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입단-(8) (38/190)

마르크 헌트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물씬 어리는 게 보였다.

군부에서 감히 그 누가 제2 지휘관에게 이럴 수 있었겠는가?

‘음. 슐로이츠라면 가능하겠지만….’

나처럼 평화적인 방법을 쓰진 않았겠지. 막연한 직감이었다.

“경은 사교계의 규칙에 눈이 어두운 모양이야.”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르페브르 경.”

“매드로스 공이 르페브르에 대한 흠모를 강하게 가지고 있어 봤자, 프로키온 경에 대한 유대만큼 두터울까? 매드로스 공과 프로키온 경은 같은 자리를 공유했었잖아.”

“예. 물론…. 물론 그렇지요.”

“그래. 그러니 순서가 잘못 됐잖아.”

“…무슨?”

“매드로스 가문은 프로키온 경에게 먼저 혼담을 넣어야지. 애초에 내 오라버니는 입단한 적도 없어, 매드로스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데 혼담이라니. 우습잖아.”

“…예?”

“한 번 말하면 못 알아듣나?”

나는 발록 경이 귀에 박히게 해 준 말을 그대로 읊었다.

“여기 군부다. 마르크 헌트 경.”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마르크 헌트의 어깨에 반사적인 각이 섰다. 한 박자 늦게 그의 얼굴에 미약한 혼란이 스몄다.

“…죄송합니다. 르페브르 경. 잘 못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매드로스 공은 프로키온 경에게 먼저 혼담을 넣으라고.”

“제가… 제가 어찌 매드로스 공에게 여식의 혼사라는 중대한 일을 이래라저래라….”

“방금 내겐 그 중대한 일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어?”

마르크 헌트의 입이 서서히 다물어졌다. 나는 턱으로 흘긋 출구를 가리켰다.

“이틀? 정도면 되겠지.”

“아니,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

와중에 배정된 준사관도 없는 내 팔자야. 직접 걸어 가 시간을 기록한 나는 따뜻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부터 정확히 25시간 줄 테니 뛰어.”

“르페브르 경!”

***

“슐로이츠 프로키온에게 또 혼담을 넣으라고?”

“그게….”

“네놈은 이 일이 전부 장난으로 보이는 거냐!”

“아니,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악!”

매드로스 공은 씨근덕대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원래 총사령관이었다. 적어도 괴수에게 당해 죽기 전까지는 그 영광된 자리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총사령관쯤 되면 전방에 나가지 않는 법이다.

대부분의 총사령관들은 적어도 몇십 년은 그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매드로스 공은 최초로 15년도 채우지 못하고 자리를 빼 줘야 했다. 무지막지한 공훈을 세워 버린 빌어먹을 소년 때문에.

그래 봤자 반역자 가문 태생으로, 별것 없던 놈이 감히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열이 받는데 왕도를 비롯한 왕국의 모든 귀족과 백성들이, 오직 슐로이츠 얘기만 했다. 최연소 총사령관, 다시없을 검파자, 열 개의 영지를 구해 낸 기사….

매드로스 공은 이를 벅벅 갈아 이젠 틀니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처음에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샛별로 떠오를 때 사고를 위장해 죽였어야 했는데. 순식간에 제 턱밑을 치고 오다 못해 어느새 군부의 거인으로 우뚝 서게 될 줄은 몰랐다.

정신을 차리니 매드로스 공은 총사령관 자리를 빼앗기고 군부의 지지 기반까지 휘청대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처음엔 현명하게 방안을 모색했다.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재수가 없든 어쩌든 잘난 놈이었고, 군부 총사령관이었다.

자존심은 상한다만 저놈보다 대단한 놈은 살아선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으니, 필시 아주 오래 총사령관 자리에 머물고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당장 혼담을 넣었다.

세 번을 까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저놈은 예의상 거절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문을 모욕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그 빌어먹을 자식은 공주라도 원하는 건가? 하지만 왕비가 공주와의 자리를 몇백 번은 만들었을 텐데도 왕도에 한 번을 올라가질 않았는데.”

“…….”

“내 사람들도 자비 없이 쳐 내고 있고. 물밑에서 해결하는 게 더 열이 뻗치는 걸 알고 그러는 것이지!”

총사령관 자리는 본래 특수한 왕의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혈육을 통해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새로운 총사령관은 언제나 전 총사령관을 존중했다. 그래서 전 총사령관의 사람을 웬만해서는 내치지 않았다.

“그놈만이 아주 제 세상이지. 의례도 어기고 날 아주 우스운 꼴로 만들고 있어.”

줄줄이 잘려 나가고 있었다. 차라리 혈기를 이기지 못한 젊은이 특유의 성급함으로 한 번에 제 사람들을 쳐 냈으면 여론이나 나쁘게 조성할 수 있지.

사교계 평판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주제에 군부 일에는 물밑에서 하나씩 잘라 내고 있는 게 정말로 재수가 없었다.

“마르크 헌트.”

“예, 매드로스 공…!”

“너도 제2 지휘관 자리를 내놓고 싶진 않을 것 아니냐. 그렇다고 내 사람인 게 분명한 네가 그 건방진 애새끼 밑에서 간부 자리라도 유지할 수 있을 성싶으냐. 물론 말단 간부 자리라도 유지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내가 너를 살려 두겠느냐?”

마르크 헌트의 얼굴에 핏기가 조금씩 가셨다.

“매, 매드로스 공. 살려 주십시오!”

“그래, 살고 싶지?”

매드로스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손속이 아주 잔혹한 남자였다.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건드릴 수가 없고.”

“…….”

“라파엘 클로비스. 그놈이 박쥐같이 약아빠진 자식이지.”

“그 말씀은….”

“그놈은 가문 자체가 약해. 회유를 꾸준히 하면 못 넘어올 것도 없다.”

마르크 헌트는 눈이 튀어나올 금액이 적힌 어음 수표를 받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 그리고 혼담을 넣으랬나?”

“예! 제게 그렇게 강요하지 뭡니까.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요!”

“르페브르의 여식답게 배짱 한 번 좋군.”

보통의 귀족들은 입단하고 석 달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눈치를 살피느라 주눅이 드는 게 일반적인 경우인데도 말이다.

역시 르페브르인가?

“좋다. 르페브르의 성의를 봐서 혼담을 한 번 더 넣도록 하지.”

“슐로이츠 프로키온에게 말입니까?”

“그 빌어먹을 놈에게 뭣 하러 또 넣는단 말이냐? 대귀족의 주선이라고 한들, 국왕의 명도 아니니 온전히 따를 필요는 없지. 아무튼 혼담만 넣어 주면 되는 일 아니더냐.”

***

“…혹시 죄송한데 머리가 돌았답니까?”

라파엘의 말에 나는 상황도 잊고 픽 웃었다. 그러고는 청혼의 시가 적힌 아름답고 두꺼운 편지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매드로스에서 진짜로 혼담을 넣어 올 줄 몰랐어.”

“이게 어딜 봐서 순수한 청혼입니까? 누가 봐도 권력 다툼용 아닙니까!”

“원래 귀족들의 삶이란 그렇지…. 정략혼으로 이용당하는 삶에 순응하며 살고 있어.”

“블란데아 경.”

라파엘이 기가 막혀 하며 말했다.

“아무리 르페브르셔도 둘째는 그렇게 빡빡하지 않다는 거 저도 압니다. 제가 바보로 보이십니까?”

나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집무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게 이 혼담서가 도착한 것은 아까 전, 오파츠 때문에 집무실에 있을 때였다. 내 집무실은 아니었고, 슐로이츠의 집무실 옆에 딸린 작은 보조용 집무실이었다.

매드로스 쪽에서 앙심을 품고 보란 듯이 가져왔다는 건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와중에도 내가 르페브르 소생이라는 사실은 신경이 쓰였는지, 이 구혼장과 꽃다발을 가져온 건 진짜 매드로스의 공자였다.

그래. 자기들도 평판이 소중하겠지.

르페브르가 무섭기도 할 거고.

어쨌든 겉으로만 보면 크게 부족할 것 없는 청혼이었다.

덕분에 군부는 웅성댔고, 이제 뺨까지 움푹 들어가고 있는 라파엘은 또 일하다 말고 분기탱천해 뛰어나왔다. 하기야 누가 보아도 너무나 속이 보이는 청혼이니 기가 막혀 하는 것도 당연했다.

안 그래도 라파엘은 할 일이 많을 텐데….

‘겸사겸사 이런 것도 노리고 청혼한 거겠지?’

나는 자리에 앉아 답장을 썼다. 옆에서 은근히 내 답장 내용을 훔쳐보고 있던 라파엘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블란데아 경?”

“왜?”

“거절하실 겁니까?”

“당연히 거절하지. 내가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제가 표현을 조금 빼먹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거절하시는 겁니까?”

놀라 되물을 만도 했다. 나는 지금 청혼을 받은 지 10분도 되지 않았다. 사교계 관례상, 아무리 눈에 차지 않는 이의 청혼이라도 혹은 완벽히 거절할 생각이라고 해도 일주일은 잠자코 가만있는 게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례로, 지금 밖에서 내 대답을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매드로스 공자를 들 수 있었다. 어차피 오늘 답을 못 받을 걸 알면서도 괜히 30분은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겐 잘된 일이었다.

“거절해야지. 여긴 사교계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다들 귀족이라 잊고 있지만 이곳은 사교계가 아니었다. 사교계였다면 직격타로 나쁘게 날 소문도 조금은 비껴갈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나는 그다지 뒷말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세 번째는 난 결혼할 생각이 없어서, 사교계 평판을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나는 청혼을 거절할 때 흔히 인용하는 시구를 다 써넣고, 마지막에 내 이름을 썼다. 잉크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손가락으로 눌러 번지지 않나 확인을 했다. 그리고 완전히 마른 편지지를 잘 접어 편지 봉투에 넣었다.

“블란데아 경…!”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는 내 뒤로 서둘러 따라 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자 마르크 헌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매드로스 공자가 나를 홱 돌아본다. 딱 봐도 내가 너무 일찍 나와 당황한 것 같았다.

“르, 르페브르 영애….”

얼마나 놀랐으면 저렇게 말까지 더듬을까.

나는 별말 없이 편지를 주었다. 매드로스 공자의 손이 떨리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 나는 그가 편지를 뜯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예상했다시피 매드로스 공자의 얼굴에 충격이 번지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우린 처음 보는 사이였다. 정략혼이 당연한 시대라지만 그래도 서로 간의 얼굴 정도는 대충이나마 아는 게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본인도 아버지한테 떠밀려 이 웃긴 쇼를 하게 된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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