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고 있나요-(12) (56/190)

“아니면….”

“……?”

“블란데아 르페브르 지휘관님께서 저희 네펠레 영지에 임시로 남아 계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라고요?”

아그네스가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총책임자가 헛기침을 했다.

“그렇지 않은가? 총사령관님께선 바쁘시니 곧 기지로 돌아가셔야 할 거고, 매드로스 공의 직인은 보조 직인이니…. 사실 제1 지휘관의 직인으로 대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힘을 좀 쓴다면 말이지요.”

아그네스의 어금니가 진짜로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즈금 즈으 흠끄 근르 츨프으 드흐 는으흐그 읏으즎습느끄.”

“뭐라고?”

“지금, 저와, 함께, 관례, 철폐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잖습니까.”

총책임자는 아그네스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시종일관 내 쪽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르페브르 지휘관님? 어떠십니까? 신성 가마도 함께 구경하시고, 저희와 함께 성검도 보시면서 한두 달 머물러 주시는 건? 네펠레 영지에 르페브르의 직계께서 머물러 주신다면 큰 영광일 겁니다.”

“내가 남아 주면 아그네스 경의 요청을 수행해 주겠다고?”

“물론입니다! 르페브르의 직계께서 머물러 주신다는데 당연히 힘을 써야지요.”

“지금 내 거취를 공무 처리를 위한 조건으로 이용하려는 건가?”

“예? 아….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런 뜻은 아닙니다.”

역시 높은 사람이라 그런지 흔들리지 않는군. 아니면 매드로스 공에게 받아 처먹은 게 많든지….

하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발록 경은 내게 군부에서 혹시 모를 말싸움에 휘말린다면 쉽게 이기는 법도 알려 줬다.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확대 해석한 후 정신 못 차리게 물고 늘어지다가 마지막에 지위로 깔아뭉개면 모든 게 해결이 될 거라고 했다.

군부와 사교계는 법칙이 달리 적용되는 곳이라고 덧붙여 주면서….

‘하긴 사교계에서 그런 식으로 싸움을 벌이면 진짜 매장당할 거야.’

하지만 여긴 사교계가 아니라 군부죠?

나는 르페브르 영애가 아닌 르페브르 지휘관이죠?

“제1 지휘관의 거취를 멋대로 정하려고 하다니, 그대가 총사령관인가? 하극상이라 판단해도 되겠나?”

“르페브르 지휘관님? 네펠레 영지의 모든 신관과 관리인들은 성검을 제작하지만 왕실에 일차적으로 속해 있습니다. 하극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말 잘했네. 그대 가문이 엘비드였지? 왕실 휘하로 따지면 한참 낮은 가문인 엘비드가, 감히 르페브르의 직계인 내게 거취를 가지고 불공정한 요구를 강요해? 네펠레 영지에서 근무하다 보면 레쉬트 아즈는 무시해도 된다던가?”

레쉬트 아즈란 직역하자면 ‘높은 것을 향한 낮은 이의 경배’라는 뜻이었다.

왕국 사교계에선 보통 가문 간의 서열을 지켜야 할 때라고 주의를 줄 때 쓰곤 했다. 혹은 본인이 속한 가문보다 높은 가문의 사람을 칭송할 때에 쓰거나.

귀족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교양을 의심당한 총책임자는, 아주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이마에 힘줄까지 슬며시 돋아나고 있었다. 그가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르페브르 지휘관님. 군부와 네펠레 영지의 일을 이리 사사로이 가문의 일로 끌어가신단 말씀은….”

잘 걸렸다.

나는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책임자가 헉하고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방금 전에는 왕실 소속이라며? 이랬다저랬다 앞뒤 말 하나도 안 맞는 정신 이상자가 네펠레 영지의 총책임자라니 안 되겠어. 왕국의 안전을 위해 즉시 국왕 전하께 르페브르의 이름으로 편지를 올리겠네. 편지지 대령해.”

국왕이라는 말에 총책임자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르페브르 지휘관님!”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언성 높이면 군법으로 처리하고 가문의 이름으로 책임을 물을 줄 알아.”

총책임자가 깜짝 놀라 입을 서둘러 다물었다. 동시에, 나는 바로 앞에 대령한 만년필과 종이를 보았다.

‘로라….’

와중에 진짜 착실하게 챙겨 올 줄이야…. 보통 이럴 때는 다 같이 눈치 챙겨서 죽은 듯 가만히 있지 않나?

저기 있는 그레이나 제레미처럼.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여기에 독을 묻히진 않았겠지.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한 나는 만년필을 들어 올렸다.

막 몸을 숙이고 글자를 적기 시작하던 그때.

“지휘관님…!”

결국 총책임자가 푸르죽죽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제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모양입니다!”

***

슐로이츠는 뺨에 묻은 차가운 빗물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방금 전 품속의 오파츠가 깨졌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를 이 북쪽 숲에 데려오지 않았으니, 오파츠가 한번 깨지면 더 쓸 수가 없었다. 데려왔어도 슐로이츠가 원하는 만큼 오파츠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걸핏하면 제 건강을 걱정하는 르페브르의 공주님이, 하루에 오파츠를 세 개 이상은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을 했으니 말이다.

덕분에 슐로이츠의 모든 일정이 조금 덜 숨 가쁘게 조정에 들어갔다. 그는 이런 상황이 기가 찼다.

결국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제1 지휘관이고, 자신은 총사령관이니 가호를 강요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강요를 한다고 해서 순순히 가호를 내려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주제에, 단호한 부분이 있었다.

르페브르의 직계라는 대단한 신분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본래 성격일 수도 있고.

그녀가 싫다고 버티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떨면서 버티는 꼴을 보고 싶은 건 또 아니었다.

슐로이츠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보좌 부관으로 아예 데려와 앉혀야겠어.”

잠을 안 재우고 종일 시달리게끔 해 놔야 그 배부른 걱정을 그만두겠지.

“초, 총사령관님!”

함께 나와 대기하던, 네펠레 영지의 검파자들이 벌벌 떨면서 우산을 들고 뛰어왔다.

그들은 입도 눈도 손도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었다.

하늘에서는 폭우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중규모의 토벌전에서나 볼 법한, 괴수와 성검으로 인한 대단한 빗줄기였다.

오파츠가 깨질 때, 슐로이츠에게도 충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못 버티고 쓰러질 정도는 또 아니었다.

날카로운 쇠못이 목젖에서부터 가슴까지를 죽 긁어내리는 정도의 통증.

적응이 되고 나니 겨우 그 정도였다.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정도.

슐로이츠는 수건을 건네받고 걸음을 옮겼다.

한 박자 늦게 검파자들이 슐로이츠를 따라 서둘러 움직였다.

***

“정신 이상자. 정신 이상자.”

아그네스가 웃으면서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밖에서 그 말을 그렇게 계속 읊으면 본인이 정신 이상자 같아 보이지 않을까?

…라고 말하려 했는데, 아그네스가 너무 기쁘게 웃고 있어서 타박할 마음도 사그라졌다. 진짜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블란데아 경.”

“그래.”

여자 숙소와 남자 숙소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군부 기지와는 달리, 이 네펠레 영지의 관사는 으레 귀족가의 저택이 그러하듯 별채들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아그네스가 내가 머무는 방 앞까지 날 배웅하는 희한한 경험도 했다.

‘방은 나쁘지 않네.’

군부 소속은 아니라고 총책임자가 눈을 뒤집고 외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물론 군부 기지에 있는 지휘관의 숙소도 깔끔하긴 했지만, 그래도 화려한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여긴 귀족 손님이 머물 만한 방이긴 했다. 널찍한 방에는 욕실과 화장실이 딸려 있었고, 침대도 제법 좋은 것이었다.

상단이 반 돔형으로 만들어진 벽감에는 목이 긴 우아한 유리 화병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조각 같은 다른 장식들은 일절 없었으나 하늘색, 분홍색, 하얀색의 다채로운 꽃들을 꽂아 넣은 게 제법 성의가 있어 보였다.

시답잖은 장식을 하는 것보단 좋은 품질의 화병에 꽃을 꽂아 넣는 게 좋지.

로라와 그레이가 내 방을 확인하고 정리하기 시작했고,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정확히 남쪽을 향해 나 있는 커다란 창문을 열자 오후의 나른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카시아의 향긋함을 품은 봄바람이었다.

나는 창틀에 상체를 기댄 채, 손등으로 뺨을 괬다.

정원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공터라고 불러야 할지. 잘 감이 오지 않는 넓은 드넓은 앞마당엔 아까 보았던 원기둥이 여전히 웅장하게 서 있었다.

이름이….

“저 기둥에 이름이 있었던가?”

로라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되물었다.

“드리스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아.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드리스의 반투명한 안쪽은 또 출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보았을 때보다 수면의 높이가 훨씬 올라가 있었다. 어디서 아주 많이 괴수를 처단한 모양이었다.

‘슐로이츠겠지?’

네펠레 영지는, 특히 이 관사를 끼고 있는 중심부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대장장이들도 보였고.

뺨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봄바람에 눈을 감았다가 뜨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인물.

슐로이츠였다.

천천히 감기던 눈이 반사적으로 훅 떠졌다. 뛰어나온 것 같은 총책임자와 휘하 관리자들에게 둘러싸여 걸어오는 슐로이츠는, 멀리서도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그를 보고 있자면 혹한에 솟아오른 커다란 빙벽이 태양을 그대로 삼켜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단순히 아름다운 얼굴 때문만이 아니라, 슐로이츠에겐 사람을 홀리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의 마음을 압도적으로 홀리긴 하겠지만 말이다.

평소에는 슐로이츠만 보면 눈을 내리까느라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는데.

위치적 이점을 이용해, 나는 열심히 슐로이츠를 뜯어보았다. 조금만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면 훨씬 좋겠지만, 이 정도도 과분하지.

입매가 조금씩 풀어지던 와중이었다. 나는 움찔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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