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방금 충분히 알려 줬잖아. 내가 경을 훌륭한 미끼로 썼다고. 명색이 대귀족 레이디께서 내 말을 못 알아먹었을 리도 없고.”
“…….”
“그런데도 그 대답이 다인가?”
슐로이츠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미끼로 쓰였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상황 파악이 끝났으면 내게 화라도 내야지, 블란데아 르페브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경이 죽을 뻔했잖아.”
“…….”
그의 말에 내가 어깨를 움찔 떤 건, 슐로이츠가 나를 ‘르페브르 경’이라고 부르지 않고 ‘블란데아 르페브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슐로이츠는 종종 빈정거리듯 나를 르페브르의 공주님, 하고 불렀으니 아마 큰 의미 없이 툭 던진 것이겠지만….
어쩐지 기분이 편치 않았다.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했고, 선득한 것 같기도 했고…. 슐로이츠를 볼 때마다 드는 감정들은 대체로 결이 비슷했으나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로웠다.
내가 그에게 가진 감정들이 자아내는 결론은 언제나 비슷했다.
“반드시 화를 내라고… 명령하시면 내겠습니다만…. 그다지 화가 나지 않습니다, 프로키온 경.”
“화가 나지 않는다고.”
“네.”
“왜?”
“크게 다친 곳도 없고… 결국 프로키온 경이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슐로이츠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경은 내게 참 관대하게 굴어주는군.”
“…….”
슐로이츠는 절대 모를 것이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나는 매번 가슴이 들썩거린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화를 내야 하나?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곧 그만두었다. 슐로이츠에게 이미 화가 나지 않는다고 말해 놓고, 이중인격처럼 다시 화를 내는 것도 우스운 꼴이었고.
무엇보다 정말로 나는 그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역시 어릴 때 그에게 너무 큰 빚을 져 버린 탓이겠지. 나는 어서 1년이 지나 이 군부를 떠나 영지 깊숙한 곳에 칩거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번에도 내게 바라는 것도 없나?”
“없… 있습니다.”
“말해 봐.”
“로라 레닌 경을… 계속 제 준사관으로 쓰고 싶어요.”
슐로이츠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어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무거나 쥐어짜는군.”
“진심이에요.”
“좋을 대로 해. 그렇게 아그네스에게 전해 놔 주지.”
“감사합니다, 프로키온 경.”
“그게 다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정말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미 제1 지휘관이니 특진을 시켜달라고 할 수도 없고, 물론 그게 과한 요구라는 것도 알았고.
괴수를 좀 양도해 달라고 하는 건 너무 품위가 없어 보이고…. 이미 스무 마리라는 엄청난 숫자를 양도받지 않았나.
문득 생각이 괴수에서 멈췄다.
슐로이츠는 ‘겸사겸사’라고 말했지만, 어쨌든 그레이와 제레미의 정체를 털어내 보기 위해, 나를 이 네펠레 영지에까지 데려왔으니까.
그럼 괴수도 돌려줘야 맞는 거겠지?
“프로키온 경. 괴수를… 돌려 드릴까요?”
슐로이츠가 순간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지어서 나는 바로 공손해졌다.
“농담이었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괴수들은 내가 가지고, 할 수 있다면 평생 내 이름 밑에 기록으로 새겨 두고. 대신 의무 토벌을 열심히 나가 괴수를 잡으면 로라에게 좀 나눠 줘야지. 한 번 신경이 쓰이니 은근히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슐로이츠의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다는 걸 알고, 금세 비굴하게 눈썹을 늘어뜨렸지만.
‘왜 화가 났지?’
“르페브르 경.”
“…네.”
“경은 내가 주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끔찍한 모양이야.”
“네? 무슨….”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아니에요. 프로키온 경. 괴수는 제가 도움을 받은 처지에… 스무 마리나 받는 게 과분한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과분한 것 같아서?”
슐로이츠가 헛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가.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구는 거지?”
“…그.”
“르페브르가 내게 아부할 입장도 아닌데.”
나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프로키온 경은… 군부의 총사령관이시잖아요.”
“상관에게 몹시 순종적인 성격인가 봐.”
“…보통 그러지 않나요?”
“난 그러지 않았거든.”
‘그렇겠지….’
나는 조금 웃었다. 그는 타고나기를 대단한 검파자였다. 총사령관이 되기 전부터, 그는 이미 군부의 타오르는 별이었다.
그런 슐로이츠가 어릴 때부터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 특히 상관들에게 굳이 존경심을 느낄 이유가 있었을까?
겸손도 과하면 독이라고 하질 않던가? 무엇보다 슐로이츠는 태생적으로 별로 겸손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도 무심하고 오만한 최강자로 그려지곤 했다.
슐로이츠는 다시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댔다. 서류를 집어 드는 손길을 보자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정말 어지간히 바쁘구나, 하는 생각, 다른 하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는 건가? 하는 생각.
하지만 감정에 솔직해 보자면, 사실 나는 슐로이츠가 옆에 있는 게 좋긴 했다.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던 그레이의 번들거리던 눈이며, 기괴한 짐승처럼 환하게 웃던 입이 아직도 잊히질 않았다.
나는 충격을 잘 받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충격에 약했다. 아무리 훈련을 해도 마음까지는 잘 단련되지 않았다.
어릴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혼자 있으면 많이 무서울 것 같다는 분명한 직감이 들었다. 그런데 슐로이츠가 옆에 있으니 이곳이 아주 안전한 요새처럼 느껴졌다.
요새처럼 느껴지기는 한데….
문제는 잠도 오지 않았다.
서류를 확인하는 슐로이츠를 도울까 싶었지만, 그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조심조심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당긴 후.
슐로이츠를 살며시 훔쳐보았다. 침대 근처에 앉은 그는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확인하느라 고개 한 번 들지 않았지만….
이걸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꿈을 껴안은 듯한 포근한 느낌. 누우면 자연스레 그의 모습에 시선이 가는 각도여서 애써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내가 잠깐 잠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시선을 움직이니, 슐로이츠가 기사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기사는 나를 등지고 있었고, 슐로이츠는 나를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의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했다.
잠시간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작은 목소리로 보고를 하던 기사가 문득 이상함을 감지한 듯, 내 쪽을 돌아보려고 했다.
“나가 봐.”
기사를 물린 슐로이츠는, 문이 닫히고도 한동안 내게 별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다만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했다. 특유의 냉담한 열기를, 그런 양가적인 온도를 품고 있는 슐로이츠의 눈이 이내 나를 바라본다.
“네펠레 영지 관리자 전부 감옥에 처넣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
“아, 네. 프로키온 경.”
“싹 다 고문 중이니, 경이 원하면 직접 고문해도 좋아. 임시로 허가해 주지.”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고문을 따로 배운 적이 없어요.”
“그래. 보통의 귀족들은 배우질 않지. 하지만 그런 이유를 대며 거절하지도 않고. 보통은 참관이라도 한다고 하지 않나.”
“…….”
“경은 피가 많이 무서운 모양이야.”
나는 헛기침을 했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난 남들의 피가 무서웠다. 사실 귀족답지 못한 반응이었다. 이 세계에선 괴수들 때문인지, 아니면 부유한 자들 특유의 가학적인 성향 때문인지.
피를 보는 광경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막장으로 치닫는 치정 싸움의 끝에서 자주 일어났다. 연적으로 엮인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결투를 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사냥도 흔한 여흥이었고. 매년 왕실에서 주최하는 거대한 사냥 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 덕에 피를 보는 걸 무서워하는 귀족은 아주 드물었다.
물론 내게 전문적인 고문을 강요하진 않겠지만, 그냥…. 나는 아주 약한 고문도 무서웠기에 에둘러 거절한 것이었다.
괴수들이야 괜찮지만, 사람의 피는 무서운 걸 어쩌겠는가. 슐로이츠가 나를 토벌에서 빼 버리지 않기만 하면 되니까. 설마 이런 걸로 나를 빼 버리진 않겠지?
다행히, 슐로이츠는 별 말 없이 다른 얘길 꺼냈다.
“한 시간 후에 왕실에서 조사단이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어. 아. 르페브르에서도 비슷한 시각에 도착한다더군.”
나는 눈을 깜빡였다.
“르페브르요?”
***
엔리코르는 발록 경에게 뒷덜미가 잡혀 끌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질질 끌려 내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왜! 가도 하나만 더 달리면 네펠레 영지에 도착하잖아!”
“그 말씀을 계속 돌려막기 하시면서, 지금 여기까지 쭉 달려오셨습니다. 도련님의 체력에야 문제가 없겠지만 말들이 다 쓰러질 겁니다.”
“우리 블란이가 지금 괴한에게 납치당할 뻔했다는데 쉬었다 가자고? 발록 경 이렇게 매정한 사람이었나? 사랑스러운 블란이가 공포에 떨면서 울고 있을 걸 생각하면 난 지금 잠도 안 오는데!”
“아가씨는 공포에 떨면서 울 분이 절대로 아니고, 무엇보다 총사령관이 직접 보호 중이라고 편지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솔직히, 도련님. 그 총사령관이 보호하고 있는데도 아가씨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그건 왕국이 반파가 난다는 소리입니다.”
“그럼 더더욱 블란이를 구출하러 가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국 엔리코르는 툴툴대며 말의 고삐를 쥔 손을 놓았다.
“블란이한테 만에 하나 또 문제가 생긴다면 영지전이야. 오파츠고 뭐고….”
“물론입니다.”
르페브르의 행렬이 멈춰 선 곳은 네펠레 영지와 이어지는 마지막 가도에 마련된 역참이었다.
라자크 왕국은 영지와 영지를 잇는 길을 몹시 신경 써서 닦아 놓았다. 덕분에 각 가도에는 말들을 쉬게 할 수 있는 역참이 15km마다, 또는 30km마다 마련되어 있었다. 왕실 직속의 시설이었다.
다른 영지와 달리, 네펠레 영지는 허가받은 이들만 입장이 가능했다. 주로 신분이 확실한 공직자나 귀족들이 대부분의 방문자이다 보니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르페브르의 문양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르페브르 공자!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뵙게 되다니요! 가문의 영광입니다.”
특히 역참의 행정관들은 눈이 돌아가 있었다. 우르르 나와 정신없이 엔리코르를 환대했다.
“왜 저 마차가 지금 딱 도착하지?”
엔리코르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중얼거렸다. 행정관들도 또한 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막 역참으로 들어서는 새로운 행렬. 가장 앞에 있는 마차의 문양을 모를 수가 없었다.
라자크 왕실의 마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