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임무인데?”
보통 군부에서 임시 임무라고 하면, 유적 순찰이라거나 혹은 유적 순찰이라거나 아니면 유적 순찰이었다.
가끔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타 도시에 군복이나 방어구 제작 똑바로 하라고 멱살을 잡으러 가야 하는 일도 있다고는 원작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건 드문 일이니 제외.
“총사령관님 보좌 업무를 맡게 되셨습니다.”
“……?”
“지금 간부 인력에 공백이 너무 크게 생겨서 말입니다. 군법상 총사령관님의 보좌는 임시여도 반드시 지휘관 이상의 영관급 간부만 가능하거든요.”
내 눈에 라파엘의 꼼짝도 못 하는 오른팔이 보였다.
목 아래 급소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간 부분부터 가슴 앞쪽까지 길게 가로지르는 상처.
괴수의 손톱이 아니라 이빨에 물렸으면 저대로 두 동강이 났을 터. 그럼 난 두 개의 라파엘을 보게 되었겠지.
솔직히 식은땀 나는 상처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덥석 맡아도 되는 건 없었다.
그게 슐로이츠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디오스 이젤 경은?”
“그게… 아까 근신 처분이 내려졌거든요.”
“…? 갑자기 왜?”
“연대 책임 때문에요. 디오스 경이 제 동기여서…. 함께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 참. 여기 군부지.’
나는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왜 르페브르가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조금 더 일찍 들어오게 되는지도 새삼 깨달았다.
연대 책임이라는 무시무시한 처벌에서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특권이라고 할까.
“얼마나 오래?”
“아그네스 경이 군부로 귀환할 때까지만입니다. 일주일 뒤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나는 약간 초조해졌다. 일주일이나 보좌 업무를….
괜찮겠지?
“알겠어. 뭐 하면 되는데?”
“할 건 딱히 없으십니다. 급한 서류는 제가 다 분류해 놨거든요.”
‘그 팔로?’
얘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한편으로는 살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의 급한 서류라고 해 봤자, 지금 가장 중요한 게 오파츠라서…. 이건 오히려 저보다는 블란데아 경이 잘 처리하실 테니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라파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내게 아예 매뉴얼을 내밀었다.
와중에도 중요하다 싶은 건 한 번 더 육성으로 짚어 주었는데, 전부 왕실에 관련된 사항들이었다.
‘왕실에서 어지간히 슐로이츠한테 구애를 하고 있는 모양이네.’
“그리고 블란데아 경, 잉크를 좀 잘 닦아 주셔야 합니다.”
“잉크는 왜?”
“이번에 바꾼 펜촉이 새것인데, 총사령관님이 기존에 쓰던 거랑 달라서요. 그래서 잉크가 자주 튑니다. 총사령관님이 서류를 한번 보시면 고개를 잘 안 드시거든요. 제가 빨리 안 닦아 놓으면 서류에 묻을 때가 있어서 일을 두 번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듣기만 해도 대참사였다.
“그럼 그냥 옛날 펜촉으로 바꾸지.”
“그러고 싶은데 국왕 전하께서 하사하신 물건이라서요. 총사령관님이야 신경도 안 쓰시지만 남들 눈이라는 게 괜히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한 달은 쓰시고 바꿔야 면이 설 것 같아서 시간 재고 있었습니다.”
“라파엘 경.”
“예?”
“정말 고생이 많네….”
라파엘의 입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그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도 할 줄 아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너무 건방진 언사였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냥 신기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뭐가 신기해?”
“블란데아 경은 맨날 무표정이시거나 아니면 총사령관님 보면서 떨거나… 그러기만 하셔서 저는 경이 꼭 무생물…. 시정하겠습니다.”
이 자식 시정한다면서 할 말은 다 하잖아?
내가 한쪽 주먹을 꽉 쥐자 라파엘이 움찔 떨었다.
“흠흠.”
아무튼 잘 부탁드린다며 슐로이츠의 일정표까지 쥐여 준 라파엘이 물러났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거울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안 웃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엔리코르한테는 잘 웃어 줬는데.
하녀들한텐 잘 웃어 줬는데.
기사들한테도.
비너스 경한테도. 다른 가문의 기사들한테도.
물론 발록 경한테는 비굴한 웃음을 장착하고 살았지만….
근데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전생에선 웃기 싫은 사람들한테까지 억지로 웃는 게 제일 싫었단 말이야.’
그렇다고 내가 인성 파탄자였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평범하게 가난했고, 평범하게 몸이 좋지 않았으며, 평범하게 일찍 죽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반년 만에 재혼한 아버지는 돈이 많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아버지 지원을 거의, 아니 아예 받지 못했다.
중학교 때부터 손바닥만 한 원룸에서 혼자 컸다. 대학교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과 장학금으로 충당했고. 거기에 생활비 대출은 이자가 싸서 다행이었지….
제일 싫었던 건 스무 살 때 심한 복통으로 입원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바쁜 사람이라며 병문안도 한 번 오지 않았다.
대신 새어머니가 얼굴을 비쳤는데, 올 때마다 내 병원비 진단서를 보면서 혀를 찼다.
그새 약이 늘었네, 무슨 진통제가 이렇게 비싼 건지….
그때마다 난 새어머니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무통약이 없으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끊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나마도 투병 생활이 한 달을 넘어가니 지쳐서 웃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아픈 게 벼슬이냐며 얼마나 화를 내던지.
아버지가 돈이 아주 많다는 걸 내가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야 내가 그쪽한테 빚진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한껏 차가운 얼굴로 대했다. 그럼 자식이 아파서 입원했는데 아빠가 돈 쓰는 게 당연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미친 악귀 또라이처럼 얼굴을 심하게 구겼던 것 같지만….
그래도 그때가 사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통쾌한 날이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대기업에 붙었는데, 아득바득 진급하겠다고 과로를 거듭하다가 죽었고….
‘역시 전생에 너무 빌빌대는 삶을 살다 보니 의식적으로 안 웃는 게 틀림없어.’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열심히 웃어야 했고, 싫어도 웃으면서 비위 맞추는 것에 한껏 질려 하며 죽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슐로이츠를 좋아한 이유가 그의 짧은 배경 설명이 내 상황과 어느 정도 비슷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보단 슐로이츠가 더 악착같이 살긴 했지만.
거울 속에 비치는 황금색이 짙은 머리카락을 응시하다가 미소를 한번 지어 보았다.
슐로이츠 앞에선… 좀 웃어야겠지?
그건 전혀 거북하진 않았다. 다만 조금, 아니 많이 긴장이 되었을 뿐.
‘실수 안 해야 하는데.’
***
다음 날.
늘 그렇듯 새벽 수련을 끝낸 슐로이츠는 집무실로 향했다.
총사령관의 집무실은 사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군부 기지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며, 각종 회의실이 큰 수뇌부 건물에 한데 붙어 있었다.
몇백 년 전부터 군부는 준전시였고, 다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까닭이었다.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고려해야 하다 보니 이런 거대한 건물이 마련되었다.
처음 건물의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짙은 색감의 나무로 꾸며진 전실이 나온다. 전실의 중앙에 달린 가장 큰 문이 바로 총사령관의 집무실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그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늘 그랬듯이.
슐로이츠의 직속 부관이자, 제3 지휘관인 라파엘 클로비스가 일찍 나와 문을 열어 놓기 때문이었다.
슐로이츠가 총사령관이 된 이후부터 쭉 이어진 행동이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다만….
집무실에 딸린 창문을 열고 있는 뒷모습은, 슐로이츠가 늘 보던 모습이 아니었다.
한 갈래로 잘 묶인 금발.
이른 아침의 볕을 받은 진한 색의 금발이 아름답게 빛이 났다. 창문이 딸깍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침의 봄바람이 흘러들어 왔다. 뒤를 돌아본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약간 놀란 듯했다.
“프로키온 경.”
그러고는 늘 그렇듯 흠잡을 곳 인사를 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연무장에 다녀오셨나요?”
라파엘은 어디 가고, 경이 여기 있는 거냐는 물음은 필요도 없었다. 라파엘 클로비스는 지난 토벌에서 상당한 중상을 입었다. 거기다가 징계도 무겁게 받았다. 근신까지 끝내면 적어도 세 달 후에나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였다.
하기야 지금 지휘관들 중 남아 있는 이가 손에 꼽을 만큼 적기야 하지.
“이미 보고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라파엘 클로비스 경을 대신해 임시로 프로키온 경의 보좌 업무를 맡기로 했습니다.”
“르페브르에게 보좌를 받다니. 황송해서 일이나 똑바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모래 쌓아 올린 성이라더니.
슐로이츠의 빈정거림에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당황한 눈치였다. 두 손을 모으더니 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에 자신을 보고 가족이라도 만난 듯 달려올 땐 언제고, 이젠 또 두 손을 쥐고 주눅 든 모습이 희한했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 르페브르에게 시선을 뗐다. 그는 곧장 책상으로 걸어가 앉았다.
라파엘이 정리를 늘 해 놓는 책상은 깨끗했다. 손댈 곳이 없었다.
슐로이츠가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를 뒤적이고 있는데, 차 한 잔이 내밀어졌다. 라파엘이 매일 아침 차를 내오기는 하는데.
그걸 전혀 다른 사람이 하고 있으니 색다르다는 생각이 스쳤다. 와중에 그 짧은 시간에 인수인계는 또 언제 했는지 모를 일이기도 했고. 라파엘과 크게 다른 점이 또 하나 있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말수가 아주 극히 적었다.
라파엘은 부관 일도 잘했고, 실력도 뛰어났다. 그러니까 제3 지휘관이자 총사령관의 직속 부관의 자리에 임명된 거고. 다만 조잘거리느라 좀 시끄러웠다. 가끔은 총사령관님 저 휴가 좀 주시면 안 되냐고 눈치를 보며 말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슐로이츠는 의도치 않게, 라파엘이 떠드는 소리를 적당히 흘려들을 수 있었다.
늘 그렇게 조잘거리던 소리가 가득 찬 집무실이 조용한 건 참 낯선 경험이었다.
차를 우려낼 물을 데우는 소리.
도자기 찻잔을 작게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옆에서 서류를 분류하느라 종이들이 스치는 소리.
그 정도가 전부였다. 숨도 똑바로 안 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