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고 있나요-(3) (47/190)

슐로이츠는 오래 감상에 잠겨 있지 않았다. 애초에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그의 감상을 오래 끌 수도 없었고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본래는 이렇게까지 한 번에 매드로스의 세력을 쳐 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기왕 제2 지휘관인 마르크 헌트의 처형이 확정된 김에 모조리 잘라 놓을 생각이었다. 당분간 인원의 공백이 있겠지만 감수하기로 결정한 사항이었다.

“프로키온 경. 왕비 전하가 보내신 초청장이 있어요.”

블란데아는 전날 라파엘에게 잘 들어 놓았던 것은 잊지 않았다.

왕실에서 온 연락은 굳이 입으로 내서 슐로이츠에게 말해 줄 것.

꼭 그렇게 해 달라고 라파엘에게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 둬.”

하지만 돌아오는 슐로이츠의 대답은 그저 무성의하기만 했다. 절대 안 뜯어 볼 것 같았다.

저 호화로운 초청장들은 나중에 적당히 라파엘이 남들 모르게 태워 버리는 걸로 운명을 마감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한 번 더 말하진 말랬지.’

블란데아는 라파엘의 눈물겨운 노력이 저 멀리 흩어지는 걸 느끼면서, 라파엘이 말해 준 곳에 왕비의 초청장을 두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이었다.

슐로이츠가 다섯 장의 서류를 검토해 서명 후 넘겼을 때였다.

서류가 올라올 때마다 항상 승인을 할 수는 없었다. 반려해야 하는 서류도 적지 않았다. 이럴 때는 분명한 반려 사유도 달아 주어야 수정을 해 오든 포기를 하든 한다.

그는 깃펜에 잉크를 찍어 서류에 사유를 적었다.

제법 이유가 많고 하나하나 시정해야 하는 것들이라 두 번 더 잉크를 찍고서야 메모가 끝이 났다.

깃펜을 거치대에 내려 두는데, 문득 손이 붙잡혔다.

“……?”

이마가 일그러지는 것도 잠시.

잡힌 손을 본 슐로이츠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아까부터 숨 한 번 제대로 안 쉬는 것 같던 르페브르의 직계가 제 손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에 묻었던 새까만 잉크가 흰 손수건에 얼룩졌다.

“르페브르 경.”

물끄러미 손을 내려다보던 슐로이츠가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지?”

“…….”

순간 블란데아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슐로이츠가 ‘뭐 하는 거지?’ 하고 물어본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라파엘의 말을 오해했음을.

‘잉크가 튀면 꼭 닦아 주라고 한 게 손이 아니었나?’

책상 같은 데에 튀면 닦아 주라고 한 건가?

하필 또 잉크가 절묘하게 책상에 안 튀고, 슐로이츠의 손에 튀어서 오해했다.

저러다가 서류에 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만 들었고.

사실 오늘 아침부터 잔뜩 긴장해 있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린 걸 수도 있었다.

블란데아는 슐로이츠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정돈된 표정과는 달리 블란데아의 손은 은근히 떨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프로키온 경. 라파엘 경에게 인수인계를 받는 과정에서 제가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슐로이츠는 기가 찬다는 듯 짧게 웃었다.

“사람 놀라게 하는군.”

“죄송합니다.”

잉크가 닦이다 만 손을 본 슐로이츠는 직접 책상에 올라가 있는 손수건을 들어 마저 닦아 냈다.

“프로키온… 경?”

애써 쥐어 짜낸 것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저도 도울까요?”

“됐어.”

잠깐 표정이 다채로워지던 것도 잠시, 슐로이츠는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 있지 않아 또 옆에서 종이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식으면 다시 내오고, 서류를 분류하고. 서명이 끝난 서류와 반려가 내린 서류를 분류해 차곡차곡 쌓아 두고.

종이 옮기는 소리와 종이에 손가락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깃펜이 움직이는 소리만 한참 들렸다.

가끔 오파츠에 관한 얘기가 나오기는 했다.

슐로이츠가 물으면 블란데아가 대답하는 식이었으나, 오래 이어지지 않는 짧은 대화들. 그 정도의 말소리만이 길지 않게 오가는 집무실은 내내 조용하고 고요했다.

슐로이츠는 오늘 치 서류를 거의 끝내고서야 피곤한 목을 주물렀다. 르페브르의 직계는 여전히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보좌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인수인계를 대충 받아서 실수를 한 거라더니. 일은 또 잘했다.

오파츠에 관련한 질문을 하면 바로 답을 해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고. 덕분에 일이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끝났다.

식어서 향이 절반쯤 날아간 차로 목을 축이고서, 슐로이츠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괬다.

그리고 몇 장 남지 않은 서류를 점검했다.

보통 밑에 있는 건 중요하지 않은 서류여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다시 말하면 공적인 의미보다 사적인 의미가 큰 곳.

프로키온 영지에 관한 것이었다.

군부령인 프로키온 특별자치령이 아니라, 슐로이츠 프로키온의 개인적인 영지.

선대 가주가 멍청한 짓을 한 덕에 영지의 모든 사병이 해체됐다. 최소한의 치안만 담당할 이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그런 영지는 결코 클 수가 없었다. 이탈하는 영지민들의 숫자도 급증했다. 가꾸지 못한 땅이 버려져 썩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슐로이츠가 최연소 총사령관이 된 후 많은 제약이 풀어졌지만 그래도 몇 년 가까이나 방치되다시피 하던 영지다. 예전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거기다가 영주인 슐로이츠가 총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오지도 못하니, 편지엔 다들 눈물 바람이었다.

조금의 시간만 난다면 제발 프로키온 영지에 꼭 한 번만 들러 주십사, 하는 가신들의 간청이 가득했다.

몇 해 전, 국왕의 근위대에 의해 전부 숙청당하고 새로 뽑아 놓은 인물들이었다.

전부 아주 낮은 가문 출신이었다.

좋게 말하면 개인적인 야욕이 없었고, 나쁘게 말하면 영주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것도 못 하는.

그 정도가 적당했다. 사실 슐로이츠는 그쪽 영지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다.

라자크 왕국의 총사령관이 거머쥐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이만한 권력을 유지하고 어마어마한 군부의 수장으로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나마 어릴 때야 힘들었지, 지금은 힘들 것도 없었고. 그런데도 왜 이렇게 몰아치듯 일을 하냐면, 그에게는 한 달 정도의 온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총사령관이 될 때부터, 아니 군부에 입단할 때부터. 오래전부터 그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슐로이츠는 바닥을 보이는 서류를 확인한 후 물었다.

“서류는 더 없나?”

“네, 프로키온 경. 제가 전달받은 오늘 치 서류는 방금 서명하신 게 마지막 장입니다.”

“그래.”

그는 마지막 서류에도 천천히 서명을 끝낸 후 깃펜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잉크가 튀지 않았다.

슐로이츠는 양손을 깍지 껴 팔을 앞으로 쭉 폈다. 내내 깃펜을 쥐고 있던 손이 곧게 펴졌다.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확인한 그가 품에서 오파츠를 꺼내 살폈다.

“가호를 내려. 나가야겠군.”

다른 부관들에게 지급한 오파츠와 달리, 슐로이츠의 오파츠는 아직 불안정했다.

변수가 많으니 토벌을 나갈 때마다 가호를 내리는 게 좋겠다고 일전에 르페브르에서 연락을 받았다.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눈을 깜빡이더니 물었다.

“유적에 가시는 건가요?”

“그래.”

“라파엘 경에게 전달받은 일정표엔 말씀하신 일정이 없었는데요.”

슐로이츠가 혀를 찼다.

“르페브르의 공주님은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하나하나 다 어떻게 기록하나.”

“…….”

“인원이 많이 비었어. 정기 토벌의 진행이 어려울 예정이니 틈틈이 머릿수를 줄여 놔야지.”

핵심 인력들을 잘라 내려니 슐로이츠 그 혼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그래도 상황을 봐 가며 매드로스의 세력을 잔류시킬 계획은 없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저도 따라갈까요?”

“오래 살고 싶다며?”

“절 괴수들 앞에 던지진 않으실 거잖아요.”

슐로이츠가 피식 웃었다.

“그래. 명색이 총사령관인데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나.”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집무실에 들어오고 처음 웃는 것이었다.

슐로이츠는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그녀의 입매로 시선을 옮겼다.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웃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머릿속을 헤치며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시에도 가문?”

“…….”

“엔리.”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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