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눈 뜨게 내버려둬도 되나?”
“이미 뜨고 계신 걸 다시 감게 할 수도 없잖습니까?”
“말하는 것하고는.”
두 명이 주고받는 대화였는데, 둘 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일단 두 번째는 네펠레 영지로 함께 따라온 군의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더욱 잘 아는 목소리였다.
슐로이츠.
그런데 왜 그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는 기분일까? 나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들어 억지로 눈가를 비볐다. 그제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제대로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슐로이츠의 손이었다.
“…경.”
몹시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나마도 쉽지 않았다.
“마취제가 너무 독해서 그렇습니다, 제1 지휘관님. 조금 더 쉬시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겁니다.”
군의관이 옆에서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고개만 조금 움직여 주변을 살펴보았다.
“총사령관님의 방입니다. 아, 원래 머물던 그 관사는 아니고 반대편 건물로 옮겼습니다. 거기서 환자가 편안히 쉴 수가 있겠습니까?”
고개 끄덕일 힘도 없었다. 죽은 듯 가만히 있던 나는 천천히 물었다.
“…그레이는요?”
“죽었어.”
“그럼… 제레미는요?”
“그 녀석도 죽었고.”
“…….”
슐로이츠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오해할까 봐 말해 주는데, 공주님. 내가 죽인 게 아니야. 하나는 혀를 깨물어 자살했고, 하나는 창밖으로 뛰어내려 버리던데.”
“…….”
그레이의 악마 같은 얼굴이 떠오르자 몸이 자연히 떨렸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슐로이츠가 군의관에게 툭 던졌다.
“이봐, 지금 떠는데.”
“그런 일을 겪으셨으니 떠시는 게 당연하죠. 제1 지휘관님, 춥지는 않으십니까?”
“…춥지는 않아.”
애초에 추울 수가 없지 않나. 오히려 슐로이츠의 체온 때문에….
“…….”
정신이 없던 나는 뒤늦게 내가 슐로이츠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팔이 내 등을 감싸 안고 있었다.
슐로이츠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는 기분이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품 안에 안겨 축 처져 있었다. 몸이 다시 굳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지?
슐로이츠의 탄탄한 팔이 조금 꿈틀거렸다. 감각이 돌아오자, 그런 섬세하고 미묘한 느낌들이 옷감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져 한층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슐로이츠가 군의관에게 물었다.
“불편한 모양인데. 아예 눕혀도 되나?”
“예. 괜찮습니다.”
군의관의 대답을 들은 슐로이츠가 나를 눕히더니, 베개 위에 천천히 머리를 올렸다. 군의관이 이불을 목까지 덮어 주었다.
그게 다였다. 이대로 나갈 줄 알았는데…. 군의관은 옆에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었고, 슐로이츠는 내 곁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흘끔 그의 주변을 살피니 제법 많은 서류가 대령해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경…. 바쁘시지 않나요?”
“바쁘지, 그럼. 르페브르의 공주님이 이렇게 되셨는데.”
“그럼 가셔도….”
“경을 맡겨 두고 가도 안심할 만한 사람이 없어. 군부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내 책임도 없다곤 못 하고.”
“아…. 그렇군요.”
“돌아가면 라파엘을 부관으로 붙여 줄 테니까 데리고 다녀. 직급이 약간 꼬이겠군.”
슐로이츠가 군의관에게 턱짓했다.
“가서 아그네스에게 전해.”
“뭐라고 전해 놓을까요?”
“기지로 귀환하는 즉시 편제 회의를 소집하겠다고.”
“예. 지금 제8 지휘관에게 전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군의관이 즉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아그네스….
지금 엄청 바쁘겠지?
내가 쓰러지기 전에도 아주 바빴는데, 군부도 아니고 네펠레 영지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까지 생겼으니.
비단 아그네스뿐만 아니라 바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그네스 경은… 괜찮나요?”
“누구든 경보단 괜찮지 않겠나.”
“…네.”
묻고 싶은 건 많은데, 슐로이츠가 계속 서류를 넘겨 보고 있어서 더 묻진 못했다.
그냥 좀 자고 일어날까 했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데, 슐로이츠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왜 잠을 안 자. 어디 아픈가?”
“아프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러고 있어.”
“…누가 절 납치하려고 한 건가요?”
“조사하고 있어.”
“로라 레닌 준사관은요?”
“그녀는 무혐의로 판명이 날 것 같더군. 그 정신 나간 괴물들과 엮인 게 없어.”
무혐의라는 말에 내 귀가 쫑긋했다. 그래. 준사관들 셋 중에 둘이 그렇게 이상한 놈이었는데, 다른 하나까지 이상한 놈이면… 확률이 너무하잖아?
그리고 원작 속의 그 애꾸눈 준사관 엑스트라는, 로라가 아니라 그레이였던 게 거의 확실했고. 슐로이츠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지금쯤이면 고문도 끝났겠군.”
“고문이요?”
순간 내가 귀를 의심했을 때였다. 슐로이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달린 가느다란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후,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무언가’를 짊어지고 들어왔다. 그 무언가가 홱 바닥에 내던져진다.
“로라?”
나는 몹시 당황했다. 똑바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숨도 안 쉬는 것 같은 로라는 그야말로 피떡이었다. 엉망진창이었다. 아니, 무혐의라고 해 놓고 고문을 저렇게까지 심하게 한단 말이야?
물론 여기는 군부지만….
군부가 맞기는 하다만….
또 슬슬 무섭기 시작했다. 슐로이츠의 손속이 너무나 잔혹하고 무자비해서 미래의 내가 곱게 죽지 못할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면서 이불을 꼭 그러쥐는데, 슐로이츠가 나를 보더니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고문의 강도가 다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 그래.”
“…….”
“그렇게 보이는군.”
아주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은 슐로이츠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발끝으로 로라의 무릎을 툭 무성의하게 쳤다.
“연기 그만하고 일어나지 그래. 경의 상관이 나를 아주 쓰레기로 보고 있잖아.”
“…….”
“적출당하고 싶나?”
“…시정하겠습니다!”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로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생명줄처럼 쥐고 있던 내가 움찔 놀랄 정도였다.
“블란데아 지휘관님…!”
“…….”
나는 로라의 얼굴에 가득한 심각한 핏자국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나 심하게 고문을 받다니.
내 떨리는 눈을 본 로라의 표정도 호곡하듯 흐려졌다.
일전의 병아리 얘기도 그렇고, 내가 명령을 하달하면 애처럼 즐거워하며 수행하는 것도 그렇고…. 그녀는 장대한 기골과는 달리 감성이 아주 풍부한 성격 같았다. 그리고 나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느 정도 미안한 것도 있었다. 나는 로라를 철썩같이 원작의 그 애꾸눈 준사관이라고 오해해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았으니까.
기분이 복잡한 게 당연한 거겠지?
“로라 레닌 준사관.”
“예, 총사령관님!”
“르페브르 경에게 보고해라.”
슐로이츠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하자, 로라가 바로 벌떡 일어났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 그레이 준사관에게 당하는 바람에 얼굴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
“어젯밤 10시 경, 그레이 준사관의 얼굴이 이상하게 보여 몰래 만져 보았다가 이상한 점을 감지했습니다. 바로 상부에 보고하려 하였으나, 그레이 준사관이 저를 행동 불능 상태로 빠뜨리는 게 먼저였습니다!”
“…그래?”
“예! 능력이 부족해 충분한 대응을 하지 못한 점, 반성하고 정진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나는….”
“예!”
“그 얼굴의 상처가…. 고문의 흔적인 줄 알았어.”
“예?”
로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극구 부인하더니 갑자기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으려고 했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말렸고.
듣자 하니 심문을 하며 비교적 가벼운 고문이 들어갔나 보다. 하루 종일 무릎을 꿇린 채 있는 거라든지, 물을 주지 않는 것이라든지.
그런데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있었다.
“아깐 왜 기절한 척했지?”
로라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심문을 다시 받을까 싶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척했습니다.”
“…….”
“시정하겠습니다!”
내 뺨이 불그스름해졌다. 어쨌든 로라는 내 준사관이니, 창피함도 내 몫이었다.
로라가 다시 끌려 나가고, 나는 눈을 빙그르 굴렸다.
슐로이츠와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오해해서 죄송하다는 말은 할 필요 없겠지. 이건 그 정도로 잘못하진 않았으니까…. 맞지?
“프로키온 경.”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로라가 피투성이가 된 걸 발견하고, 제 숙소에 오신 건가요?”
“경의 준사관이 저런 모습인 건 그 이후에 알았지.”
“그럼…. 제 숙소엔 어떻게 바로 맞춰서 오셨어요?”
슐로이츠는 평소처럼 바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 잘못 물은 걸까? 은근한 긴장감이 올가미처럼 내 목을 조이던 그때, 슐로이츠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거든.”
“…언제부터요?”
“군부령에서부터니 일주일은 됐겠군.”
“…….”
슐로이츠가 피곤한지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라파엘이 경에게 목숨을 빚져서 말이야. 아주 열성적인 신도가 따로 없지. 경의 준사관들이 인적이 아귀가 맞지 않다고 보고하더군.”
그 감옥에서… 그런 걸 확인했다고? 불도 그렇게 밝지 않고, 또 하루의 절반 이상을 꺼 놓는 걸로 아는데.
“프로키온 경.”
나는 이마를 미약하게 찌푸렸다.
“혹시 네펠레 영지에… 일부러 저와 제 준사관들을 데려오신 건가요?”
“겸사겸사.”
“…….”
“군부령에선 좀처럼 일을 칠 것 같지 않은 기색이라.”
“그렇군요. 그럼… 어제 절 방 앞까지 데려다주신 건….”
“그레이 준사관이 내 앞에서 쓰러졌잖나.”
“…네.”
“그때 이상하더군. 그녀의 한쪽 눈이 한 박자 늦게 돌아가서.”
“그런 게…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보이시나요?”
“보여.”
“그러시군요….”
어쩐지 손에 힘이 풀렸다. 나는 내내 쥐고 있던 이불을 놓았다. 얼마나 힘껏 쥐고 있었는지, 손자국이 그대로 났던 이불이 스르르 무릎 위로 내려앉는다.
잠시 침대 매트리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든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슐로이츠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경이야말로. 내게 더 할 말이 있지 않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슐로이츠가 이마를 슬쩍 찌푸렸다.
“그 말이 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