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반역 가문의 새 가주-(9) (30/190)

***

“고민이 많으신 표정입니다, 아가씨.”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비너스가 뒷짐을 지고 허리를 굽힌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난 서둘러 비너스의 뒤를 살폈다. 다행히 발록 경은 없었다.

“복귀가 늦었습니다.”

“괜찮아. 바쁘잖아.”

“조금이요.”

요즘 가문 전체가 정신이 없다 보니, 비너스 역시 르페브르 기사단의 정복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확실히….’

비너스는 하녀들도 흘긋거릴 만큼 아름다운 기사였다. 정작 저래 놓고 다가와 고백하는 하녀들은 한 명도 없었다더라. 나도 그 이유는 좀 이해가 갔다.

비너스는 사랑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감상하고 싶은 외모니까…. 물론 비너스가 상처받을까 봐 솔직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역시 매번 눈이 부신 외모였다. 저 외모가 아까워 나는 매년 비너스와 초상화를 그리곤 했다.

“내일 그림 그려야 하는 날인 거 안 잊었지?”

“물론이지요.”

화가들은 매해 바뀌었다. 왜냐하면 다들 비너스를 처음 보면 심장이 멎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특히 비너스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을 때마다 신의 치맛자락처럼 눈부시게 빛나 말문이 턱 막혔다.

‘비너스는 사람이 아닐 거야.’

매번 하는 생각을 흘리며 비너스에게 물었다.

“비너스. 오파츠는 어때?”

“아주 좋습니다. 덕분에 육 개월 동안 사상자가 90% 이하로 줄었습니다.”

“그 정도라고?”

“예, 손봐야 할 곳이 많다고는 하지만…. 기사들은 신의 선물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엔리코르 이 녀석….’

도대체 몇 명의 사람을 살리는 것인가?

“엔리는 진짜 대단해.”

“맞습니다. 정말 대단하시지요.”

천재는 천재네. 다른 게 살짝 걱정이 되기는 했다.

‘군부에 가면 연구를 잠깐 쉬어야 할 텐데.’

엔리코르가 왜 저렇게 잠을 못 자고 열성적으로 연구에 매달려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 오파츠는 철저히 르페브르 가문의 독점 기술이었다. 이후 군부로 가게 되면 보안상의 이유로 연구는 잠깐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니 그 전에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세상엔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들은 분명히 있었다.

물리적인 시간이 보장되어야 완성되는 일들 말이다. 예컨대 엔리코르가 죽어라 연구하는 오파츠처럼.

“왕실에서도 도련님의 오파츠에 관심이 엄청나게 많더군요.”

“그래서 매일 왕실에서 사람이 오는구나.”

“그렇지요.”

나도 눈치는 있었다. 엔리코르가 오파츠 연구를 이유로 도움을 요청하면, 왕실은 결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오파츠 연구를 위해 바로 편의를 봐주려고 하겠지. 하지만 그랬다가는 왕실에 르페브르의 기술을 일부는 이전해 줘야 할 것이다.

엔리코르가 잠도 못 자고 연구한 건데.

나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리던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엔리코르가 군부에 가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는 르페브르 가문의 직계여서 가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다른 직계가 가지 않는 이상은.

난 연구에는 재능이 없다. 사실 성검을 잡았을 때처럼, 하다 보면 뜻밖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별 흥미가 안 갔다.

‘엔리코르….’

블란데아로 태어나고, 살아남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았고, 또 슐로이츠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기도 한 나다. 그건 내가 평생 마음에 짊어지고 가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나는 약아빠져서, 가족들이 주는 사랑은 받았다. 또 그만큼 사랑을 돌려주고 싶어 늘 전전긍긍했다. 엔리코르와도 정말 잘 지냈다. 우리가 사이좋은 남매라는 건 식솔들이 다 알았다. 나도 엔리코르가 좋은 일만 겪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니까.

그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죽어라 오파츠를 연구하고 있는데.

“비너스.”

“예, 아가씨.”

“슐로이츠가….”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헛기침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총사령관이 진짜 나 못 알아보겠지?”

“음….”

“아닐까? 알아볼까?”

“예전의 아가씨와 반대로 행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전의 내가 어땠는데?”

“아주 당당하셨죠. 그러니 이번엔 반대로 아주 움츠러들어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너무 움츠러들어 있으면 수상해 보일 테니, 재회하는 첫날만은 귀한 가문의 영애답게 밝은 모습… 그러니까 아가씨의 진심을 조금만 보여 주시고 다음 날부터는 점점 총사령관의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 짓눌리는 느낌으로 가시면 될 것 같은데요.”

“…….”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되게 자세해서 놀랐어.”

비너스가 천천히 웃었다.

“아가씨가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 저는 보았으니까요.”

그날 밤. 엔리코르는 여전히 참석하지 못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엔리 대신에 입단할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