대로 되라고 방탕해지는 모습.
두 번째는 비이상적으로 의욕이 타올라 무리하게 발버둥을 치는 모습.
‘두 번째를 고르는 게 좋겠지. 어쨌든 나는 엔리코르 대신이니까.’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본인의 오만한 착각이 깨진 걸 알아 벌벌 떠는 척까지 했으니… 더 열심히 지휘관 업무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기대가 깨진 상대에게 거리를 두려는 모습도 필요하겠지.
그래야 내가 급하게 짜낸 거짓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을 테니까. 되는대로 둘러대느라 허술한 곳이 많은 거짓말이어서 손봐야 할 곳이 많았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