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자로 왔나?”
“……?”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지.”
고개를 든 총사령관의 시선은 정확히 딜런을 보고 있었다. 순간 모두의 눈길이 딜런에게 집중되었다.
헛, 하고 놀란 딜런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총사령관님. 제 남동생이… 총사령관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아이라 돌아가면 자랑이라도 할까 싶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딜런의 말에 몇몇 기사들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지만, 고작 스물이라던 총사령관은 달랐다. 푸른 눈동자엔 미묘한 웃음기도 없었다.
총사령관은 르페브르 가신이 가져온 서류에 서명을 한 후, 마지막 장까지 순식간에 살펴보고 덮어 내밀었다.
“가져가라.”
“예, 총사령관님.”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서류를 챙긴 기사가 바로 가신에게 돌려주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예의를 지키고 인사를 나눈 후, 딜런은 가신들에게 섞여 돌아 나왔다. 군부를 빠져나오고서야 다들 한숨 돌린 듯 웃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총사령관님, 아주 얼음으로 만들어지신 분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엔리코르 도련님이랑 분위기가 정반대더군요. 동갑내기이신 걸로 아는데.”
“그래도 생기기는 참… 기가 막히게 잘생겼군요. 제가 젊었을 때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예끼 미쳤나? 다시 태어나고나 말해.”
“내버려 두시죠. 다음 생엔 지옥에 가고 싶으시답니다.”
가신들 중 오직 딜런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격이 심하게 변했네.’
순은을 깎아 만든 듯 대단히 수려한 외모였으나 그뿐이다. 음영 진 얼굴에 감도는 냉기. 10년 전의 소년 역시 잘 웃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블란데아보다는 잘 웃었다. 오히려 그때는 아가씨가 좀 냉랭한 편이었지.
그때만 해도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평범한 소년’의 범주에 들던 성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노클을 낀 딜런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저 정도면 시에도 가문을 찾아가 아가씨를 추적할 법도 한데 왜 가만히 있지?’
***
“블란아? 여기서 뭐 하고 있니?”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다가오고 계셨다. 테라스에서 하마터면 뛰어내릴 뻔했다. 난간 손잡이를 꽉 잡고 있던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숨 쉬고 있었어요….”
“왜 숨을 숨어서 쉬어.”
숨을 잘 쉬면 “자, 우리 아가씨 많이 쉬셨으니 이제 연무장을 돕시다.” 하고 어디선가 나타날 발록 경 때문이라곤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뒤에는 유리로 된 물 주전자와 잔을 가지고 선 하녀가 있었다.
“자, 물 마시렴.”
신선한 레몬즙이 들어간 물은 차갑고 시원했다. 어머니는 내 손에서 빈 컵을 가져가, 뒤에 있는 하녀에게 직접 건네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우리 딸.”
“좋을 일이 좀 있었어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딜런이 돌아와 말해 주기를 슐로이츠가 아주 건강해 보인다고 했다. 두 눈도 멀쩡해 보인다고.
내가 별말 없이 웃기만 하는데도 어머니는 다른 걸 묻지 않으셨다. 그래도 뭔가 항상 다 안다는 표정이어서 좀 부끄럽긴 했지만.
“블란아.”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엔리가 온다는구나.”
“네? 벌써요?”
“탑의 가문은 언제나 의무가 많지. 게다가 이번에 쇠브론 영지 대방어전이 있었잖니. 덕분에 검파자들이 대규모로 빠졌다더라.”
“아…. 엔리가 군부에 입단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블란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시기가 온 건 알겠는데…. 그래도 아직 시간이 좀 남지 않았나?
엔리코르가 왜 그렇게 일찍 집에 돌아왔는지 알게 된 건 며칠 후였다.
***
엔리코르는 턱을 가볍게 기울였다.
그가 일찍 왕도의 저택으로 돌아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군부에서 당장 오파츠 시연을 원한다고?”
“그렇다네요. 도련님.”
엔리코르는 당황스러웠다. 오파츠는 그가 가문의 기술 개발 일환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었는데, 군부에서 이렇게 관심을 크게 보일 줄은 몰랐다.
“군부는 언제나 준전시 상태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괴수들을 직접 방어하는 곳이니까.”
목숨이 늘 경각에 달려 있는 곳. 군부는 새로운 방어구나 무기에 특히 예민했다. 몇백 년 동안 오직 성검만이 괴수를 처단하는 공식적인 무기로 쓰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토록 수많은 가문들이 막대한 예산과 시간을 들여 가며 만든 무기나 방어구들은 전부 몇 번의 테스트 끝에 폐기 처분이 된 까닭이다.
“엔리코르. 너 이제 잘라서 쓸 머리카락도 없어.”
그때 들리는 목소리에 엔리코르가 옆을 돌아보았다. 엔리코르 또래의 청년이 서류를 보며 서 있었다.
“헥토르.”
그는 엔리코르의 아카데미 룸메이트였다. 또한 아카데미 과정 내내 수석과 차석을 번갈아 가며 차지한 굉장한 인재이기도 했다.
“거기서 더 자를 순 없잖아.”
“그렇지.”
엔리코르는 슥슥 제 짙은 금발을 만져 보았다.
대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머리카락은 항상 최소한의 길이는 남겨 두어야 했다. 어쨌든 자신은 르페브르의 후계자이니, 그 정도 기품은 필수였다.
하지만 엔리코르의 오파츠에는 ‘르페브르 직계’의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들어가야 했다. 애초에 자신의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한 거라서 선택권이 없었다.
헥토르가 물었다.
“블란데아한테 좀 달라고 하는 게 그렇게 싫어?”
“싫어. 그냥 죽고 말지.”
물론 와중에도 아버지 머리카락은 어떻게 구걸해서 받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블란데아는 떠올리지도 않았다.
좀 성역 같은 면이 있어서.
아주 어릴 때였다. 블란데아의 머리카락 색이 하루가 다르게 옅어져 거의 회백발처럼 변했다. 더군다나 잘 자라지도 않았다. 약이 독해서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블란데아가 잠들면 짧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펑펑 쏟곤 하셨다.
기껏해야 서너 살이었던 엔리코르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잠든 블란데아의 먼지 같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려 보면 괜히 입술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정신 차려 보면 젖살이 통통한 뺨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곤 했었다.
그 덕에 지금도 블란데아의 머리카락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 몬스터 같은 발록 경의 개인 특훈을 아득바득 따라가고 있는 블란데아를 알면서도….
어릴 적의 모습이 자주 눈에 아른거렸다.
결국 엔리코르는 없는 자원을 닥닥 긁어모아 밤을 새워 오파츠를 연구했다. 최선을 다해 블란데아에게 친한 척을 하고 있던, 헥토르가 뒤에서 몰래 블란데아한테 머리카락을 야금야금 얻어 왔다는 건 몇 주 후에나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그날 헥토르는 맞고 쫓겨나 저택의 별채 도서실에서 잤다.
***
“아가씨. 도련님의 오파츠 덕분에 1사단 전원이 생존해 왔다고 합니다.”
나는 비너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예. 정말입니다.”
엔리코르의 룸메이트인 헥토르가 마약 거래상처럼 찾아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매달리기에 몰래 머리카락을 나눠 준 게 몇 주 째였다.
‘고작 몇 주 지났다고. 오파츠라는 거 진짜 대단하다.’
그렇다고 연구실을 들여다보거나, 엔리코르와 얘기를 나눌 여력이 없었다. 요즘의 나는 매일 발록 경에게 열일곱 시간씩 특훈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뛰고 검 휘두르고 쓰러져 잠들고 나면 하루가 그냥 끝나 있었다.
“보십시오. 모습도 많이 바뀌었지요.”
마치 줄에 매달아 놓은 회중시계처럼, 비너스의 손에서 툭 하고 오파츠가 떨어졌다. 끝을 끈으로 꿰어 허공에서 달랑거리는 오파츠는 단순한 보석 목걸이 같기도 했다.
‘내가 티타니아한테 보낸 거랑 많이 달라졌네.’
그때 오파츠에는 엔리코르의 머리카락이 그대로 보였다. 꼭 샛노란 호박 보석 속의 벌레처럼. 이제는 그냥 반투명한 액체를 굳혀 보석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약간의 기포만 차 있을 뿐이었다.
‘사실은 저게 다 내 머리카락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징그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르페브르 가문이 가진 정화의 힘이라는 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작에서 한두 줄 언급되는 능력이긴 했지만.’
그래도 댓글 창에선 반응이 좋았다. 엔리코르의 팬들이 특히 좋아했다.
- 엔리랑 되게 잘 맞는 능력이네
- 현대에 저런 능력 가진 사람 있으면 애 다섯씩 무조건 낳게 했을 듯
- 인권 유린 잘봤고요
- 엔리 너무 깨끗해 내가 더럽히고 싶어
사실 이 세계관을 생각하면 그리 중요하게 다뤄질 능력은 아니다. 괴수가 들끓는 세계에선 공격형 능력이라든지 혹은 치유형 능력이라든지, 그런 게 더 중요할 테니까. 정화의 힘 같은 게 있어 봤자 실무에선 잘 쓰일 일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내 생각에는 ‘탑의 가문’이라는 설정에 힘을 주기 위해 들어간 소모성 설정 같았다. 블란데아로 태어나 살아가는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르페브르 가문의 격을 높이기는 하지만 그 능력을 어떻게 해 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딱 좋은 정도이긴 하지.’
그런 능력 덕에 오파츠라는 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었다. 원작에선 상상도 못 했던 걸 눈앞에서 보게 되니 더 그랬다.
며칠 후.
한동안 잠잠하던 헥토르가 내 방 앞으로 다시 기어 왔다. 나는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라 주었다. 미리 잘라 놓거나 베개에 떨어져 있는 걸 주워 가라고 했더니, 가급적 금방 자른 게 좋다는 희한한 말을 했다.
내가 약간…. 약초밭의 약초가 된 느낌도 드는데?
“빨리 돌아가. 엔리한테 맞으면 어떡해.”
“연구에는 언제나 고난이 따르는 법이니까 괜찮습니다. 아가씨.”
“으응.”
<미친 미인의 최후>라는 제목답게,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이 엑스트라, 헥토르 역시 제법 미인이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특이해서 청량한 느낌이 강했다. 엔리코르한테는 반말 찍찍 갈기면서 내게는 아주 공손한 존댓말 하는 것도 웃겼고.
“아가씨.”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저랑 결혼하시면 안 되나요?”
“결혼? 갑자기? 왜? 신분 상승…? 아.”
헥토르가 빙긋빙긋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