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고 있나요-(6) (50/190)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중에서도 여주인공과 남조들이 몇 번이나 얘기했던 것처럼, 여긴 ‘폐허의 유적’이란 이름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

울창한 산록 지대와 군락지, 들판이 섞여 있으니….

‘솔직히 자연적 관광지 아냐?’

어둡고 꺼림칙한 분위기만 아니라면, 그러니까 괴수들만 없으면 사람들이 이주해 살아도 좋을 것 같은데.

수목 자원과 석재 자원이 아주 많으니까 개발에도 용이하지 않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슐로이츠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푹 젖어 있는 한쪽 어깨가 보였다. 내가 아까 우산을 펴서 가려 줬는데도 반대편 어깨까진 신경을 못 썼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슐로이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프로키온 경. 수건을 드릴까요?”

“기지로 귀환해서 갈아입는 게 낫겠어.”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 슐로이츠는 하늘과 금사 기둥을 번갈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두 마리가 더 나올 것 같으니 마저 처리하고 돌아가지.”

“네, 프로키온 경.”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사 기둥의 흔적을 보고 괴수의 이동 흔적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건 순전히 경험치가 필요한 일이었다.

같은 금사 기둥을 봐도, 나는 그냥 괴수가 왔다 갔구나, 하는 게 전부일 텐데.

슐로이츠는 묶어 놓은 말 쪽으로 걸어가 짐에서 무언가를 찾아 꺼냈다. 나는 슐로이츠가 불을 피우려는 걸 보고 서둘러 다가갔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난 불을 피울 줄 몰랐다. 정확히는 이런 야외 지대에서 사용하는 점화 마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저건 어떻게 쓰는 거지?’

유적으로 갈 때 필요한 물품은 내가 챙기는 게 아니라 이 일을 전담하는 기사들이 따로 있어서, 저 마도구를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근데 불 피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발록 경, 왜 나한테 이런 거는 안 알려 줬어?

쓸 줄도 모르는 마도구로 내가 불을 피워 놓겠다고 나서야 하나. 아니면 가만히 있어야 하나?

고민은 짧았다. 왜냐면 그사이에 슐로이츠가 불을 다 피웠기 때문이었다.

“앉아.”

슐로이츠가 턱짓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바로 앉았다.

맞은편에 앉을 줄 알았던 슐로이츠가 내 옆에 털썩 앉아서 좀, 아니 많이 긴장했지만.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을 땐 잠깐 기도가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슐로이츠가 내 손에 쥐여 준 건 점화 마도구였다.

“양손으로 끝부분을 잡고 반대로 당겨.”

얼떨결에 따라 하자 길고 뾰족하게 뻗은 주둥이에서 불길이 홱 튀어나왔다. 슐로이츠는 그걸로 됐다는 듯, 다시 내 손에서 점화 마도구를 가져가 버렸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쓰는 법을 모르는 눈치던데.”

“죄송합니다. 미처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누구한테 배워야 하는지는 아나?”

“제 직속….”

직속 상관? 나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선임이 없었다. 특수한 명예직인 제1 지휘관이니까 당연했다.

서열로 따지자면, 내 직속 상관이 슐로이츠 아니던가? 내 위에 슐로이츠 말고 아무도 없으니까.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프로키온 경이요?”

“그래. 내가 가르쳐 준 거지.”

슐로이츠가 마도구의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이런 잡일이야 경의 준사관들이 할 일이지만 말이야. 그래도 배워 놔서 나쁠 건 없잖나.”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 뒤가 빳빳했다. 왜냐하면 슐로이츠가 계속 내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갑자기 일어나서 반대편으로 가 버리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그런 행위도 상대가 나를 의식할 때나 할 수 있는 거였다.

슐로이츠는 성검의 날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대로 돌부처가 되어 버릴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도 너무 가만히 굳어 있기만 할 필요는 없겠지? 사실 나만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민망하기도 했다.

나는 불을 보는 척하면서 슐로이츠를 살짝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자세히 관찰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들킬 것 같았다. 왜 몰래 보냐고 물으면 할 말도 없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용기가 사그라져, 다시 불이나 보았다. 와중에도 모닥불은 따뜻했다.

이곳엔 나와 슐로이츠밖에 없었다.

처음 서너 번은 나 때문인지 기사들을 데리고 나왔는데, 슐로이츠는 그마저도 성가신 눈치였다. 지켜야 할 사람이 많으면 번거롭겠지.

‘애초에 날 유적으로 데리고 나온 것도 순전히 오파츠 때문이니까.’

나는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깨진 오파츠들을 떠올렸다.

오늘 슐로이츠가 깨뜨린 것들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오파츠가 처음 깨질 때 피까지 토했는데.

물론, 내가 처음 겪어 보는 충격에 적응도 안 되어서 더 심하게 반응을 보인 것 같긴 했지만….

슐로이츠도 오파츠가 깨지면 충격을 받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처음엔 분명히 피곤해했었잖아.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빨리 적응한다고?’

지금도 오파츠를 세 개나 깨뜨린 슐로이츠는 지나치게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뒤에서 그를 따라다녔던 내가 더 지쳐 보였고.

할 수만 있다면 슐로이츠의 체력을 구체적인 수치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999쯤 되지 않을까?

나는 두 손을 뻗어 모닥불의 열기를 쬈다.

유적으로 나온 두 시간 전부터, 슐로이츠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평소보다 더 난폭하게 괴수들을 해치웠다.

덕분에 비도 제법 내렸다. 피 냄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우산을 미리 갖고 있긴 했지만 그건 나 쓰라고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슐로이츠가 괴수들을 다 처리하고 나서야 그에게 후다닥 달려가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리고 부서진 오파츠를 건네받았고.

나는 그가 오파츠를 깰 때마다 새 오파츠를 걸어 주고, 다시 가호를 내리느라 슐로이츠를 졸졸 따라다니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나 약간 쓸모없는 것 같은데.’

슐로이츠에 비하자면 월등히 뽀송뽀송한 모습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슐로이츠가 비를 맞는데 나 혼자 안 맞는 것도 그래서 일부러 우산을 안 펴고 기다렸다.

앞에서 총사령관이 비를 맞는데 지휘관 혼자 뒤에서 비를 피하는 것도 이상했으니까. 일단,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괴수를 다 처리하고 온 슐로이츠가 내 몰골을 보더니 냉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내 앞에서 멍청한 꼴 보이지 말지 그래, 르페브르 경.”

그다음부터는 우산을 내내 쓰고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프로키온 경. 저 말고도 준사관들을 데려오는 게 낫지 않으신가요?”

“왜. 심심하나?”

“심심하진 않습니다만…. 제가 토벌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염려가 되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준사관들보다 경의 성검 실력이 월등히 좋아.”

“저 오늘 한 마리도 처리하지 못했는데요.”

“나에 비하면 나쁘니까.”

“…….”

슐로이츠는 검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혀를 찼다.

“준사관들까지 지키는 것보다 경 하나를 지키는 게 쉬워. 혼자 있는 게 무서우면 말에 타고 있든지.”

“무섭진 않아요.”

“그럼 문제가 없잖아.”

“그….”

그런가?

“애초에 경의 임무가 가호이질 않나. 그것만 똑바로 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와중에도 슐로이츠와 대화를 제법 많이 나누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이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슐로이츠가 말한 그대로 두 마리의 괴수가 나타났고, 나는 말들의 고삐를 쥔 채 숨을 죽였다.

오파츠가 깨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괴수들도 숨이 끊어졌다.

이젠 좀 더 효율적으로 슐로이츠에게 우산을 씌워 줄 수 있었다. 젖은 옷이 빨리 마르면 좋겠는데.

성검을 검집에 밀어 넣은 그가 한숨을 가볍게 흘렸다.

슐로이츠는 이번에야말로 약간이지만 피곤한 기색이었다. 나는 쓰러져 며칠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걸, 네 개나 연속으로 깨고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파츠가 몇 개 남았지?”

“두 개가 남았습니다.”

나는 슐로이츠에게 새 오파츠를 내밀었고, 그는 익숙하게 손가락 끝을 검으로 갈라 피를 묻혔다.

슐로이츠는 품 안에 오파츠를 밀어 넣었다.

“돌아가야겠군.”

동시에 그가 내게 허리를 굽혔다. 입술 바로 앞에서 멈춘 슐로이츠의 얼굴.

오늘만 해도 벌써 다섯 번째로 내리는 가호인데, 왜 심장이 조금도 적응하질 못하고 자꾸 쿵 떨어지는 기분인지.

***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블란데아 경.”

아그네스라는 이름의 부관은 예상했던 것보다 이틀이나 일찍 귀환했다.

“내일부터 제가 바로 총사령관님의 보좌 업무를 가져갈 겁니다.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늦어진 점 사과드립니다.”

“괜찮아. 사과를 할 일은 아니잖아.”

“하지만 너무 고생하셨던데요.”

‘솔직히 고생은 했지.’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웃었다. 아그네스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필 지금 딱 사람이 비고 바쁠 때라 더 고생하셨죠. 디오스 경까지 연대 책임으로 징계를 받게 될 줄은 몰라서….”

“그러게. 바쁘긴 했어.”

슐로이츠와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슐로이츠는 집무실에 머무는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할 게 산더미 같았으니까.

그나마 유적을 몇 번 따라다닌 정도?

다만 그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그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또 그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구분하고….

“라파엘 경이 근신이 풀리는 대로 블란데아 경의 업무를 일부 분담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나중에 조율하면 될까?”

“예, 블란데아 경. 아 참.”

아그네스는 오다가 사 왔다면서 작은 선물을 안겨 주었다.

빙긋빙긋 웃는 모습이, 딱히 사심을 가지고 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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