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은 쓰러졌고, 아그네스 경이라는 자는 잠시 외부로 파견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리고 슐로이츠는 내가 가호를 내려 주지 않았고….
매드로스 공자가 내게 그리 매정히 차인 이후, 군부 내부에서는 약간의 동요를 보이는 흐름이 포착되는 것 같긴 했지만 나는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제2 지휘관이었던 마르크 헌트는 요 며칠 얼굴도 마주하기 힘들었다. 날 일부러 피해 다니는지, 아니면 다른 일로 바쁜지는 몰라도.
‘혹시 지금 라파엘을 회유하고 있진 않을까?’
애가 쓰러지기까지 했다니까, 이럴 때가 딱 좋은 타이밍이질 않은가.
라파엘을 보러 한번 가 볼까 싶던 나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헥토르?”
“아가씨!”
르페브르에서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어리둥절해 나갔더니 헥토르가 와 있었다. 오늘도 고개를 푹 파묻고 문서를 넘겨 보고 있던 헥토르는 날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군복이 정말 잘 어울리시는군요!”
“고마워. 근데 왜 왔어?”
“아, 오파츠 때문에 왔습니다. 총사령관님을 한번 제가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요….”
헥토르가 소곤댔다.
“죄송한데 머리카락 좀 나눠 주시면 안 되나요?”
“엔리코르 머리카락 남아 있어?”
“저보다 조금 짧아졌습니다.”
“세상에….”
나는 바로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리본을 풀었다.
“길이 맞춰서 잘 잘라야 해.”
“예, 아가씨!”
‘세상에. 가위까지 가져왔네.’
작정하고 왔군. 심지어 헥토르는 한두 번 머리카락을 잘라 본 게 아닌지, 순식간에 움직였다.
미리 준비해 둔 천 주머니에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쓸어 담은 헥토르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이걸 다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시다시피 오파츠에 쓸려면 방금 잘라 낸 머리카락이 제일 좋아서…. 지금 가져간 것의 10분의 1도 쓰진 못할 겁니다.”
“나를 약초 취급하는 거 그만하면 안 될까?”
“제가 언제 아가씨를 약초 취급했다고요. 전 아가씨를 숭배하는 사람이랍니다.”
“약초를 숭배하는 거겠지.”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같은 르페브르지만 엔리코르는 숭배하지 않아요.”
헥토르는 빙긋 웃고 말했다.
“그런데 아가씨. 매드로스 공자에게 청혼을 받으셨다면서요.”
“응….”
어쨌든 결혼은 가문 간의 일이었고, 매드로스 가문에서는 르페브르가 저택에도 혼담서를 보낸 모양이었다.
혼담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 다른 것은 완벽히 격식을 지켜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둔 것이다.
“엔리코르가 화가 많이 났어요.”
“엔리가? 왜?”
“역시 자신이 갔어야 그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이틀을 씩씩대더라고요.”
“아냐.”
“네?”
“엔리한테 본인이 입단했어도 이랬을 거라고 전해 줘.”
“예?”
헥토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다가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헥토르 아이센 공. 총사령관님이 호출하십니다.”
“아. 가겠습니다.”
헥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자연스레 손을 뻗었다. 흔한 에스코트이기는 한데….
나는 방금 뭔가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이라니?”
“예?”
“호칭이 틀렸잖아. 공자가 아니고 공이라고 그러면….”
“아, 아니에요. 저 호칭이 맞아요. 아가씨.”
“…? 언제 작위 물려받았어?”
“며칠 전에 물려받았습니다.”
“선대 아이센 공이 작위를 물려주셨어? 몰랐는데, 축하해.”
“아, 아뇨, 아가씨.”
“응?”
“축하받기에는 조금….”
헥토르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나흘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뭐?”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덕분에 내게 팔이 붙잡혀 있던 헥토르도 자연히 멈췄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왜 그러냐고?
“무슨… 나는 부고 소식 전혀 듣지 못했는데?”
“당연히 그러시겠죠. 제가 말씀을 안 드렸으니까요.”
“아니….”
얼떨떨했다. 내가 선대 아이센 공의 부고를 듣지 못한 것이야 뭐, 내가 지금 군부에 있으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 아이센 영지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장례식은 내일이에요.”
“…어? 아니 그러니까, 아이센 영지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일이 끝나면 가야죠.”
“그래도 늦지 않아?”
“완전히 늦진 않아요.”
“아니, 애초에 여기에 엔리를 보내면 됐잖아. 넌 아이센 영지로 먼저 가고.”
헥토르가 뺨을 긁적였다.
“그러면 아가씨.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얻으러 못 오잖아요.”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가씨. 절 왜 미친놈 보듯이 보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
“…아가씨?”
“몰라서 물어?”
내가 헥토르를 노려보자 그가 움찔 당황했다.
“프로키온 경만 빨리 보고 영지로 가. 도대체가….”
뭐 하는 놈이야, 이거?
나는 앞에 있던 부관에게 가장 빠른 말을 당장 준비해 놓으라고 이른 후, 헥토르의 팔을 잡고 쭉쭉 걸어가기 시작했다.
헥토르는 질질 끌려오며 물었다.
“아가씨? 왜 화나셨어요? 아가씨?”
“엔리가….”
기가 막혀서인지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엔리가, 장례식 참석하겠다고 했지?”
“가족장을 한다고 말했어요.”
“…뻔뻔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여기로 올 수가 없잖아요.”
정말 억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눈앞이 다 아찔했다. 한편으로는 살짝 무섭기도 했다.
“나중에 엔리코르 해부하면 죽어.”
“걔가 저보다 훨씬 강해요.”
“아버지한테도 손도 대지 마.”
“저는 아가씨에게 구혼을 하는 남자인데 그런 짓을 어떻게 하겠어요.”
난 기가 막혔다. 그 와중에 다행인 건, 어머니는 르페브르의 피를 잇지는 않으셔서 이 미친놈이 별생각이 없을 것 같다는 점.
그리고 아버지가 대대로 외아들이셔서 다른 친척이 딱히 없다는 점….
아니,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해야 해?
저 선의에 가득 찬 준수한 얼굴이 기가 찼다. 그런 주제에 머리카락은 또 하늘색이라 그저 청량해 보이기만 한다는 점이 더욱 나를 기가 막히게 했다.
“너랑 결혼, 할 생각도 없었지만 정말로 진짜로 못 하겠어.”
“예? 왜요?”
“결혼했다간 해부를 당할 것 같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가씨를 해부할 바엔 제 손을 해부하겠어요.”
“그것도 싫어!”
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니, 아가씨! 그렇게 파렴치한 보듯 보시는 게…!”
옥신각신하던 나는 문득 손이 붙잡혔다. 헥토르가 이마를 약하게 일그러뜨렸다.
“손 되게 차가우시네요.”
“너 때문이잖아. 놀라서.”
“사소한 것에 잘 놀라시네요.”
“이게 사소해?”
헥토르는 아예 내 눈치를 보듯 눈을 한 번 굴렸다. 나는 숨을 고르며 손을 빼냈다. 헥토르는 순순히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엔리코르는 헥토르가 내 머리카락을 몰래 잘라 가져가는 걸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 헥토르를 순순히 군부로 보내 준 이유가 사실 납득이 가진 않았다.
그냥 엔리코르가 너무 바쁘거나, 아니면 헥토르가 감당 못 할 생떼를 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아버지 장례식 때문에 아이센 영지로 내려가는 거라고 한 거였나 보다. 그리고 군부로 와 내 머리카락을 잘라 간 거고.
‘엔리코르….’
넌 진짜 이 미친놈이랑 어떻게 같이 지내는 거야?
물론 아이센은 아주 낮은 위치의 귀족이었다. 그러니 하위 가신이 없을 거고, 장례식도 규모가 작을 거였다.
하지만 내일이 아버지 장례식인데 오늘 내 머리카락을 채취하겠다고 군부로 오는 건 도대체 무슨 광기인 거지?
“프로키온 경만 보고 바로 내려가.”
“하지만 아가씨. 오파츠를 연구하려면….”
내가 노려보자 헥토르가 입을 다물었다.
“바로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
결국 그날, 몇 시간도 있지 못하고 헥토르는 아이센 영지로 그대로 쫓겨났다.
나는 머리가 복잡했다.
‘여긴 그래…. 제목부터 미친 소설이었어.’
잘 기억해야 한다. 선하고 악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든 미친 것 같은 이들이 존재하는 소설이었다는 걸.
‘혹시 그 매드로스 공자도 미친놈인 거 아닐까?’
나는 들고 있던 검에 힘을 주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조용히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검집 끝으로 이불을 푹푹 쑤셨다.
화장실과 옷장도 차례로 확인한 나는 아무도 없다는 걸 보고서야 안심하고 의자에 앉았다.
문득, 헥토르가 가기 전에 날 보며 했던 의미심장한 말이 떠올랐다.
“아가씨.”
“응.”
“총사령관님이 많이 무서우신가 봐요. 눈도 못 마주치시네요.”
“아무래도…?”
헥토르는 어릴 적, 나와 슐로이츠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엔리코르도 모르는 눈치였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와중에도 저 정신 나간 놈이, 오파츠와 르페브르의 육체 외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놈이.
내가 슐로이츠를 조금씩 피하고 있는 걸 눈치챈 게 희한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럼 좀 곤란하실 것 같으니 제가 힘을 내 보겠습니다.”
“……?”
헥토르가 힘을 낸다고 하니 더 찝찝했다.
캐물어 보려고 해도 헥토르는 성격이 희한했다. 한번 입을 다물면 절대 열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궁금하지만 그저 시간 낭비뿐일 걸 잘 알고 있으니, 그냥 빨리 아이센 영지로 쫓아내 버렸다.
그의 기행에 기가 다 막혔지만 어쨌든, 저 미친놈 덕분에 새로운 오파츠는 또 금방 나올 것 같았다.
‘이번엔 가호를 입술에 내려라, 그딴 소리를 지껄이진 않겠지.’
그럴 바엔 엔리코르는 그냥 슐로이츠에게 모든 부담을 전가하는 걸 선택할 것 같긴 했지만.
***
괴수.
<미친 미인의 최후>의 모든 비극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사실상으로 담당하는 존재.
괴수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을 잔인하게 해치는 주제에, 그 어떤 생명체보다 압도적으로 크고 강했다.
괴수들은 흔히 ‘폐허의 유적’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