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고 있나요-(19) (63/190)

주변에서 은근히 우리를 훔쳐보고 있던 이들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중에서 나만큼 놀란 사람은 없겠지만.

왕자는 내가 놀란 걸 알았을 텐데도 뻔뻔하게 웃고 있었다.

“네펠레 영지는 파티가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정찬 파티라고 연 게 형편없어. 겨우 구색만 누추하게 갖춰 놨잖아. 보이지?”

새초롬하게 웃는 얼굴로 뒷말을 한 로티스 왕자는, 이 정원에서도 가장 상석인 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여기엔 다 스툴만 뒀지만, 저쪽엔 캐노피가 드리워진 아름다운 치펀데일 의자를 몇 개 갖다 놨더군. 무릇 르페브르 공의 여식이라면 아무 의자에 앉으면 안 되잖아? 그쪽까지 데려다주지.”

나는 잠시 로티스 왕자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다들 쳐다보는데요. 왕자님.”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여긴 레이디들이 없는 곳입니다, 왕자님.”

“레이디들이 아니라…. 그래, 됐네. 그냥 다들 쳐다보게 두라지.”

“…….”

지금 드레스를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허락도 안 받고 마음대로 안아 든 남자의 뺨을 한 대 때려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군복을 입고 있으니까 그냥 짐처럼 덜렁 들려도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다친 날 부축하겠다는 아주 신사적인 이유도 있었고.

“왕자님.”

“르페브르 영애. 내가 영애를 부축하는 게 영애의 체면을 해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설마 아닐 거라고 믿네.”

그렇게 말하며 로티스 왕자가 나를 껴안고 있던 팔을 고쳤다. 갑자기 몸이 흔들린 나는 움찔 놀라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 이 정도면 거절할 만큼 했다.’

애초에 그렇게 실랑이를 벌일 일도 아니었다.

날 들고 가면 본인이 힘들지, 내가 힘든 것도 아니잖아?

그냥 가만히 몸을 맡기자, 왕자의 눈동자가 대놓고 즐거운 빛을 띠기 시작했다.

“사교계에 좀 자주 나오지 그랬어.”

내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어딜 데려가는 거지?”

나는 바로 움찔 놀랐다.

고개를 돌리자 슐로이츠가 걸어오고 있었다.

날은 어둡고, 대신 영지의 부관들이 이곳저곳에 갖다 놓은 임시 조명은 강렬하게 밝아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도 뚜렷하고 선명한 음영이 졌다.

“다쳤나? 르페브르 경.”

슐로이츠가 묻자, 왕자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전의 사건 때문에 영애가….”

“네게 묻지 않았어.”

“이런, 죄송합니다. 총사령관님.”

로티스 왕자의 미소에는 금 하나 가지 않았다. 슐로이츠가 저렇게 개 취급도 안 해 주니, 계면쩍어서라도 멋쩍은 미소를 지을 텐데.

저 미소가 가면이면 가면인 대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니면 아닌 대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일전의 일로 경미한 부상을 입었습니다만, 걷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이리 와.”

난 바로 로티스 왕자를 밀어냈다.

와중에 로티스 왕자는 키가 커서 생각처럼 그의 품에서 훌쩍 내려올 순 없었다.

설상가상 허겁지겁 내려오느라, 삐었던 발목으로 엉겁결에 착지하는 바람에 무리가 순간 심하게 왔다. 나도 모르게 절뚝거릴 수밖에 없었다.

슐로이츠가 한숨을 내쉬면 굉장히 부끄러울 것 같았는데, 다행히 그는 별말은 하지 않았다.

“로라 레닌 준사관. 업어라.”

“예! 총사령관님!”

쩌렁쩌렁 외친 로라가 바람같이 달려와 나를 업었다. 슐로이츠가 냉담한 얼굴로 로티스 왕자에게 말했다.

“군부 소속에 멋대로 손 뻗지 마라.”

로티스 왕자가 웃으면서 가볍게 묵례했다.

“실례했습니다. 군법이 엄격한 걸 알면서도 걱정이 과해 지나치게 굴었군요.”

1왕자는 왕족이라는 귀한 신분이면서, 처세술은 참 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능구렁이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눈가에 있는 눈물점 때문에 요요한 이미지가 묻어 나와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그럼.”

로티스 왕자가 사교계 명사다운 능숙하고 우아한 방법으로 물러가고, 우리 쪽에 몰려 있던 시선도 당연히 흩어졌다.

‘그러고 보니… 엔리코르는 뭐 하는 거지?’

내가 난처한 걸 보면 당연히 찾아올 줄 알았는데. 하나 있는 혈육이 그다지 쓸모가 있질 않잖아?

아니면 다른 데라도 간 걸까? 로라에게 업힌 채로 주변을 둘러보던 난 금세 엔리코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엔리코르가 날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팔짱을 끼고, 아주 재미있는 걸 봤다는 표정으로.

‘왜 저렇게 보지?’

의아했다. 엔리코르와 눈이 마주친 것도 잠시.

“르페브르 경.”

슐로이츠가 날 불러 바로 시선을 제자리로 돌렸다.

“내일 오전에 군부령으로 귀환할 예정이니, 식솔들과 회포를 풀려면 오늘 풀어.”

“알겠습니다, 프로키온 경.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게 될 줄이야. 엔리코르와 발록 경을 오랜만에 본 거라 좀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감상에 젖어 있는 사이 슐로이츠가 지금 꺼내면 안 되는 이름을 꺼냈다.

“아그네스는 어디 갔지?”

‘헉.’

“아그네스 경에게 하달할 명령이 있으신가요? 제가 대리로 해도 된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경이 왜.”

“그….”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아그네스 경에게 테이블 밑에서 잠시 눈을 붙이라고 했거든요.”

“테이블 밑?”

“…네.”

“어느 테이블?”

“저쪽 구석에….”

내가 가리킨 한산한 테이블을 본 슐로이츠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그네스가 저 밑에서 자고 있다고?”

“…네, 프로키온 경.”

“공주님이 내 부관들에게 참 별의별 방법을 알려 주고 다니는군.”

“조금 있다가 깨워 주겠다고 했습니다.”

슐로이츠의 눈동자에 어리는 희미한 황당함에 나는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내 아그네스가 반 죽어 있을 테이블에서 시선을 뗐다. 대신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정원을 둘러보았다.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가 갑자기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움직여 떠나 버리는 긴 다리. 로라가 눈치껏 바로 슐로이츠를 따라갔다.

아까 전부터 나를 흘끔흘끔 보고 있었을 게 분명한 정원의 사람들은, 여전히 내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별로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로라에게 업힌 채, 내가 향한 곳은….

“붕대를 아예 감아 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럼주를 마시고 있던 군의관의 앞이었다. 슐로이츠가 뭘 찾는 건가 했더니 군의관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슐로이츠는 나와 로라를 군의관 앞에 던지듯 데려다 놓은 후 금세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그는 이 정원에서 독보적으로 시선을 독차지하는 남자였기에.

나를 여기까지 에스코트 비슷한 걸 해 주느라 대화를 받을 생각이 없던 슐로이츠가, 이젠 대화를 해 주겠다는 의미기도 했다.

로라가 나를 의자에 내려놓았고, 군의관은 늘 갖고 다니는 것 같은 회진 가방을 꺼냈다.

“조금 전만 해도 럼주를 마시고 있던 의사에게 내 치료를 맡겨도 될까?”

“물론입니다. 환부를 째고 안에 박힌 화살촉을 꺼내는 것도 아닌데, 붕대쯤이야 눈 감고도 감을 수 있지요.”

“그래…. 무섭게 말하네.”

군의관은 웃으면서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발목을 확인한 그는 부기를 빼 주는 고약을 발라 주고 붕대를 감아 주었다.

“사실 지휘관님 부상이 경미해서 이런 치료는 좀 과하긴 한데… 저렇게 소동이 났으니 과하게 치료하는 게 남들 시선에도 좋겠죠.”

“소동이랄 것까지야….”

“여기 있는 놈들 9할 이상이 그쪽만 보고 있었습니다. 삼십 년 만에 사교계에 참석한 것 같아 아주 그립고 색다른 기분이더군요.”

“사교계는 지금 이 정원보다 더 격식이 있잖아.”

“그리고 지금 이 정원보다 더 날것이지요. 다음에 총사령관님이 지휘관님이 사교 파티에 참석하시면 한번 따라가 봐야겠습니다.”

“난 그렇다 치고 프로키온 경은 왜?”

“일전에 들었습니다만, 총사령관님이 데뷔연에서 지휘관님하고만 춤을 추고 돌아왔다 하시더군요. 저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이야기에 가슴이 뛰는 편입니다.”

이유가 있기야 하지.

군의관이 생각하는 그런 낭만적인 이유는 아니고, 그보다는 혈흔이 낭자할지도 모르는 이유가….

얼마 있지 않아 고약 특유의 시원한 진통 효과가 피부로 스몄다. 은근히 화끈거리던 발목이 조금씩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군의관이 약을 발랐으니 술은 먹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해서, 차가운 주스를 막 받아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림자가 졌다.

“아가씨.”

“발록 경?”

“치료가 끝났으면 아가씨를 모셔 가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발록 경이 발목을 보더니 나를 업었다. 오늘따라 수송되는 화물이 된 기분이었다.

“어디 가?”

“군부에서 너무 아가씨를 독점한다고…. 어떤 도련님께서 자꾸 성이 나 계십니다.”

“아니, 내가 지금은 군부 소속인데 무슨 말이야. 어디 있는데?”

“르페브르의 기사들과 함께 계십니다.”

‘내 참. 아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있더니.’

“로라.”

“예, 블란데아 지휘관님!”

나는 로라에게 여기서 파티를 즐기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발록 경에게 업혀 갔다.

쇠퇴한 종교의 아름다운 흔적들만 남아 있는 넓은 정원.

구색만 갖춰 급히 연 다소 엉망진창인 정찬 파티에는, 참석한 이들의 신분들만 하나같이 대단했다.

그리고 아주 명확하게 소속들이 나뉘어 있었고.

현재 이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정확히 3개로 나눌 수 있었다. 군부, 왕실, 르페브르.

그래서인지 보통의 파티와는 다르게 각기의 세력에 속하는 이들끼리 암묵적인 구획을 만든 채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슐로이츠와 로티스 1왕자, 엔리코르는 본인들이 이 정찬의 주역임을 알아서인지 적당히 중앙에 머물러 주었지만….

‘이젠 할 대화가 다 끝난 모양… 이 아닌 것 같은데.’

하나도 안 끝난 것 같은데?

슐로이츠나 로티스 1왕자는 여전히 네펠레 영지의 부관들에게 둘러싸여, 처음처럼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얼추 사교계 연회장을 보는 듯했다.

거기에 딱 엔리코르 르페브르만 빠져 있으면 말이 안 되지.

낯익은 르페브르의 기사들에게 눈인사하는 나를 일찍이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엔리코르는 시선이 마주치자 반색했다.

“엔리.”

하지만 난 그를 보자마자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처신을 이렇게 하면 어떡해. 별것도 아닌 걸로 기분 나쁘다고 사교 활동도 안 하고 여기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아이처럼 굴지 마.”

“금방 다시 갈 거야.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서 잠깐 여기 머무는 거지.”

“물어볼 거라니?”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엔리코르는, 내게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총사령관 말이야.”

“응?”

“너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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