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고 있나요-(10) (54/190)

“아, 미안.”

“아닙니다!”

로라는 항상 버럭버럭 소리를 치는 것 같지만, 지금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땐 나름대로 크기를 낮추는 배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목소리 자체에만 힘이 잔뜩 들어가 있을 뿐 귀는 아프지 않았다.

“경은 집에 아픈 혈육이 있어?”

“고아입니다!”

“미안.”

“아닙니다!”

가정사는 캐내는 게 아니지.

어쨌든 혹시 아픈 가족이 있어서, 엔리코르에게 독을 먹여 약초를 빼내려고 했다는 가설은 틀린 게 되는군.

“미남은 좋아해?”

“미남을 싫어하는 여자가 있습니까?”

“없지.”

내가 뜬금없이 화제를 돌렸는데도 로라는 아주 성실히 대답했다.

“금발은 좋아하고?”

“좋아합니다!”

금발을 좋아하고 미남을 좋아해…. 그럼 일단 엔리코르이긴 한데. 나도 알고는 있다. 이런 몇 마디 말로, 엔리코르를 사랑했다고 추리하는 건 엄청난 비약이라는 사실을.

그냥 궁금했을 뿐이지.

‘아니면…. 어디에서 사주를 받았나?’

그런 거면, 내가 뭘 더 깊이 묻는 건 좋지 않을 터였다. 한담 정도로 보이는 게 좋을 터였다.

그사이 로라가 내 목에 두르고 있던 긴 수건을 빼냈다.

“다 됐습니다!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거울을 확인한 나는 빙긋 웃었다. 드디어 길이가 적당히 맞았다.

“고마워.”

***

로라 레닌은 신이 나서 의무실로 향했다.

블란데아가 그레이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의무 토벌도 따라갔지만, 개인적으로 명령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냥 뒤에서 경계하고 있으라는 포괄적인 명령이나 몇 번 받았지.

처음 보게 된 블란데아 르페브르 지휘관의 성검은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로라는 강한 사람을 좋아했다.

의무실은 넓었다. 로라는 그레이가 있는 병석으로 걸었다. 그런데 이미 그레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었고, 머리맡을 지키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다른 준사관이자, 유일하게 남자인 제레미였다.

물론 블란데아 르페브르에게 배정된 내내 제레미가 그레이를 챙겼지만….

지금도 저래도 되나?

남매도 아닌데 너무 붙어 있는 거 아닌가?

“제레미 경.”

“아, 로라 경.”

“블란데아 제1 지휘관님이 그레이 경의 건강 상태를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로라는 정석대로 그레이의 상태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둘이 너무 가까이 있는 것 아닙니까?”

“난… 그냥 그레이가 걱정이 돼서요.”

“군법에 어긋납니다. 제레미 경.”

“하지만 제1 지휘관님은 저희한테 신경을 별로 안 쓰시던데요.”

로라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블란데아는 온종일 바빴다. 의무 토벌을 진행 후 총사령관의 집무실로 보고하러 갔다.

사실 신경을 안 쓰는 것도 맞긴 했다.

로라는 조금 우울해졌다.

묵묵히 그레이의 진단서를 옮겨 적는데,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너무 슬퍼 말아요. 로라 경.”

“예?”

“지휘관님이 애초에 우리를 계속 준사관으로 쓰시진 않겠죠.”

“무슨 말입니까? 전 실력에 자신 있습니다.”

“지휘관님은 르페브르의 직계시잖아요.”

그 말 한마디면, 사실 모든 게 납득이 되긴 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왕도에서 바깥과 거의 교류가 없는 희귀종이었다. 만약에 슐로이츠 프로키온, 그러니까 이번 대 총사령관이 조금만 덜 냉정한 성격이기만 했어도 이 군부 기지에 저 두 사람과 연을 쌓고자 하는 거머리들이 바글바글했을 것이다.

대충 이런 얘기를 전해 준 제레미가 말했다.

“로라 경도 사실, 목적이 있어서 부관에 지원한 거잖아요.”

그것도 그랬다. 로라는 평민 출신 고아였지만 운 좋게 검파자의 재능을 각성한 이였다.

검파자가 아니더라도 힘이 좋은 데다 우락부락하고, 타고난 체질 덕분에 나무꾼을 해서라도 건물을 샀을 축복받은 몸이었다.

그래서 고아원을 나오면 막막해질 애들을 몇 데리고 나왔다. 사실상 월급의 절반을 그쪽에 쓰고 있었다.

근래는 한 명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하면서 거의 다 보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계급 높은 지휘관의 부관 격인 준사관은 돈을 많이 받는데, 분기마다 지급되는 보너스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약값이 너무 비싸서….

로라는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보며, 아까 잘라 주었던 머리카락을 생각했다.

그냥 생각이 났다.

실력엔 진짜 자신이 있는데.

없어진 한쪽 눈을 깜빡였다.

자신은 이제 기사고, 군법과 국법에 의해 귀족이 되긴 했다. 하지만 대대로 귀족이었던 자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군부라고 해서 신분에 따른 미묘한 차별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평민 출신 검파자에겐 벼락출세나 다름없었다. 평민 출신이 어떻게 귀족들에게 존대를 듣고 함께 어울릴 수 있겠는가?

한쪽 눈을 비록 잃었지만 살아남아 준사관이 되었고….

“우린 운이 좋았죠. 너무 슬퍼 말아요, 로라 경.”

제레미가 위로하는 어조로 말했다.

부관 자리를 두고, 준사관들 사이에 경쟁이 유독 치열했다. 원래는 로라를 포함한 다른 두 명의 준사관이 뽑혔으나, 그 둘이 식중독으로 실려 갔다.

로라만이 멀쩡해 의심을 받았으나 그녀는 원래 웬만큼 상한 걸 먹어도 멀쩡히 소화를 시키는 강철 위장을 가진 걸 확인을 받고서야 용의선상에서 풀려났다.

그때 급하게 제레미와 그레이가 충원되었고 다들 부러워했다.

“지휘관님은 저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게 틀림없어요. 아무래도, 그레이도 나도 아주 한미한 가문 출신이고, 로라 경은 말할 것도 없죠.”

“아까도 말했지만, 저 실력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실력 좋고 신분 넘치는 이들이 르페브르의 곁엔 바글바글하다고요. 로라 경.”

“그건 제가 어쩔 수 없겠네요….”

그제야 제레미는 로라가 알아들었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배반당했다. 로라가 우울해하거나 침울해할 줄 알았는데, 정작 보고용 메모를 다 작성한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기 때문이다.

“근데 지휘관님이 그러시는 거랑 군법도 어기고 제레미 경이 그레이 경과 너무 친밀히 있는 건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

‘나흘간 일정을 빼놓으라더니.’

커다란 마차에서 막 내리자마자, 제레미가 다가와 보고했다.

“네펠레 영지가 코앞입니다. 블란데아 지휘관님.”

“얼마나 걸린다지?”

“한 시간 안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네펠레 영지는 라자크 왕국, 아니 대륙을 통틀어 유일하게 성검을 제작하고 있는 도시였다.

나는 제레미에게서 수통을 건네받으며, 슬쩍 앞을 보았다.

슐로이츠가 아그네스에게서 무언가를 보고받고 있었다.

라파엘이 근신을 받기 전엔, 그가 죽어 가는 얼굴이더니 이젠 아그네스가 점차 죽어 가는 몰골이었다.

저러다가 죽지 않을까 싶었다. 라파엘이 나오기 전까진 살아야 할 텐데.

수통에 담긴 물은 차가웠다. 속이 진정되며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속력이 왜 이렇게 빨라….’

건장한 군마가 끌고 가는 덕에, 마차는 정말 쉬지 않고 달렸다.

내가 멀미가 나지 않는 체질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속이 세 번은 뒤집혔을 게 분명했다.

“휴식 시간이 끝나기 전에 가볍게 산책이라도 해야겠어.”

“예, 지휘관님.”

내가 걸음을 옮기자, 제레미가 따라왔다.

며칠 전 내린 명령 때문에, 제레미는 더 이상 그레이에게 붙어 있지 못했다.

대신 로라가 그레이와 한 조가 되었고.

‘솔직히 너무 심했잖아.’

요 며칠, 제레미는 너무 그레이에게 붙어 있었다.

‘쟤네는 정말, 어리숙한 건지…. 아님 날 어리숙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희한했다. 아무리 그래도 준사관들인데 이렇게까지 해이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검파자가 처음 군부로 입단하면 생도로 불린다. 그다음이 부사관이었는데, 의무 기간인 1년을 채우면 자동으로 부사관으로 승진한다.

부사관의 계급도 두 가지로 나뉘기는 하는데, 이건 당장 중요한 건 아니고.

준사관은 부사관의 위 단계였다. 준사관들은 지휘관들의 수행 비서의 역할을 한다. 토벌전에서도 졸졸 따라다닌단 소리였다. 실력이 되지 않으면 준사관이 될 수 없었다.

실력만 키우고, 눈치는 키우지 못한 걸까? 뭐, 그럴 수도 있었다. 어차피 다 교체할 거니까.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름대로 선심도 쓰려고 노력 중이었다.

‘사냥한 괴수를 한 마리씩 양도해 주면 되겠지.’

슐로이츠에게서 받은 건 말고, 내가 처리한 괴수들이 있으니까.

의무 토벌을 일주일 가까이 계속 나갔던 이유도, 그들에게 양도를 해 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는 묘하게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그레이와 로라의 모습은, 나를 모시는 부관들이 아니라….

‘하녀와 아가씨?’

그레이의 태도가 은근히 고압적이었다. 로라는 조용히 수발을 들고 있었고.

물론 그레이는 귀족 출신이었고, 로라는 평민 출신이었다. 준사관들의 기본적인 인적 사항은 이미 찾아보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부는 계급이 전부였다. 르페브르의 직계인 내가 슐로이츠에게 빌빌 기는 게 당연한 곳.

“로라 경은 고아원 출신입니다. 지휘관님.”

때마침 제레미가 입을 열었다. 묘하게 들쩍지근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내가 그녀들을 보고 있던 걸 안 모양이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냐고 되묻는 대신, 나는 제레미를 한 번 쳐다보았다.

“내가 모르고 있을 것 같나?”

제레미가 마지못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기분이 조금 더 나빠졌다. 제레미는 내내 그레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 나름대로 변명을 해 주려는 듯 했다. 물론 그 애틋한 분위기가 더 기가 막혔고.

문득 슐로이츠가 작중에서 입버릇처럼 말하던 대사가 생각났다.

“가지가지 하는군.”

왜 슐로이츠가 매번 그리 말했는지 진심으로 공감이 갔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

대륙을 통틀어 유일무이하게 성검을 제작해 낼 수 있는 땅 네펠레 영지.

‘외전에서 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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