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반역 가문의 새 가주-(7) (28/190)

“머리카락 때문에 청혼하는 거지?”

“예!”

“그럼 엔리코르한테 결혼하자고 하면 되잖아.”

“예? 싫어요, 아가씨. 저도 취향이 있답니다.”

“엔리랑 나랑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어?”

“그건 그런데요. 어…. 아가씨? 저 왜 엔리코르가 아가씨 어릴 적부터 되게 괴상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이 자식이?’

내가 그런 눈으로 쳐다보든 말든 헥토르는 빙긋 웃었다.

“그래도 제 청혼, 제법 진심이에요. 결혼하고 싶은 사람 없으면 절 남편감으로 생각해 보세요.”

웃기네.

나는 헥토르를 몇 년 전부터 쭉, 엔리코르를 볼 때마다 봐서 알았다. 저건 나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내 신분을 좋아해서도 내 배경을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진짜로 과학자로서 나를 좋아하는 거였다. 르페브르 가문의 직계니까.

나를 사랑하는 실험 재료로 보는 느낌?

‘눈이 약간 광기에 찌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헥토르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건 비명이었다.

“내가 머리카락 그만 얻어 오랬지.”

“으악!”

엔리코르는 귀신같이 나타나 헥토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와중에도 내 머리카락을 떨어뜨릴까 봐 두 팔로 부여잡고 있는 헥토르는 그야말로 광기의 표본이었다.

헥토르를 내쫓은 엔리코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도 자꾸 머리카락 잘라 주지 마.”

“어차피 너무 길어서 자른 건데. 그리고 있어야 연구가 쉽다며? 잠도 못 자잖아.”

“갑자기 시간이 없어져서 그래.”

“시간?”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무슨 시간?”

엔리코르가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너 네 전속 기사 지금 어디 갔는지 몰라?”

“……?”

***

“비너스 경. 거의 도착했습니다.”

“그래.”

깊은 숲속. 이 길을 지나고 나면 총사령관이 있다는 임시 막사가 나온다. 잠깐 쉬는 시간에 비너스는 오늘도 성실하게 블란데아에게 보낼 편지를 적었다.

막 편지를 접어 품에 넣은 직후.

뎅뎅뎅뎅뎅!

종소리와 함께 기사의 비명 섞인 소리가 들렸다.

“괴수입니다! 괴수입니다!”

비너스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공적인 업무였기 때문에 당연히 성검은 지급받은 상태였다.

괴수는 몸이 잘려도 다시 돋아난다. 문제는 기형적으로 돋아난다는 것이다.

그나마 성검을 쓰면 그 확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제로가 아니라는 건 어쨌든 확률이 있다는 소리였다.

바로 이렇게.

“기형 확장입니다! 형태는 감마!”

팔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수백 개의 팔이 우글우글 돋아 올랐다. 끔찍한 모습. 이것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고 굳어서 죽는 기사들도 부지기수였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여도 등 뒤는 무방비하다.

길게 뻗어 난 팔이 비너스의 등 쪽에 스산한 감각을 선사했다.

비너스가 바로 손가락을 물어뜯고 오파츠에 제 피를 묻혔다.

피가 묻은 오파츠의 표면에서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스파크가 튀었다.

반투명한 빛을 내며 눈 깜빡할 새 생성되는 방어 막. 정화의 힘을 근본으로 둔 오파츠답게 순간 숲에 들어온 것 같은 청량함이 숨을 트이게 했다.

방어 막에 막힌 괴수의 손이 우그러지고 뼈가 튀었다. 방어 막도 함께 깨졌지만 그 틈이면 충분했다.

비너스가 성검을 휘두르기 직전.

“……!”

머리 위로 떠오른 수많은 성검의 형상들이 괴수에게 날아가 그대로 난도질을 했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짙은 피 냄새가 풍겼다. 비가 내렸다.

“르페브르의 기사라더니.”

“…….”

“실력이 나쁘지는 않군.”

비너스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굳었다.

“감사합니다.”

비너스가 천천히 덧붙였다.

“슐로이츠 프로키온 경.”

내리는 비를 익숙하게 바라보던 그 지나치게 젊은 총사령관이 성검을 닦은 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게 르페브르에서 보내온 오파츠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검파자들은 아무도 갑옷을 입지 않았다. 왜냐하면 괴수의 엄청난 악력이 현존하는 모든 갑옷을 뚫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재질도, 어떤 금속도 소용이 없었다.

괴수의 비정상적인 악력을 막아 낼 갑옷을 입으려면 두께가 너무 두꺼워졌다. 성벽을 입고 다녀야 한다는 소리였다.

차라리 빠르게 괴수의 공격을 피하고 검으로 쳐 내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경이 피를 토하는 건 무슨 이유지?”

비너스가 입술을 슥슥 닦았다.

오파츠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피를 묻혀야만 방어 막이 활성화되는데, 시전자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 이 부담을 줄이느라 엔리코르가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밤낮 잠을 못 잤다.

“오파츠가 아직 미완입니다.”

“미완이어도 나쁘진 않군. 시제품을 가져와.”

“예.”

비너스는 한 갈래로 묶고 있던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내장이 곤죽이 된 기분이 고역이었지만 참을 만은 했다. 다만….

슐로이츠 프로키온.

‘어릴 땐 정말 눈이 아예 안 보였나 보군.’

블란데아는 매년 비너스를 붙잡고 초상화를 그리자고 화가 앞에 끌고 가 던져 놓았다. 비너스는 자신의 외모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객관적인 시선은 있었다. 매번 자신을 처음 본 사람들이 멍한 표정을 짓곤 하니까.

다시 말하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이란 소리였다. 그런 얼굴을 본 슐로이츠 역시, 이마를 가늘게 좁히긴 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보단 진짜 무슨 사물에 가까운 외모 때문에 잠시 흥미를 가진 것 같았다.

그마저도 금방 사라지고.

예상은 했지만 어릴 때 아가씨를 붙잡고 매달리며 울던 소년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차가운 기운이 뚝뚝 묻어나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저 총사령관은….

혹시 괴물 같은 감으로 아가씨를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비너스는 슬쩍 눈썹을 올렸다.

그럴 리 없을 것 같긴 했다.

***

비너스가 저택으로 귀환한 건 얼마 후였다.

“비너스 마중하러 갈래…!”

“그러실래요, 아가씨?”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나마 이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발록 경을 함께 호출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 오후 특훈이 취소되어, 저택 정문의 시끌벅적한 행렬을 반길 수 있었다. 비너스가 있는 행렬이었다.

비너스는 발록 경 그리고 몇몇 주요 가신들과 함께 아버지에게 무슨 보고를 하고 있었는데 문득….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내가 스스로 세상과 담쌓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발록 경이 나와 세상 사이에 담을 쌓은 게 아닐까…? 하는 합법적인 의심이 들었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버지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짐을 부지런히 내리던 고용인들이 선뜻 자리를 비켜 주어 잘 다가갈 수 있었다.

“오파츠를 총사령관이 허가하였습니다.”

“헉.”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동시에 아버지를 두고 원을 그리며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내 쪽을 향했다. 나는 발록 경의 시선에 일단 몸을 바로 폈다. 아버지가 따뜻한 미소와 함께 내 이름을 부르셨다.

“블란이 왔니.”

“네. 말씀들…. 마저 나누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 귀는 몹시 쫑긋 세운 상태였다. 군부라든지, 보급이라든지. 그런 단어들이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흘렀다.

“정식으로 등록을 해야겠군. 국왕을 뵙고 와야겠어.”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가주님. 잠시 확인을 좀 부탁드립니다.”

그때 헐레벌떡 뛰어온 부관 하나가 급하게 아버지를 찾았다. 모르긴 몰라도 몹시 바쁜 듯했다.

나는 적당히 비너스 쪽으로 물러난 후 물었다.

“왜 말도 안 하고 갔어?”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아가씨 얼굴을 뵐 시간이 있어야 말씀을 드리죠.”

“그건 그래. 내가 조금 바쁘긴 했지.”

“단장님이 원래 몬스터입니다. 따라가는 아가씨가 대단하신 거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비너스 역시 멀어지는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군부에 다녀왔다니 보고를 더 해야겠지. 바쁜 사람을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가 봐, 비너스.”

“예, 아가씨. 참.”

“응?”

비너스가 나를 보며 덧붙였다.

“총사령관이 아가씨를 전혀 알아보지 못할 것 같으니 안심하십시오.”

“…응?”

“어릴 때 완전히 눈이 멀었던 것 같으니까요. 몇 년 전 데뷔연에서도, 돌아오고도 한동안은 불안해하셨잖습니까.”

“티가 났어?”

“제가 오래 아가씨를 모셔서 알았던 겁니다.”

그렇게 말한 비너스는 예의 그 아름다움의 요정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걸어갔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날 저녁.

가족들이 다 바빴기에 나는 오랜만에 혼자 저녁을 먹었다.

‘슐로이츠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

물론… 내가 알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슐로이츠가 총사령관이 되면 바로 아버지를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영지 깊숙이 칩거한 가신을 외부인이 만나려면, 가주를 만나는 게 순서니까.

하지만 슐로이츠는 아직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날 그동안 마음속에서 천천히 잊었나?’

데뷔연을 치르고도 몇 년이 지났다. 게다가 이제 슐로이츠는 너무 높은 사람이 되었고, 모든 왕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무엇보다 공주들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왕실에서 슐로이츠를 부마로 삼을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실제로 슐로이츠에게 비밀리에 접선을 했을 수도 있고. 군부 쪽은 내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확실하진 않았다.

‘아니면 설마 르페브르를 치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나는 약간 두려워졌다. 그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슐로이츠는 나를 아주 싫어하고 있을 거였다. 사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온갖 상처는 다 주고 자존심이란 자존심 다 짓밟아 놓고 떠난 사람이라니.

그렇다고 이제 와서 친한 척할 수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최악이니까. 아무것도 없을 땐 사람을 그렇게 짓밟더니, 구국의 영웅이 되니 친한 척 들러붙는 거냐고 진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미 슐로이츠의 머릿속에서 나는 쓰레기겠지만, 그래도 핵폐기물로까진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