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따가워.’
여주도 처음 들어왔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나마 여주는 여러 훈련도 받느라 저렇게 귀 따갑게 대답도 해야 했는데 난 그런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훈련은 이미 발록 경한테 10년 넘게 죽어라 받고 왔으니까….
지휘관들만 쓰는 연무장이 단독으로 마련되어 있어 나는 그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무로 가벽을 세워 놓은 연무장들은 너무 넓어서 약간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길을 잃었다.
‘그치. 원작에서는 여주 위주로 서술되니까. 지휘관들이 쓰는 연무장들까진 묘사가 별로 없었다고.’
게다가 원래라면, 르페브르는 입단과 동시에 준사관들이 배정되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나는 엔리코르 때문에 정해진 시기보다 훌쩍 일찍 들어왔고 아직 배정된 준사관들도 없었다.
그러니 혼자 헤매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참에 지리만 좀 익혀 놔야지.’
미로를 탐험하는 기분으로 연무장들을 확인하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이 넓디넓은 군부령에서 인기척 자체가 너무 드물어서, 나는 자연히 그쪽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막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
잘못 왔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곧장 뒤돌아 나갔다.
조금 더 헤맨 끝에 마침내 지휘관들의 전용 공동 연무장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겉옷을 벗어 단 위에 올려놓았다.
‘슐로이츠가 있을 줄이야.’
아까 내가 잘못 들어간 곳은, 총사령관의 개인 연무장이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슐로이츠는 입구와 등진 채로 성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얼핏 본 성검들은 무수하게 내리꽂히고 있었고….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슐로이츠가 죽고 군부가 절망에 빠졌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아.’
물론 나는 최애가 죽어서 절망에 빠진 거지만, 군부 전체는 가장 큰 전력이자 최고 결정권자를 잃었으니 두려워하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여긴 괴수를 자주 보기도 할 테니…. 나라도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을 터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산소가 모자랐다.
아까부터 하염없이 연무장을 뛰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떠나오기 전, 발록 경이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르페브르의 직계이시니 입단을 하셔도, 바로 지휘관으로 임명을 받으실 겁니다. 무조건 자율 훈련이란 소리인데… 설마 이 발록이 없다고 해서 게으름을 피우진 않으실 것이지요?”
“당연하지!”
“예. 저도 아가씨를 믿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휴가를 나오실 때마다 체력을 체크하긴 하겠습니다.”
“……?”
‘그게… 어딜 봐서 날 믿는 거지…?’
아무튼 발록 경의 말은 무서웠고, 나는 입단을 하는 첫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뛰어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발록 경의 눈은 너무 매서워서 내가 하루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바로 알아챌 테니까.
예전에는 한두 바퀴만 돌아도, 슐로이츠에 대한 생각이 옅어졌는데 이젠 웬만큼 뛰어도 별로 힘들지 않아서 한참을 더 달려야 했다.
반쯤 뇌가 표백되었을 때였다. 나는 그제야 겨우 헐떡이며 멈춰 섰다. 두 손으로 양 무릎을 짚고 겨우 몸을 세웠다. 턱을 따라 흐른 땀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문득 시야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신발.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그대로 다리가 풀렸다.
뒤로 자빠질 뻔했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곧바로 일으켜 세우는 딱딱한 힘. 덕분에 나는 조금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프로키온 경.”
슐로이츠는 내 다리 쪽으로 시선을 던진 후에야 손목을 놓아주었다.
나는 자꾸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가라앉히느라 온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방금 전까지 죽어라 뛰어서 숨이 차오르는데, 거기다가 슐로이츠가 예고 없이 나타났으니 심장이 펑 터져 죽어도 이해해야 할 지경이었다.
자꾸 빨개지는 얼굴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슐로이츠는 별말 없이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숨도 똑바로 못 쉬는 날 기다려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묘하게 민망하기만 했다. 이대로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때 슐로이츠가 뒤로 돌아섰다. 그냥 가는 건가, 다행이다 싶었는데….
슐로이츠는 단 위에 놓인 수건을 들어 수통 안에 든 물을 쏟아부었다. 찬 물기를 머금은 수건이 내게 휙 던져졌다.
나는 감사하다고 재차 말하고 일단 수건을 펴서 당장 얼굴부터 파묻었다. 시원한 물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시야가 잠시나마 차단되니 좀 살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내가 겨우 수건을 내렸다.
그제야 슐로이츠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연무장에서 나온 이후 샤워를 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까 검을 휘두르며 입고 있던 옷과도 달랐다. 그의 빗장뼈가 조금 보여 나는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정수리 위로 뚝 떨어지는 목소리.
“도망치더니 여기서 뛰고 있었나?”
나는 순간 당황했다. 슐로이츠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날 돌아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온 건 어떻게 알았지?
“초행이라 길을 잃어서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준사관들은. 아, 아직 배정이 안 됐나.”
“네.”
나는 수건을 쥐고 눈치를 보며 말했다.
“프로키온 경의 훈련을 방해할 생각은 정말 아니었습니다. 죄송해요.”
“르페브르의 직계가 사과를 이렇게 온종일 한다는 걸 남들이 아나?”
분명 내용은 빈정거리는 내용인데, 어조는 그러지 않았다. 뭐라고 할까. 묘하게 기가 찬 듯한 목소리라고 할까?
나는 은근슬쩍 시야를 들어 올렸다. 슐로이츠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눈을 내리깔았지만.
비단 비너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슐로이츠의 두 눈을 똑바로 보는 게 쉽지 않았다. 도둑이 제 발 저려서일까?
꼭 내 썩은 양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슐로이츠는 눈빛이 얼음장 같은 면이 있어서 똑바로 마주 보는 게 어려운 편이었다.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맹수를 앞에 두면 괜히 움츠러드는 것과 결이 비슷했다. 슐로이츠는 입을 열었다.
“라파엘을 보내 줄 테니 그 녀석에게 일정을 전달받아.”
“라파엘 경을요?”
“그래.”
그는 슐로이츠의 직속 부관 아니던가. 뜻밖의 파격적인 인사에 적잖이 당황한 내가 고개를 들자 또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푸른색 눈동자를 마주해야 했다. 난 다시 슬쩍 시선을 피했다.
“르페브르의 직계가 또 길을 잃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프잖아.”
“네. 주의하겠습니다, …프로키온 경.”
슐로이츠의 시선이 내게 머무는 게 느껴진다. 길지는 않았다. 그는 그대로 연무장을 걸어 나갔다.
나는 슐로이츠에게서 받은 수건을 가만히 쥐고 가만히 서 있었다.
***
“아니, 당연히 제가 따라다녀야지요!”
한 시간 후.
나를 찾으러 온 라파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난 몰랐는데, 그는 일어나자마자 내 숙소로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이미 외출했다는 말에 놀라서 여기저기를 찾으러 돌아다녔단다.
“지금이야 오파츠가 총사령관님을 포함한 극소수의 간부에게만 배당되었지만, 당장 3개월만 지나도 말입니다. 블란데아 경이 계시지 않으면 군부 일정이 마비가 될 겁니다!”
“가호 때문에?”
“그럼요.”
“흠….”
맞는 말이긴 했다.
르페브르의 오파츠는 몇백년 만에 새롭게 등장한 것도 모자라 총사령관인 슐로이츠가 택한 방어구였다. 가호만 잘 내려 주면 기사들의 생존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니 기적으로 칭해도 모자라지 않을 지경이었다.
오파츠는 성검만큼이나 필수품이 될 것이고, 아예 괴수에 대응하는 방법도 개편이 될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엔리코르는 두뇌가 비상하니까.
지금이야 일주일에 한 번씩 가호를 내려 주어야 하겠지만, 계속 연구를 거듭하고 있으니 그 텀은 점점 길어질 것이다.
나중엔 1년에 한 번만 가호를 내려 주어도 충분할 정도로 발전시켜 놓겠지.
그 전까지는 나도 최대한 체력 보호를 하면서, 가호를 내려 주는 쪽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해야 하는 게 맞았다.
라파엘은 슬쩍 운을 뗐다.
“그리고 블란데아 경. 어제 얘기를 들어보니 다소 과격하게 수련을 하시는 것 같던데…. 몸 돌봐 가면서 적당히 하시면 안 됩니까? 아니면 제가 따라다니면서 잔소리를 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 알았어.”
‘이건 어쩔 수 없지. 날 위해서가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니까. 발록 경도 뭐라고 할 수 없을 거야.’
그럼, 그럼. 슐로이츠의 부관까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생각을 하는데 입 꼬리가 주체가 안 됐다.
“블란데아 경. 왜 갑자기 웃으십니까?”
“아니, 그냥.”
나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내일부터 하루에 연무장 스무 바퀴 정도만 뛸 생각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웃음이 주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준사관들이 배정되기 전까지는 경의 공식적인 업무는 따로 없을 겁니다.”
“그래?”
“예. 제가 다 하게 되었거든요.”
“……?”
나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그래도 돼?”
“괜찮습니다. 오파츠를 위해서 까라면 까야죠.”
“으응.”
나는 라파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는 내게 식당의 위치나, 회의실, 의료실, 성검 보관 장소, 도서관 등등 중요한 곳들을 하나씩 데려가며 알려 주었다.
‘신기하네.’
군부령에서 중요한 곳들은 원작인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도 자주 언급이 됐다. 르페브르 저택은 원작에선 잘 언급도 안 되는 곳이라 그런 느낌이 적었는데, 군부령은 달랐다.
평생 머리로 그려 보기만 하던 곳을 실제로 보게 되자 신기하기도 했고, 묘하게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