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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고 있나요-(11) (55/190)

2023-02-06

나는 들뜬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이 네펠레 영지를 신성 도시라고 불렀다고 했다. 하지만 신전의 지배력이 쇠퇴한 것도 벌써 200년 전의 일이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신전은 라자크 왕국은 물론, 대륙 전체에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괴수라는 정체불명의 끔찍한, 악몽 같은 존재가 있으니 신을 향한 믿음이 강한 것도 당연할 텐데.

하지만 200년 전에 대신전이 괴수들로 인해 멸망하고, 수많은 신관과 신도들이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죽은 참변 이후 신전은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신관들의 영향력이 아주 미미해졌다. 옛날에는 영지마다 신전이 서너 개씩 있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큰 영지가 아니면 신전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이 신성 도시였던 네펠레 영지 역시 왕실 소유 영토가 되었고, 신전이 쇠퇴한 만큼 왕실은 나날이 번창했다.

네펠레 영지의 땅 자체는 군소 영주령에 불과할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중앙에 밀집된 건물들이 전부 훌륭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영지의 정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원기둥이었다.

아름드리나무처럼 치솟아 성인 남성 열 명이 팔을 뻗어야 겨우 감쌀 수 있을 만큼 널찍한 크기였다. 그 반투명한 원기둥 안으로는 빛나는 액체가 출렁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이벤트성으로 크게 만든 비커에, 수은이 함유된 위험한 시약이 찰랑이는 것 같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저 액체가 바로, 성검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재료 중 하나인 ‘이코르’였다.

성검으로 괴수를 처단하면, 커다란 항아리 세 병 분량의 이코르가 저 원기둥에 채워진다고 했다.

위치도, 시간도, 다른 의식도 필요 없이 그저 성검으로 괴수를 처단하기만 하면 이곳으로 이코르라는 액체가 생성이 되었다.

라자크 왕실의 독점 기술이었다.

마침 또 어디선가 성검으로 괴수를 처리했는지, 원기둥 안의 이코르가 늘어나고 있었다.

‘직접 보니까 더 신기하네.’

왕실이 괴수를 잡으면 많은 돈을 주는 이유에는, 물론 말 그대로 위험한 괴물을 없애 주는 비용도 있었지만, 이 이코르 보급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군부야 왕실에게서 성검을 보급받지만, 다른 왕국들은 계약을 맺어 받아 가는 신세니까.

“아이고, 총사령관님!”

그때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총책임자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숙면을 취하다가 불 몽둥이로 엉덩이를 두드려 맞아 깨도 저것보단 덜 놀란 안색일 것 같았다.

“아이고, 아이고! 진짜로 이곳까지 오실 줄이야…! 한창 바쁘시지 않습니까!”

“와 달라며.”

“그, 그게….”

“각자 서류 몇 장에 서명만 하면 끝날 일을 이리저리 내빼지 않았나.”

“그….”

“내 얼굴을 그리 보고 싶어 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크흠….”

네펠레 영지의 책임자들은 슐로이츠의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서신으로 말씀드렸다시피 북쪽 숲에 있는 금사 기둥에 갑자기 괴수들의 흔적이 다량 나타나는 바람에….”

“그래. 안내해.”

“예?”

“안내하라고. 처리해 주려고 직접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나?”

“……?”

총책임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슐로이츠가 북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한 박자 늦게 휙휙 손짓을 했다. 빨리 따라가라고 성질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제야 관리자들을 비롯한 검파자들이 서둘러 슐로이츠를 따라갔다.

“혼자 괴수를 잡아 주시겠다고요?”

“다른 검파자 분들은 안 가십니까?”

“진짜요?”

“그게 됩니까? 총사령관님이 만에 하나 참변을 입으시면 저희가 어떻게 책임집니까?”

“난들 알아? 군법 회의에 회부되고 단체로 자리 내놔야 하는 거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그래. 놀랍지? 나도 놀라워.’

오파츠를 사탕 깨물 듯 깨뜨려 버리는 슐로이츠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얼마나 강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몸에 충격이 가기는 할 테니, 나는 그에게 하루 세 개 이상은 당분간 쓰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해 둔 상태였다.

엔리코르도 말은 안 하지, 아마 오파츠 요청 속도에 좀 당황하고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블란데아 경.”

옆에서 아그네스가 소곤거렸다.

“저한테 한 시간만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총사령관님이 제게 개인적으로 명령하신 일이 있어서요.”

“그럴게. 나 할 일도 없어.”

슐로이츠는 나를 네펠레 영지의 토벌에 데려가지 않았다. 외부엔 아직 오파츠에 대해 보일 생각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나는, 슐로이츠에게 비공식적으로 가호를 내려 주는 일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아그네스와 함께 중앙 관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려하긴 엄청 화려하다.’

종교는 쇠퇴하였지만, 웅장했던 건축물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네펠레 영지의 관사들은 전부 몇백 년 전에는 번영의 끝을 달리던 신전을 재활용한 건물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하나 평범한 부분이 없었다.

우아하게 뻗은 기둥머리에는 신의 풍요를 상징하는 포도나무가 탐스럽게 조각되어 있었고, 몰딩에도 풍성하게 뻗친 커다란 나뭇잎들이 양각되어 있었다.

섬세한 반원 돔과 성화가 그려진 펜던티브(pendentive), 감실에는 오래된 신의 석상들이 장식처럼 보관했다. 짙은 색의 대리석을 깎아 만든 발록 조각상까지 본 나는 미소를 흘렸다.

발록 경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

슐로이츠가 그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여기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네펠레 영지는 왕실의 산하에 있지만,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다시 말해 총사령관의 영향력이 얼마든지 뻗칠 수 있는 곳이라는 소리였다.

선대 총사령관인 매드로스 공이 산증인이었다.

“성검은 기지 보관소에 최대한 많이 비축해 둘수록 좋은데, 이놈들이 온갖 핑계를 대며 제대로 보내지 않습니다.”

“어떤 핑계를 대는데?”

“일단은 아까 총사령관님이 가신 대로, 북쪽 숲 금사 기둥에 괴수들의 흔적이 나타나 위축되어 성검을 똑바로 제작할 수 없다… 가 첫 번째고요.”

“두 번째도 있나 봐?”

“예. 두 번째는 매드로스 공의 보조 직인을 요구한다는 겁니다.”

“세상에.”

난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슐로이츠한테 텃세를 부리는 거야?

목숨이 무섭지 않은가?

‘너무 어려서 얕보는 건가?’

아니면, 늙은 구렁이 같은 매드로스 공을 내가 너무 얕봤던 걸까?

매드로스 공이 슐로이츠에게 인수인계를 해 주는 과정에서도 몹시 꾸물거렸다고 얼핏 듣긴 했었다.

네펠레 영지 관리자들의 명복을 빌어 주고 있는데, 아그네스가 말을 이었다.

“세 번째도 있습니다.”

“또 있어?”

“예. 사실 네펠레 영지에서 성검을 검수 후 군부 기지로 보낼 때, 제2 지휘관의 직인이 필요하게끔 매드로스 공이 몇 년 전에 자체 법률을 수정해 놓았거든요.”

“지금 제2 지휘관이 없잖아?”

“예. 이변이 없다면 디오스 경이 제2 지휘관으로 임관되실 것 같긴 한데, 블란데아 경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은 갇혀 있잖습니까?”

“그렇지.”

라파엘과 나란히 갇혀 있지.

“공무를 수행할 수가 없는 상태인 데다가, 총사령관님은 네펠레 영지에 제2 지휘관을 계속 보내는 걸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셔서요. 매드로스 공의 기존 법규는 올해 하반기 안엔 공식적으로 철폐될 겁니다.”

줄줄이 설명해 준 아그네스가 문득 눈에 힘을 주었다. 우리를 흘끔흘끔 훔쳐보던 관리자들이 흠칫 당황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그네스는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총사령관님의 살인적인 일정표는 아실 거고, 여기서 예상보다 오래 지체했다가는, 정말… 아무것도 평화롭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으응….”

그건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나는 슐로이츠가 이렇게 흉포하게 군부를 제압한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러니 저는 총사령관님이 토벌을 끝내고 오실 때까지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해결해 놓는 것이 일차 목표입니다.”

다시 살펴보니 아그네스는 아주 결연한 얼굴이었다.

“부디 제 뒤에 계셔 주십시오. 제가 직급이 낮아 이놈들이 제 말은 들은 척도 안 할 게 뻔해서요.”

하기야 아그네스는 제8 지휘관이지.

모든 일을 능숙하게 착착 해내는 라파엘이나, 같은 결로 우직하게 일을 처리하는 디오스와 달리 아그네스는 신참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제법 긴장한 기색이었다. 꽉 쥔 두 주먹에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턱을 갸웃했다.

‘서 있기만 하면 안 되지 않나?’

***

“총사령관님이 교체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매드로스 공의 보조 직인을 요구한단 말입니까?”

“아니, 그게 관례가 그렇다니까?”

“관례지 법이 아니잖습니까?”

“제8 지휘관이 관례에 법을 운운한단 말이야? 관례 몰라? 주제를 좀 알아!”

주제를 알아서 지금 네놈들 멱살을 안 잡고 있잖아!

딱 그런 표정으로 아그네스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지금 아그네스가 그나마 마차 이동 중에 잠을 좀 자서 그나마 폭력 사태를 일으키진 않는 것 같았다.

만약 계속해서 밤을 꼴딱 새운 아그네스였다면? 관리자의 멱살은 잡히고도 남았을 게 분명했다.

이런 자세한 속사정까진 알 리 없는 네펠레 영지의 관리자들도 움찔 놀란 것 같긴 했다.

“크흠, 미안하지만, 자네! 우리도 힘이 없다고! 매드로스 공에게 가서 허락을 받아 와!”

“이미 퇴단하신 분께 가서 허락을 받아 오라고요? 슐로이츠 프로키온 총사령관님이 뻔히 계시는데요?”

“그럼…! 총사령관님이 토벌에서 돌아오시면 함께 논의를… 하는 게 좋겠군? 우리도 필요한 서류가 너무 많다고.”

논의를 할 시간이 없다고!

아그네스가 저러다가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돌아 버릴 것 같다는 표정이 안쓰러웠다. 내가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내내, 나처럼 말없이 앉아 대화를 관망하고 있던 총책임자가 나를 흘긋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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