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입단-(4) (34/190)

“르페브르에서 가호를 빌미로 내게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자연스러울 흐름이잖아.”

“프로키온 경.”

그가 딱딱하게 굴어도 나는 하나도 화가 나지 않았다. 아마 슐로이츠가 갑자기 나를 괴수한테 던진대도 화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슐로이츠의 경계는 당연했으니까. 눈가가 자꾸 물러지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 감사했다.

무표정을 언제나 유지할 수 있는 특강을 받아서 다행이지….

“르페브르의 명예를 걸고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엔리코르가 사실 엄청난 흑막이어서 널 죽이고 군부를 차지한다고 해도 내가 엔리코르를 감금해서라도 막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슐로이츠.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보던 슐로이츠가, 문득 내 앞으로 허리를 굽혔다. 순간 내 숨이 굳었다. 슐로이츠의 얼굴이 너무 지척에 있었다.

“가호를 내려.”

목 아래가 한 번 파도처럼 술렁였다.

나는 내내 품에 넣어 왔던 오파츠를 꺼내 손목에 감았다.

그리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당한 속도로 움직였다. 두 손으로 슐로이츠의 뺨을 감싸자, 그가 약간 멈칫하는 것 같았다. 그래, 엔리코르는 슐로이츠에게 보낸 편지에 상세한 방식까진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예상 못 했겠지. 나도 못 했는데 슐로이츠라고 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슐로이츠의 뺨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기이한 감각이 들었다. 입술을 뺨에 맞추는 순간, 잔잔했던 수면 위에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지는 느낌. 동그란 파동이 동동 수표면 위에 퍼졌다. 동시에 슐로이츠 때문에 긴장해서, 은근히 차가웠던 몸에 온기가 홱 돌았다.

순식간이었다. 온몸에 따뜻한 열기가 퍼진 것은. 안온하게까지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정말 누구라도, 신의 가호라고 오해할 만한 기분.

“…….”

나는 천천히 입술을 물렸다. 그에게 입을 맞추느라 약간 들어 올렸던 발끝도 내렸다. 왜 일주일 전에, 지휘관들이 비슷한 시간을 두고 입술을 뗐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정수리를 따라 똑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감각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도둑 키스라도 당한 듯 입매를 감싸고 눈을 동그랗게 떴는지도 짐작이 갔다.

“…따뜻하네요.”

“…….”

“가호를 받으면 이런 기분인가요?”

반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온몸이 정말로 따뜻했다. 묘한 감동까지 느껴졌다. 당연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비슷해.”

슐로이츠의 목소리가 귓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난 한 박자 늦게 내가 슐로이츠 뺨을 잡은 채 멈춰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미친.’

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티를 많이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연스레 손을 놓았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슐로이츠는 내게 오래 시선을 주지 않고 몸을 돌려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비슷하다는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불쾌하진 않았다는 소리였고, 같은 감각을 느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편안해졌다.

꼭 나도 슐로이츠에게 가호를 받고 있는 기분이라서.

“가 봐.”

***

“오늘 숙소로 가시겠다고요? 아니 뭐,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만…. 하녀들과 사이가 좋아 보이시던데 더 같이 있지 않으셔도 됩니까?”

슐로이츠의 부관은 말수가 제법 많은 성격이었다. 조잘대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시종일관 차가운 슐로이츠를 앞에 두고도 혼자 저렇게 떠드는 성격인 것도 괜찮았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꼭 벚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파엘 지휘관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우리 곁을 지나가던 기사들이 부관에게 인사를 했다. 부관은 그제야 나를 보면서 자기 이름이 라파엘 클로비스라고 말해 주었다.

기사들이 내 쪽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이분은…?”

“제1 지휘관님이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

라파엘의 말에 기사들이 깜짝 놀라 정자세를 취했다.

“안녕하십니까, 블란데아 지휘관님!”

“안녕하십니까!”

나는 아까 라파엘이 했던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가시죠. 블란데아 경.”

다시 라파엘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날 못 알아보고 인사를 바로 안 했다는 것 때문에 기사들은 제법 놀란 것 같았다. 군복에 달린 배지를 보니까 부사관들 같은데.

‘모를 만도 하지.’

나는 아직 군복을 입지도 않았으니까. 게다가 제대로 된 입단식은 3개월 후, 다른 검파자들이 들어올 때에 맞춰 더 크게 하기로 되어 있고. 내 얼굴을 모르는 게 이해가 갔다.

와중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계급의 맛 나쁘지 않은데?’

나한테 깜짝 놀라 인사를 하다니.

왕도의 르페브르 저택에서 물론 나는 아가씨이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나를 키워 온 하녀들은 유모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용인들도 그랬고. 그들은 날 예뻐하고 귀여워하고 아껴 주었다. 물론 불만이 있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르페브르의 식솔들을 아주 사랑하고 좋아했다.

거기다가….

사실 내가 발록 경만 보면 깜짝 놀라 빌빌대느라 몰랐다. 남들이 날 보면 깜짝 놀라서 각이 잡힌 인사를 한다는 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여기입니다. 블란데아 경.”

어느새 숙소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했던 것보다 방이 넓었다. 평범한 귀족의 방 정도? 가구가 다 1인용이라는 걸 제외하면 그랬다.

물론 르페브르에서 쓰던 방의 10분의 1 수준의 크기지만 난 아주 만족했다. 전생에 살던 집보다 넓었기 때문이다.

1인용 침대, 책상, 의자, 옷장, 서랍장, 마찬가지로 또 1인용 소파 두 개에 1인용 테이블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좋아.”

진한 갈색이 감도는 나무들은 재질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가구들도 전부 좋은 것들이었다. 하기야 지휘관들은 왕도 사교계에서도 환영받는 인사였다. 새삼 군부에 흘러드는 예산이 떠올랐다.

‘어마어마하다고 나오지.’

괴수는 사람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악몽이었으며 목전에 둔 죽음이었다. 그런 괴수들에게서 자신들을 지켜 주는 군부는 특별한 존재였다. 군부가 무너진다는 건 곧 왕국 전체가 무너진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예산이 편성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입니다. 신사옥이라서 깨끗하죠. 저도 얼마 전에 이곳으로 옮겨 왔는데 다른 지휘관들도 선호도가 아주 높습니다.”

라파엘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그럼 오늘은 쉬시고, 내일 또 찾아오겠습니다.”

“고마워. 잘 자.”

“블란데아 경도요. 근데….”

“응?”

“저 좀 내려 보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여자 숙소에 남자가 들어오면 나갈 때도 여자 손이 필요해서요.”

***

그날 밤.

나는 누워서 깜깜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다들 잘 돌아갔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입단식까지는 자유에 가까운 몸이라 시가지에 더 머물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엔리코르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이번에 들어가면 안 나올 거라고 으름장을 놨다. 실제로도 안 나왔고.

엔리코르가 괜히 군부 앞을 서성이면, 이제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 내겐 별로 이득이 안 될 소문이나 퍼지겠지. 어쨌든 대귀족 가문의 후계자로서 그런 쪽 머리도 핑핑 잘 돌아가는 엔리코르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나와 함께 내려왔던 하녀들과 기사, 마부들도 다 올라갔을 거고.

이 거대한 특별 자치령에 나 혼자 있는 것이다.

왜 엔리코르가 아카데미에서 맨날 나한테 편지를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내일 짐이 군부 안으로 도착하면 나도 편지부터 쓸 생각이었다.

‘내가 잘 할 수 있겠지?’

뛰는 거 말고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는 나라서 솔직히 좀 걱정이 되긴 했다. 비너스의 충고대로 나날이 주눅 든 척도 해야 하고. 그러는 와중에도 가호를 내리는 일은 성실히 이행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나는 르페브르라는 이름에 누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고, 이내 잠에 빠졌다.

***

다음 날.

일어났을 때엔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깨우는 사람이 없으니.’

예컨대 발록 경이라든지…. 게다가 나는 낯선 곳에서도 잘 자는 편이긴 했다. 나는 씻고 나와 가벼운 외출복을 입었다.

“안녕하세요, 블란데아 경. 일찍 일어나셨군요. 좋은 새… 아침입니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숙소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기사에게 인사를 한 나는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날씨가 좋았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들. 살벌한 군부령에 이렇게 많은 꽃나무가 심겨 있다는 게 웃기기도 했다.

‘진짜 한적하네.’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다들 업무를 갔나. 나는 걸음을 옮겼다. 군부령은 너무 넓었다. 지도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보안 때문에 그런 것도 없었다.

가끔 순찰조로 지나가던 몇몇 기사들이 있었다. 군복도 입지 않은 날 보고 멈춰 세웠지만 어제 라파엘에게 받아 놓은 임시 신분패를 보여 주면 됐다.

“연무장이 어디지?”

“예! 블란데아 지휘관님이 쓰실 연무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생각보다 편하게 연무장으로 올 수 있었다. 나름대로 한참 헤맬 각오를 했었는데.

“더 명령하실 일은 없으십니까!”

“없는데….”

“넵!”

“…….”

“…….”

“……?”

나는 소리만 바락바락 치고 정자세로 가만히 서 있는 기사들에게 턱짓했다.

“가서 일 봐.”

“그럼! 가! 보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돠아악!”

‘귀 아프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원작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펜을 잡을 수 있을 때부터 열심히 이 세상에 대한 일들을 정리해 두었다.

틈나는 대로 읽어 대서, 원작 사건의 줄기나 주조연들 인적 사항에 대해선 지금도 달달 외우고 있었다. 나름 소설을 통째로 외운 것 같다고 자만하고 있었는데, 아니었군. 이런 아주 사소한 부분들은 당연히 잊고 있었다.

일단 높은 사람을 보면 기사들이 바락바락 소리를 치는 모습이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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