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야….
아그네스는 일전에 내게서 가호를 받아 갔던 인물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게서 가호를 받아 간 사람들은 좀 친절해지는 기분이었다.
‘가호라는 게 포근한 느낌이긴 했지.’
굳이 비유를 해 보자면… 한 시간 동안 받을 아로마 테라피를 압축해서 30초 동안 받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그냥 르페브르라는 가문을 보고 비위를 맞춰 주는 걸 수도 있고?
확실히는 모르겠다. 표본이 많지는 않으니까. 새로운 검파자들이 들어오게 되면 알게 되려나?
“절차상 오늘까지만 고생 부탁드립니다. 블란데아 경.”
오늘 슐로이츠는 집무실에 들르지 않았다.
정말 바쁘긴 한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파엘도 감옥에 박혀 있고 디오스도 그렇고.
그래도 아그네스가 왔으니 좀 바쁜 게 덜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이름으로 온 편지들을 받아 왔다.
식솔들이 보내온 안부 편지는 따로 챙기고, 엔리코르의 이름이 붙어 있는 편지들부터 확인했다.
엔리코르에게서 오는 편지는 늘 비슷했다.
하나는 내 안부를 묻는 편지. 이건 어릴 적부터, 엔리코르가 아카데미에 갔을 때부터 유구하게 써서 보내던 편지의 연장선이었다.
다른 하나는 오파츠에 관한 얘기들. 이건 편지가 아니라 두꺼운 서류 뭉치였다.
이 서류 뭉치들은 보통 슐로이츠한테 바로 갖다 주면 됐다. 나는 시계를 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끼워 놓고 와야겠네.’
시간은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나는 목에 걸고 있던 황동 열쇠를 꺼내 문고리에 끼웠다.
달칵, 열쇠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내일이면 이 열쇠도 반납해야 했다.
슐로이츠의 집무실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내가 언제 또 이렇게 슐로이츠의 군부 집무실에 마음대로 막 들어와 볼 수 있겠냐고.
‘오파츠 때문에 여전히 자주는 오겠지만.’
가져온 편지를 슐로이츠의 책상에 올려 둔 나는, 혹시 몰라 창문의 잠금장치들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울 때도 물론 확인하고 나갔던 창문들은 잘 잠겨 있었다.
사령관 관저 바깥으로 나온 나는 곧장 숙소로 가려다가, 마음을 바꿔 반대편으로 걸었다.
어두운 길을 싫어하는 건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에 한 번, 수동으로 기름을 채워 빛을 밝히는 수정 가로등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 빼곡히 심어진 백목련 나무들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수정등 불빛을 받은 흰 꽃잎들은 몹시도 우아했다. 조금 있으면 아카시아와 라일락도 함께 꽃을 피울 것 같았다.
‘설마 라일락까지 하얀 걸로 심진 않았겠지?’
내가 한가하긴 했나 보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굳었다.
“르페브르 경.”
슐로이츠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프로키온 경.”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어.”
“제 오라버니가 오파츠에 관련된 서류를 보내와서요. 프로키온 경에게 전해 드리려고 잠깐 들렀습니다. 집무실에 뒀는데 가져올까요?”
“급한 건가?”
“급한 건 아니에요.”
“급한 게 아니면 됐어. 어디 뒀지?”
“책상에 올려 두었습니다.”
슐로이츠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가 버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평소보다 배는 느린 걸음걸이.
딱 내가 걷는 속도였다. 같이 걷자는 뜻인가?
나는 일단 슐로이츠를 따라 서둘러 발을 옮겼다.
그는 한동안 별말이 없었다. 그래도 따뜻한 바람이 부는 소리와 꽃잎들이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르페브르 경.”
얼마나 걸었을까? 슐로이츠가 입을 열었다.
“아그네스에게 얘기 들었나?”
“아, 네. 들었습니다. 인수인계는 내일 점심때까지 완료해 놓겠습니다.”
“오파츠 덕분에 피차 편했어. 르페브르에게 도움을 생각보다 많이 받았군.”
이것부터는 또 엔리코르의 공이라, 겸손하게 손을 내젓는 대신 나는 수긍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바라는 거 없나?”
“바라는 거요?”
수당 얘기라면 군부에서 나오니…. 보너스 얘기를 하는 건 아닐 거고.
개인적으로 보상을 해 주겠다는 거겠지?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에게 바라는 거야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것들은 내가 평생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것들이고….
없다고 하면 너무 건방져 보이려나?
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프로키온 경이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슐로이츠의 눈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왕도 귀족의 화법인가?”
“네?”
“더 기다리고 있으면 되냐고.”
나는 조금 웃을 뻔했다. 아니, 약간 웃은 것 같았다.
“아뇨, 프로키온 경. 다른 함의는 없습니다.”
“그런 게 전부라고?”
“네. 전부예요.”
슐로이츠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특유의 단정한 듯 건조한 눈빛.
“하긴 르페브르니까.”
그는 내 말을 그다지 재미있게 들은 눈치는 아니었다. 상관은 없었다. 나도 농담이 아니었으니까.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말해. 그런 것 말고 제대로 된 걸로.”
“알겠습니다, 프로키온 경.”
“들어가 봐. 늦었군.”
어느새 내 숙소 앞이었다. 슐로이츠는 가로등을 확인하는 듯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데려다준 건가?
멀어지는 슐로이츠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가 없었던 나는 오래지 않아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도 매번, 어쩌면 평생.
그의 뒷모습을 볼 때엔 이런 기분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면 계절이 영원히 봄이라면 좋을 텐데. 봄날 특유의 들뜨는 마음이 꽃나무의 향기처럼 가슴 사이사이를 채우기라도 하니까.
***
다음 날, 아그네스 경에게 그간의 인수인계를 끝낸 나는, 그의 얼굴이 서서히 질리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힘내라.’
나도 죽는 줄 알았다고.
와중에 제8 지휘관으로 승진은 했으니까. 사실상 거의 뭐 보좌 전담을 위한 날치기 승진에 가까웠다.
사실 아그네스는 원작에서 흘러가듯 가끔씩 나오던 인물이긴 했다. 작중에선 제8 지휘관이 아니라, 생도들의 사감 역으로 가끔 나오던 조연이었지. 걔가 얘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맞을 것 같다는 막연한 감이 들었다.
‘지휘관 됐다고 죽진 않겠지?’
나는 속으로 아그네스의 무병장수를 빌다가 물었다.
“음식은 왜 챙기는 거야?”
“그…. 라파엘 경과 디오스 경이 한 달간 근신형에 처해졌다고 해서요. 먹는 게 부실할 겁니다.”
“많이 먹긴 했지, 라파엘 경.”
“그렇죠?”
아그네스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가 같이 가 보지 않겠느냐고 권해서, 준비를 한 후 아그네스를 따라가 보았다.
‘어둡네.’
작중에서도 남주와 남조들이 종종 감옥에 갇히기는 했는데, 그가 있는 곳은 생도들이 수감되는 감옥이었다.
여긴 간부급들에게만 자리를 내어 주는 감옥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생각했던 것만큼 열악하지는 않았다.
마침 배급 시간이었는지, 병사가 식사를 들고 들어갔다.
오트밀 죽 한 그릇에 레몬 조각을 띄운 물 한 잔. 확실히….
잘 먹는 라파엘도 그렇고, 마찬가지로 건장한 디오스도 그렇고. 둘에게는 아주 부실한 식단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한 그릇만 더 줘! 딱 한 그릇만…!”
그마저도 눈 깜빡할 사이에 다 먹었는지 매달리는 라파엘의 소리가 안에서부터 들렸다.
아그네스의 귀가 불그스름해졌다.
“아, 정말 창피하네요…. 괜히 모셔 왔습니다.”
“아냐. 배고플 만도 하지.”
라파엘은 엄청 잘 먹으니까.
함께 식사를 할 때도, 내가 주스를 마실 때 그는 팬케이크를 마시곤 했다.
설탕 시럽을 뿌린 폭신한 팬케이크를 착착 썰어, 포크로 한 번에 세 개씩 집어 입 안으로 넣는 게 어찌나 깔끔하던지 신기하다는 생각도 했었고.
“블란데아 르페브르 지휘관님! 아그네스 필켄 지휘관님!”
우리는 간단한 절차를 끝마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블란데아 경!”
쇠창살을 붙잡고 벌떡 일어나는 라파엘은 생각보다 몰골이 깨끗했다. 어둡긴 해도 더러워 보이지 않는 이 감옥처럼, 위생은 챙기게 해 주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근신용이니까. 진짜 잘못을 해서 처넣어지는 지하 감옥은 말도 못 하게 끔찍한 곳이라고 들었다.
마르크 헌트도 그곳에 갇혔다가 사형됐고.
“일은 좀 괜찮으십니까?! 총사령관님이 너무 빡세게 일을 시키시죠?”
“괜찮아. 그리고 아그네스 경한테 인수인계 다 했어.”
“전 블란데아 경이 중간에 열받아서 퇴단한다고 하실까 봐 너무 걱정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리고 1년간은 도망칠 수도 없잖아.”
“그렇죠. 1년간은.”
라파엘이 흑흑 울면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가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그는 제 손과 나를 번갈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다가 블란데아 경의 손을 잡으니 확실히 느껴지네요. 르페브르의 이능이란 참 신기합니다.”
“근데 경. 난 더러운 것과 닿는 건 싫어….”
“저 더럽지 않습니다! 계속 씻었어요! 손도 씻었고요! 방금 식사도 했잖습니까!”
라파엘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그사이 디오스에게 다녀온 듯한 아그네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만하시고 이거나 빨리 드십시오.”
“……!”
아그네스는 미리 간수에게 받아 온 쟁반 위로, 챙겨 온 음식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쟁반 위에 있는 음식들은 다양했다. 우유. 땅콩버터를 바른 사과, 기름진 냄새를 풍기는 훈연 닭고기. 하얗고 커다란 빵도 있었다.
특히나 라임과 레몬 그리고 푸릇푸릇한 사철쑥을 잔뜩 뿌린 샐러드까지 한 대접으로 싸 온 걸 보니, 아그네스가 정말 신경을 썼다는 게 느껴졌다.
면회를 하고 사식을 넣어 줄 수 있는 건 같은 계급인 지휘관들뿐인데, 그마저도 한 명이 음식을 들일 수 있는 무게가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