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고 있나요-(17) (61/190)

왕족을 접견하기 위한 마땅한 태도로, 엔리코르는 마차 앞으로 걸어갔다.

르페브르의 앞에 설 수 있는 귀족은 더 이상 없었기에 그는 가장 앞에 섰다.

“르페브르를 여기서 보게 되다니…. 내가 운이 좋군.”

“숲의 모든 물기가 왕실에게 깃들길 바랍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로티스 라쥬누크 왕자님.”

“안녕하신가, 엔리코르 르페브르 공자.”

라자크 왕실의 1왕자이자 가장 유력한 왕태자 후보인 로티스 라쥬누크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특히 눈빛이 졸린 듯 나른했다. 꿈과 잠의 여신을 모시는 요정으로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금빛 눈동자.

“왕실 산하인 네펠레 영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몹시 유감으로 생각하네.”

“예, 뭐.”

왕실의 이름을 걸고 사과를 하고 있음에도 엔리코르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약간의 공손함도, 약간의 겸손도 발견할 수 없으나 조금도 무례하진 않은 기가 막히게 균형 잡힌 태도.

발록 경만이 뒤에서 역시 르페브르의 차기 가주답게 잘 자랐다고 흐뭇해했다.

“이렇게 만났는데 어느 정도 합의를 보고 네펠로 영지로 들어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지?”

“왕실과 르페브르가 합의를 볼 게 없을 텐데요.”

“너무 날 세운 채로 말하지 말고. 국왕 전하의 친서이니 한 번 들어나 줘.”

“한 번 들어나 봅시다.”

“네펠레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니, 공식적으로 조사를 하게 되면 여러모로 왕국민들이 불안해하겠지. 더군다나 르페브르의 직계잖나? 부왕께서도 걱정이 많으시단 말이야.”

“비공식으로 조사를 진행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요약이 참 빠르군. 공자의 말이 맞아.”

“좋습니다.”

“수락도 빠르군.”

“대신에 르페브르에서 조사 전권을 가져가겠습니다. 네펠레 영지의 무제한 출입을 왕실에서 허락해 주십시오.”

“거래를 하자는 게 아니고 합의를 보자는 거였는데.”

“싫으시면 저 역시 아버지를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르페브르 공은 오지 않으셨잖아.”

“오시려는 걸 막았지요.”

“…그건 좀 등골이 서늘한데. 공자는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뭐가 어려우신 겁니까?”

“르페브르에서 조사 전권을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

“수사가 종결되면 왕실에 결과 일부를 공유하겠습니다.”

“일부면 어느 정도? 절반 이상 받아 볼 수 있을까?”

엔리코르가 절반은 얼어 죽을… 하는 표정을 지어서 로티스 라쥬누크는 하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눈꼬리가 요요하게 접히며 불야성 같은 색기가 흘렀지만, 왕자를 보는 엔리코르의 눈에는 아주 약간의 감흥도 없었다.

로티스 라쥬누크는 좀 더 생각을 해 보겠다며 말을 물렸고, 엔리코르는 기꺼이 생각해 보시라며 돌아섰다.

1왕자의 대답은 르페브르의 행렬이 역참을 떠나기 직전에 돌아왔다.

“조사 결과의 3할 이상, 특히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를 납치하려고 한 이들의 구체적인 정체를 공유해 준다는 조건하에 르페브르에서 내건 제안을 수락하겠네.”

***

“군부에서는 두 분이 합의하신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아그네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저 젊은 지휘관의 목소리는 무거운 추가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은 이제 동정심이 들 지경이었다.

누가 보아도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불쌍한 몰골이었다.

그나마 육체의 젊음과 건강으로 살인적인 피로감을 간신히 짓누르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생명력을 깎아 내 겨우 시야를 확보하고 있는 것 같은, 이 가여운 지휘관의 두 눈은 맛이 간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이 군부의 제1 지휘관 소속인 걸 왕실과 르페브르에서 잊으신 모양입니다.”

엔리코르의 표정에도 자연히 날이 서기 시작했다.

“지금 군부에서 르페브르의 직계에 대한 지분을 주장하는 건가?”

“총사령관님의 뜻이니 해석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뭐?”

“군부에서 조사권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겠습니다. 총사령관님이 배정하신 기사가 조사관으로 붙을 겁니다. 르페브르든 왕실이든 상관없이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으나, 군부가 이 사건에서 배제되는 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듣던 왕자가 흥미롭다는 듯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왜, 블란데아 영애가 얼마나 아름답게 자랐길래 이렇게 싸고 도셔.”

동시에 아그네스와 엔리코르의 싸늘한 시선이 로티스 라쥬누크로 쏟아졌다.

하나는 맛이 간 눈빛이고 하나는 이대로 왕자를 들쳐 업고 가 절벽에서 떨어뜨릴지 말지 재 보는 눈빛이다.

“…….”

“…….”

자신을 아주 가감 없이 쓰레기로 만드는 듯한 눈빛에 왕자는 금세 두 손을 들었다.

“분위기가 험악해 농담을 해 본 거지. 사과하겠네. 그나저나, 총사령관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아그네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군 기밀입니다. 1왕자님.”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고. 알겠네. 물어본 게 죄지. 조용히 있으면 되잖아.”

엔리코르는 팔짱을 낀 채 턱을 천천히 기울였다. 아까 엔리코르는 이 네펠레 영지에 들어서며, 저 아그네스라는 지휘관에게 ‘총사령관님이 블란데아 경을 잘 지키고 있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오파츠 때문인지 총사령관은 블란데아에게 제법 호의적으로 굴었다. 나쁜 뜻은 아닐 것 같았고.

그리고 총사령관이 정말로 블란데아의 현 소속을 가지고 협의를 엎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지금 말씨름을 하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얼마 후, 엔리코르와 로티스 라쥬누크 왕자는 차례로 아그네스가 내민 서류에 서명을 했다.

***

“엔리!”

나는 벌컥 문을 열고 뛰어갔다. 엔리코르가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머리가 무척 짧아진 게 신기했다. 내 기억 속의 엔리코르는 언제나 머리카락을 날개뼈를 덮을 만큼 기르고, 한 갈래로 단정히 묶고 다녔는데.

손가락 반 마디 정도의 길이만 남은 머리카락을 보고 있는데, 엔리코르가 입을 열었다.

“블란아.”

“응?”

“집에 가자. 퇴단해.”

“또 그 소리야? 놔.”

나를 붙잡고 있는 엔리코르를 걷어 찬 나는 바닥 위에 발을 디디고 섰다.

“진심이야. 너무 위험하잖아. 어떻게 군부 한가운데서 르페브르의 직계가 납치를 당할 수가 있어.”

“납치를 당한 게 아니라 납치 미수인 거야. 난 내게 배정된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구출됐다고.”

“발록 경, 얘 말투 왜 이러지?”

“기사단 신입들이 흔히 쓰는 말투군요. 벌써 옮으신 모양입니다.”

발록 경의 대답을 들은 엔리코르가 “하….”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얘를 진짜 어떡하지?”

“뭘 어떡해. 그리고 엔리. 난 이제 권력 없이 살 수 없는 몸이 되었어.”

“아. 그래. 헥토르한테 들었어. 군부령에서 인사받고 다니는 걸 그렇게 좋아한다며.”

“응.”

“넌 르페브르의 직계라서, 사교계에서도 모든 이가 네게 인사를 해야 해. 알잖아?”

“알지. 하지만 사교계에선, 영애와 공자들이 내게 벌벌 떨면서 경례는 안 하잖아.”

“…….”

“나 보고 겁을 먹는 모습이 좋은 건데.”

엔리코르가 경악한 얼굴로 발록 경을 돌아보았다.

“발록 경, 얘 체력 훈련만 시키고 인성 훈련은 시키지 않았어?”

“아가씨 인성은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십니다, 엔리코르 도련님.”

“그렇다는데?”

“아주 르페브르 전체가 내 동생을 오냐오냐 키웠지.”

“응. 엔리가 제일.”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나는 웃음을 흘렸다. 엔리코르와 내가 인사를 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던 발록 경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훈련은 빼먹지 않고 하셨습니까?”

“응. 아, 그런데 발록 경. 가호를 내려야 하는 임무 때문에, 탈진할 만큼 달리면 안 된대서 어쩔 수 없이 훈련 강도를 조정했어.”

“어쩔 수 없이요?”

“내 뜻이 아니지만 어떡해. 나는 군부 소속인걸.”

“군부 소속?”

그 말에 갑자기 엔리코르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와 너무 닮은 얼굴이라 그런지, 웃기게도 내가 화를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 그래 봤자 군부에 1년만 있는 거야.”

“알아. 누가 평생 있겠다고 그랬어?”

“하…. 다들 네가 1년이 아니라 평생 머무르는 줄 착각하는 것 같던데.”

“착각이지. 나는 1년 후에 영지로 돌아가 평생 칩거할 거야.”

“…칩거? 얜 진짜 왜 이렇게 극단적이지?”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엔리코르는 무언가에 단단히 무척 심기가 상한 표정이었다.

왜 저러는지는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아까 전, 죽어가는 아그네스의 영혼을 얼마쯤 나눠 업고 온 것 같은 기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제8 지휘관의 보좌관들이었다.

직속상관인 아그네스가 과로로 죽어가니, 덩달아 죽어가는 그들은 비척비척 좀비처럼 걸어 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