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입단-(13) (43/190)

이마를 찌푸린 나는 숨을 참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동시에 뎅, 하는 묵직한 종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한 박자 늦게 온몸에 공포의 전율이 타고 흘렀다. 성검의 손잡이를 꽉 쥔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괴수였다.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제4 지휘관, 그러니까 디오스가 빠르게 사위를 훑어보았다. 몇 번 눈을 깜빡였을 때, 그가 낮은 목소리로 전달했다.

“총 32마리입니다. 2급 경보를 발령하겠습니다.”

“2급?”

“미쳤군.”

어디선가 나지막한 욕지거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32마리?’

그사이 괴수들은 천천히 금사 기둥 쪽으로 걸어갔다.

가짜 꿀에 홀린 벌레 같았다.

‘10마리 이상 괴수면 확실히 드물긴 한데.’

지금부터 오파츠가 어떻게 변형을 하는지 잘 지켜봐야 했다.

엔리코르는 항상 괴수 앞에서 직접 실험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순간 하늘이 밝게 변했다.

콰직!

누군가 들어 올린 성검이 그대로 괴수에게 박혔다.

“……!”

난 이마를 한껏 일그러뜨렸다.

검을 쥔 손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원작에서는 생도 여섯 명이서 한 마리의 괴수를 잡는 것도 버거워했다.

물론 지휘관들이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숫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슐로이츠를 확인하고, 마찬가지로 오파츠를 소유한 라파엘에게 시선을 옮기던 나는….

“라파엘!”

소리를 지르며 라파엘의 손목을 홱 잡아당겼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 있는 거지?

괴수의 끔찍할 정도로 거대한 손이 허공을 스치며, 라파엘의 머리카락이 그대로 몇 가닥 잘려 나갔다.

‘라파엘이 방금 죽을 뻔한 건가? 방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라파엘이 성검을 내서 막는 것보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보다 괴수가 손을 움직이는 게 빨랐다.

라파엘이 소지하고 있던 오파츠의 방어 막이 둥글게 생성되는 것과 동시에, 내가 휘두른 성검들이 괴수의 몸에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괴수가 고작 내 성검 따위에 뒈질 정도였다면, 이 세상이 괴수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라파엘이 몇 걸음 물러나, 급소를 피할 시간은 벌어 주었다.

“큭!”

이후로도 몇 마리의 괴수가 더 달려들었고, 라파엘의 오파츠엔 기어이 금이 갔다.

‘저거 봐. 과로해서 저렇다니까.’

조금씩 성검 휘두르는 게 늦질 않던가.

동시에 나는 아주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혹시 오늘이 라파엘의 제삿날이었나?’

배반해서 살해당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여기서 죽어 버린 거였나?

그럼 아까 내가 살렸으니… 죽지 않는 건가?

이미 어깨를 다친 라파엘은 피를 줄줄 흘리며 준사관들에게 반쯤 뒤편으로 끌려갔다.

찰나.

“아악!”

갑자기 귀를 찢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앞을 본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괴수는 본래 사람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몸이 잘려 나가면 나갈수록 점점 기이한 모습으로 변이했다.

팔이 뎅강 잘린 몸통에서 수백 개의 굵기와 길이가 다른 팔이 우글우글 돋아나는 장면을 내가 실제로 보게 되다니….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오늘 초상을 치를 확률이 가장 컸던 라파엘은 이미 안전하게 뒤로 빠져 있었다.

이쪽에 서 있는 건 나와 마르크였다. 이미 철저하게 나뉜 포지션에 의해 이 부분만은 저놈과 내가 처리를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재수 없는 새끼지만…! 괴수보단 낫다!’

단체전에 사감을 더할 수는 없었다. 눈을 감아 피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고 역겹게 변화한 괴수들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어왔다.

마르크의 성검이 날아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잘려 나간 건 앞쪽의 한 마리.

그나마도 마르크의 손이 조금 떨린 탓인지 머리를 부수진 못했다.

마르크 저놈, 저러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머리를 스친 그 순간.

“……!”

내 팔이 마르크의 손에 의해 홱 잡아 당겨졌다.

순간 가슴이 크게 뛰었다. 사고가 멎고 시간이 잠시 느리게 흘러간다는 착각마저 들었을 때.

고작 한 뼘 앞에 괴수의 손이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눈을 초인적인 힘으로 감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괴수의 손이 확장하는 보호막에 짓이겨졌다. 말문을 잃을 만큼의 충격이 입을 얼게 했다.

‘지금 저 새끼가 지 살겠다고 날 앞으로 던진 건가?’

순간 온갖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원래 저 자리엔 내가 아니라 라파엘이 서 있어야 했다.

상태가 어떻건 간에.

사실 2급 토벌에선 좀 다쳤다고 뒤로 빠지는 경우가 더 적긴 했다.

그리고 현재 사고가 마비된 것 같은 마르크는 방금 그 자리에 누가 서 있든 던졌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내 라파엘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극한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라파엘이 원작에선 나오지 않는 건가? 마르크 헌트 때문에 죽어서?’

머리가 뱅글뱅글 도는 와중에도 성검은 성실하게 움직였다.

비너스는 몇 초만 벌 수 있어도 괴수 앞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 거라고 했다.

콰콰쾅!

형성된 수십 개의 성검의 조각들이 괴수에게 박혔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로 충격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마르크의 말대로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성검 조각은 괴수의 머리를 부수지 못했다.

팔이 잘려도 다리가 잘려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움직이는 괴수는 나를 으깨기 위해 변이된 수백 개의 팔을 뻗었다.

“지휘관님!”

다시 한번 발동된 보호막은 이번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아예 쨍하며 깨져 내렸다. 동시에 속이 한 번 크게 울렁였다.

‘이거 좀… 심한데.’

내가 울렁이는 속을 겨우 다잡은 그 순간.

무수한 성검들이 허공을 날아 괴수의 몸에 처참하게 박혔다.

머리가 아니라 온몸이 분해된 괴수가 그대로 쓰러져 수천 개의 살점으로 흩어졌다.

머리 위로 굵게 쏟아지는 비. 동시에 홱 손목이 홱 붙잡혀 돌려 세워졌다.

내 눈에 그가 비쳤다.

슐로이츠였다.

“…….”

차가운 눈으로 내 아래위를 훑어본 슐로이츠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거의 동시에, 분노로 점철된 목소리가 고막을 가득 울렸다.

“마르크 이 미친 새끼야!”

난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진짜 정신이 나갔나? 그래서 이딴 비열한 짓을 저질러?”

라파엘이 피를 펑펑 흘리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마르크는 창백한 얼굴로 완전히 얼어 있었다.

라파엘이 목에 핏대를 세우는 걸 보니 괴로운 와중에도 안심이 됐다.

‘봤군.’

다행이다.

너무 순식간인 데다가, 괴수가 30마리가 넘는 엄청난 상황이었으니 다들 경황이 없어 목격한 사람도 없을 줄 알았다.

‘마르크 저 새끼가 저를 괴수 앞에 던졌어요!’ 하고 주장하는 것보다, 남이 ‘저 새끼가 쟤를 던지려고 했어요!’라고 소리쳐 주는 게 더 확실하니까.

모두가 얼어붙어 있었다.

특히 마르크 헌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모두가 나와 마르크 헌트를 번갈아 가며 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나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속이 너무 울렁거린 까닭이었다.

내가 가슴을 부여잡고 숨만 헐떡이고 있자, 마르크 헌트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 순식간에 계산을 끝낸 것 같은 그가 냅다 입을 열었다.

“방어막을….”

“……?”

“방어막을 쓰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라파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 정체불명의 방어막을 르페브르의 직계라면 필시 가지고 계실 터이니, 저는 전략적으로 행동한 겁니다! 뒤에서 곧장 성검을 쓸 작정이었습….”

마르크 헌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슐로이츠가 마르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기 때문이다.

마르크 앞에 멈춰 선 슐로이츠는 내내 들고 있던 성검을 흙바닥 위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컥!”

주먹으로 뺨을 맞은 마르크가 바닥에 뒹굴었다.

슐로이츠는 몸을 숙여 마르크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마르크의 얼굴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순간 모두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마르크 헌트.”

“예, 예….”

“경이 이러면 내가 고개를 들 수가 없잖아. 앞에 버젓이 르페브르의 직계가 있는데.”

“…초, 총사령관님. 큭….”

마르크가 목이 졸린 듯 읍읍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 슐로이츠의 손에는 약간의 미동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군 기강이 잡히지? 준사관들까지 전부 목을 잘라 나란히 금사 기둥 위에 올려놓아야 하나.”

“……!”

준사관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마르크가 바로 벌벌 떨었다.

“오해, 오해십니다, 총사령관님…! 르, 르페브르 경! 마, 마, 말씀 좀 제발…!”

진심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는지, 마르크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왜 나한테 매달리지?

슐로이츠를 제외하면 내가 가장 높으니까?

아니면 내가 마음이 약해 보였나?

“제, 제가 이대로 사형에 처해지면 경께서도 마음이 불편…!”

순간이었다.

나는 마르크 헌트의 입 안으로 무자비하게 쑤셔지는 군화를 보았다.

뼈가 박살이 나는 것 같은 생생한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마르크 헌트의 얼굴이 끔찍한 몰골로 변했다.

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슐로이츠는 피와 침으로 범벅된 군화를 마르크 헌트의 입에서 꺼냈다. 처참하게 부서진 이 몇 개가 볼품없이 굴러 흙바닥에 떨어졌다. 찢어진 입 가죽이 너덜거렸다.

피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상황에서, 슐로이츠는 웃고 있었다.

아니, 웃는 게 맞는 건가? 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상황에 꼭 맞추기라도 한 듯, 그의 싸늘한 미소에서는 금속성의 딱딱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슐로이츠의 손은 마르크 헌트의 머리를 난폭하고 무성의하게 붙잡아 올린 상태였다.

“경은 내가 아주 병신으로 보이는 모양이야.”

“으… 헉….”

“한 대 맞고 좀 닥치고 있었으면 서로 좋았잖나? 르페브르에게 이딴 꼴 안 보이고. 응?”

아이를 가르치듯 부드럽게 말꼬리를 늘이면서도, 슐로이츠의 목소리에 다정함이라곤 한 톨도 서려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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