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반역 가문의 새 가주-(5) (26/190)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고 하네요.”


나는 근래 몇천 번은 듣는 것 같은 이름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그렇다니까요. 프로키온 공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이제 겨우 약관이에요. 스무 살이죠.”


“세상에나….”


어머니를 둘러싸고 대화를 나누던 귀부인들이 동시에 혀를 내둘렀다. 나도 사실 전생의 기억이 없었으면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그 처사는 과하지 않느냐, 아무리 공적을 세웠어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그런 자리에 오르는 게 말이 되느냐 하고 불편함을 표시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 아침 국왕 전하께서 공식적으로 말씀을 하셨어요. 슐로이츠 프로키온 경의 성검 개수가 200개라고 하더군요.”


“…전대미문이군요. 이번에 일어날 뻔했다던 쇠브론 영지의 대참사를 군부가 저지한 데에는 그만한 실력자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나 봐요.”


“그렇죠. 듣기로는 왕비님께서도….”


온통 슐로이츠의 얘기였으며, 슐로이츠의 공적을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군부에 있어서 이 정도지. 왕도에 올라왔으면 진짜 난리였을 거야.’


슐로이츠가 언제 왕도로 다시 올라올지에 다들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고 했다. 그날 데뷔연 이후 슐로이츠는 단 한 번도 왕도에 올라오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전해 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붙잡고 서서 숨을 한참 몰아쉬었다.


헉헉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폐가 다 들썩이는 기분이었다. 땀이 턱을 따라 뚝뚝 흘렀다. 갈비뼈가 어찌나 아픈지 분리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블란데아 아가씨.”


발록 경이 다가와 말했다.


“아직 세 바퀴 남았다는 거 잊지 않으셨지요?”


“나 잠깐 숨만 쉰 건데….”


“군부 소속 기사나 병사들은 이보다 더 힘든 훈련도 매일 합니다. 쉬시겠습니까?”


“아니…!”


나는 바로 벌떡 일어나 다시 미친 듯이 뛰었다. 이게 사람이 사는 것인지 아니면 매일매일 고문을 당하는 것인지 알쏭달쏭하긴 했지만.


‘군부는 더 힘들다니까….’


나는 결국 완주를 했다.


그리고 이번 달 들어 두 번째로 탈진을 했다. 그대로 실려 가긴 했지만 덕분에 그날 잠은 잘 잘 수 있었다.






***






며칠 후.


오늘도 죽음 같은 훈련을 겨우 끝내고 기어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뜻밖의 인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딜런?”


기어가고 있던 나를 딜런이 붙잡아 일으켰다. 차가운 인상의 딜런은 몹시 황당하다는 얼굴로 날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니, 아가씨. 이게 무슨 꼴이랍니까?”


“그냥. 나 훈련받아서 이래.”


“훈련이요?”


“발록 경한테 특훈 받아. 시작한 지 좀 됐어.”


“특훈이요? 기사단장에게요? 그래서 이런 모습인 거군요.”


원작대로 엔리코르 따까리로 흘러간 딜런은, 저택에 잘 붙어 있지 않았다. 영지에 있는 성에 가거나 엔리코르를 만나러 아카데미를 왔다 갔다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왕도 저택에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많이 건강해지셨군요.”


“의사들이 실력이 좋아서.”


딜런이 옅게 웃었다. 역시나 끼고 있던 은테 모노클은 반짝반짝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아가씨도 엄청 노력하셨네요. 기사가 되고 싶어 그러십니까?”


“아니, 그런 목적의식이 있는 건 아니고.”


“아니시면요?”


“그냥…?”


내가 슐로이츠를 그렇게 버리고 온 이후 이런 고행이 몸에 익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딜런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는 어릴 때부터 참 어른스러우셨습니다. 솔직히 도련님보다 더 어른스러우세요.”


“그으럼. 나도 알아.”


딜런이 쿡쿡 웃었다. 그는 기어가는 나를 잡아 세워 준 후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조금만 빨랐으면 걷다가 또 자빠질 것 같았는데 배려심이 좋았다.


“왕도뿐 아니라 왕국 전체가 시끄럽더군요. 스무 살짜리 총사령관 때문에요.”


“으응. 그렇겠지.”


“제가 잠깐 군부에 다녀올 일이 있습니다.”


딜런의 말에 순간 귀가 쫑긋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아냐, 없어.”


“정말로요? 군부는 바깥과 생태계가 달라서, 마음먹지 않으면 안쪽 소식을 접하기 힘든 곳이잖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나도, 바깥과 담을 쌓고 지내서 그렇지 신분 자체는 빠지는 게 없었다. 르페브르 가문의 영애니까. 왕실의 소식도 잘만 하면 주워들을 수 있는 신분이라는 소리다. 그런데도 군부의 내부 소식은 들어 볼 길이 요원했다.


“아가씨.”


“…….”


“정말 궁금한 것은 없으신지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말했다.


“총사령관이… 슐로이츠 프로키온 경이 다친 곳 없이 건강한지만…. 그거 하나만 좀…. 보고 올 수 있어? 어려운 거면 말고.”


물론 데뷔연 때 건강하단 걸 두 눈으로 봤지만…. 그때 슐로이츠는 아직 소년티가 남아 있어서인지 아니면 함께 올 가족이 한 명도 없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과거의 내게 복수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인지 조금 지쳐 보였다.


게다가 그는 이번에 엄청난 공적을 세웠다. 어디 다치진 않았을지 조금 걱정도 됐다. 슐로이츠는 남주가 아니라 작중에서도 이런 얘기까진 자세히 없었던지라….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요.”


딜런은 미소를 지어 주며 말했다. 왠지, 어릴 때 날 보는 듯한 표정이라 마음 한구석이 괜히 간지러워졌다.






***






라자크 왕국은 인접한 이웃 왕국들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크기와 세력을 가진 나라였다. 몇백 년 전, 왕실의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성검 덕분이었다. 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성검의 기술은 오직 왕실만이 독점했다.


괴수가 타국을 멸망하게 하면 라자크 왕국에도 장기적인 손실이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주기적으로 인근 왕국들에게도 성검을 선물해 주었다. 이 선물이 라자크 왕국과 기타 나라들 사이에 더 명확한 서열을 지정해 주는 꼴이기는 하였으나.


그런 라자크 왕국에서 군부는 독보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괴수의 발생지로 알려져 있는 폐허의 유적지를 방어하고 있는 형태로 군부령이 특별 자치령으로 따로 세워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군부가 왕실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키는 일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성검은 왕실의 소유인 데다가, 군부의 중심축인 기사들은 전부 왕도에 적을 둔 젊은 귀족들이었으니까. 와중에도 심심찮게 기사나 병사들이 괴수와의 전투에서 죽어 나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괴수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다.


특히 십여 년 전, 로시에 가문의 영지를 비롯한 몇몇 고위 귀족들의 영지가 괴수에게 절반이 넘게 함락되면서 형성된 팽팽한 긴장감은 아직도 귀족들에겐 악몽처럼 잔재해 있었다.






딜런을 위시한 르페브르의 부관들에게 군부 입장 허가가 떨어진 건 십여 분이 지나서였다.


“들어오십시오.”


딜런은 너무 많이 두리번거리지 않으려고 하며, 적당히 군부 안쪽을 살폈다.


‘피 냄새가 은근히 나는군.’


괴수에게서 나는 피 냄새인지, 사람에게서 나는 피 냄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바깥과는 확연히 다른 피 냄새가 났다. 죽음의 냄새가 안개처럼 옅게 깔린 곳.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군요.”


“어린 가신들을 데려오지 않아 다행입니다. 기절했을 것 같아요.”


함께 온 르페브르의 가신들 중, 몇몇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원래도 ‘정화’라는 힘을 매개로 한 주인을 보좌하며 문서 작업이나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다. 위대한 가문일수록 기사단이나, 그림자 따위를 철저히 분리해 놓기 때문에 양지의 가신들이 피 냄새에 익숙지 않아 한다고 흠을 잡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군부의 기사 중 하나가 예의 바른 어조로 말했다.


“오늘 정기 괴수 토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이렇지 않아요.”


“아,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모시지요. 총사령관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다른 가문도 아닌 르페브르 가문에서 파견한 가신들이다. 그래서 군부의 기사들은 몹시도 정중하게 그들을 안내했다.


가신들은 늘어진 수십 개의 건물들 중 중앙에 위치한 건물로 들어섰다. 왕도나 다른 귀족가의 성처럼 화려하거나 예술품이 잔뜩 장식되어 있진 않았지만, 서늘한 빛깔을 품은 건물은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또한 문을 여니 바로 총사령관의 집무실이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고 계단을 걸어가고… 그런 류의 장식적인 구조는 죄 철거해 놓은 것이 군부의 구조다웠다.


“총사령관님. 르페브르의 가신들이 도착했습니다.”


슐로이츠 프로키온. 그 젊은 총사령관은 책상에 앉은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왕국 내에서도 모든 흥미와 관심을 죄 끌고 있는 남자. 당연히 가신들은 개인적으로라도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인사 올립니다. 총사령관님. 이렇게 총사령관님께 친필 서류를 전하게 된 것을 가주님께서도 몹시 반기고 있습니다.”


“나 역시.”


짧은 대답. 차가운 물이 흐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일단… 가신들의 말을 받아 주기는 했는데 그뿐이었다. 심상치 않았다. 레너드는 따뜻한 성격의 가주였고, 유쾌한 성격이었다.


레너드라는 능력 좋고 다정한 주인 아래서 화초처럼 곱게만 지내 온 가신들은 그제야 이곳이 왕국과 유리된 군부임을 새삼 깨달았다.


“서류부터.”


총사령관의 부관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서둘러 가신에게 서류를 받아 들었다. 서류를 전달받은 총사령관이 미간에 희미하게 주름을 잡고 종이를 넘겨 보았다.


조용히 있던 딜런은 이때다 싶었다.


‘다친 데는 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딜런은 슐로이츠가 서류에 시선을 처박은 때를 틈타 열렬히 관찰했다.


‘눈도 제대로 보이는 것 같고.’


보이는 거겠지? 눈이 완전히 멀었다던 시절에도 기가 막히게 블란데아를 따라다녀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딜런이 슐로이츠에게서 시선을 조금도 거두지 못할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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