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반역 가문의 새 가주-(3) (24/190)

소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이대가 비슷한 소년이라, 오늘 함께 데뷔연을 맞는 이였고 나는 가신의 후예들과 춤을 춰 줘야 했다. 꼭 의무까진 아니더라도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호의라고 배웠고….

나는 소년에게 에스코트를 받아 걸어가면서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슐로이츠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턱을 가볍게 기울였다. 나는 움찔 놀라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올려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스르륵 앞을 보았다.

‘확실히… 눈 보이는 건 맞나 보다.’

와중에도 그 사실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곡을 추고 돌아왔을 때 슐로이츠는 자리에 없었다.

근처 영애들 말을 엿들어 보니, 그 이후 슐로이츠는 국왕에게 부름을 받아 몇 가지 대화를 한 후 미련 없이 퇴장했다고 했다. 아쉬워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엔리케 시에도 영애가 없는 걸 확인했나 봐.’

그럼 정말로 과거의 내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이 먼 왕도까지 온 건가?

나는 약간 식은땀이 났다. 한편으로는 슐로이츠가 없다고 생각하니, 목 아래까지 뻣뻣하게 만들던 긴장이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목이 말랐다.

나는 지나가는 사용인에게 시원한 주스를 한 잔 받아 건조한 목을 축였다. 슬슬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생겼다.

데뷔연의 소녀들은 다들 하얗거나 노란색이거나 연분홍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정말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요정들이 까르르 웃는 것 같아 심신이 좀 편해졌다. 한 명씩 둘러보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티타니아 로시에네.’

오늘은 그녀의 데뷔연이기도 했다. 화려한 미인을 보면 장미 한 송이가 개화했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티타니아는 장미 다발이 개화한 것 같았다. 붉은색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동자가 어찌나 화려하게 빛나는지.

‘근데 왜 혼자 있지?’

희한한 일이었다. 로시에는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 중 하나였다. 같은 탑의 가문이어도 급이 있는 법인데, 로시에는 최상단에 위치한 7개 가문 중 하나로, 흔히 ‘7개 가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가문이었다.

르페브르 바로 아래에 위치한, 최상위급 가문들.

덕분에 티타니아는 어릴 적부터 사교계에서 제법 난다 긴다 했다. 비록 양녀라지만, 로시에 가문을 비롯한 7개 가문은 딸이 귀해서 티타니아 또래의 여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티타니아 로시에가 혼자 있는 모습이 내겐 퍽 이상하게 느껴졌다. 본래라면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소설 속에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묘사됐는데.

왜 혼자 둥둥 떠 있지?

‘설마 원작에 없는 내가 나타나서…!’

…일 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도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소녀들이 나를 보고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소녀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는 있지만 그 무리에 속해 있지는 못하는 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물론 그다지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그런 게 신경이 쓰였으면 나는 어릴 적부터 사교 활동을 열심히 했을 것이다. 내가 열심히 매진하지 않은 분야가 미진하다고 이제 와 아쉬워할 이유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냥 ‘왜 그 대박 악역 티타니아가 혼자 있을까?’ 하는 생각이나 곱씹으며 주스나 홀짝였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어쩐지 티타니아가 점점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안녕하세요.”

“안녕. 영애.”

진짜였다. 나는 뺨이 가볍게 굳어 있는 티타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날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실례지만, 왜 혼자 계시죠?”

내가 묻고 싶은 걸 먼저 물어 줄 줄이야.

그나저나 왜 저렇게 가시를 세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얘가 견제한 건 여주인공 하나뿐이지 않나? 나를 견제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물론 작중에서와 달리, 로시에보다 높은 가문 중 유일한 여식이 나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러는 영애는 왜 혼자 있지?”

“절 놀리시나요? 영애 때문이잖아요.”

“나? 내가 뭘 어쨌는데?”

티타니아의 눈동자가 정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크게 벌어졌다. 작은 손은 이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영애가 저를 공식 석상에서 크게 무시하셨잖아요.”

“……?”

아니 내가 널 지금 만나는 게 몇 년 만인데… 싶던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설마 몇 년 전 왕실 연회를 말하는 거야?”

“…….”

맞나 보네.

기가 막힌 한편, 천천히 이해가 가기는 했다.

그때 그 왕실 연회엔 우리 같은 또래가 아주 적게 참여하긴 했지만, 일단 왕실 연회이긴 했다. 그래서 지금 참석한 소녀들의 어머니나 이모, 또는 샤프롱들이 대거 참석했었다.

내가 티타니아에게 한마디 대답하고 고갤 돌린 걸, 집에 가서 한마디씩 흘려 놓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몇 년 전인데 아직도….

‘설마 내가 안 나오는 사이 계속 이랬나?’

그건 좀.

난 원래 사교계와 거리가 멀었다.

결혼 상대 찾을 생각?

없다.

사교계를 통해 입지를 다질 이유?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기사단장 발록 경의 지옥 같은 훈련을 버텨 내느라 사교계에 할애할 물리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런데 나한테도 아무도 안 오잖아.”

“당연하죠. 영애가 한 번도 안 웃으시니까요. 다들 겁을 먹고 눈치를 보고 있는 거잖아요. 작은 미소 한 번만으로도 몇 분 후면 여기 있는 소녀들 전부가 인사를 걸려고 올걸요.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 도대체 왜 안 웃으시죠?”

그야 내가 슐로이츠 때문에 몹시 긴장해 있으니까….

“그냥 웃고 싶지 않아서 안 웃은 거야.”

“부러워라.”

티타니아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는 전전긍긍하는데 누구는 그저 기분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자리라니요.”

나는 날 선 눈빛의 티타니아에게 말했다.

“그게 내 탓이야?”

“…….”

순간 나를 쳐다보는 티타니아의 표정이 변했다. 나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공식 악역이라 표정이 남다르다.’

독기가 차오른 표정. 여주인공을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고 나중엔 남주인공도 가리지 않고 괴롭히던 매운맛의 악역. 군부에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슐로이츠가 서늘한 얼굴로 추방을 명한 애였다.

아직은 어려서 날 노려보는 정도로 끝낼 것 같은데, 혹시 나 때문에 더 심하게 흑화해서 군부에서 더더욱 심각한 사건을 일으키면 어떡하지? 원작은 처음 시작한 이후 오직 슐로이츠에게만 복종하는 집단으로 나오는데.

슐로이츠가 죽고 난 후에도 군부는 한동안 그의 빈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군부에 있었던 모든 사건의 총책임자도 일단은 슐로이츠라는 소리였다.

뭐 일단… 달래라도 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당신은 친딸이잖아요.”

하나 내가 간과한 게 있다면…. 얘가 오늘 막 데뷔연을 치른 어린 소녀라는 사실이었다.

‘아이고야.’

분명히 가슴에 계속 맴돌다가, 툭 하고 나와 버린 말일 터였다. 당황해서 입을 꾹 다무는 티타니아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얘 흑화하기 전이구나.’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 티타니아 로시에는 흑화를 하는 명확한 사유가 있었다. 생긴 건 저래도 가문에서 친딸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몹시 강한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굳이 군부에 잠깐 입단도 하지.’

겉치레적인 행동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 강한 인정 욕구 때문에, 가문의 자식이 해야 할 일은 거의 다 한다. 예컨대 영지 변방을 정기적으로 순찰하는 일이라든지.

거기서 하필 괴수 떼가 들이닥쳐, 티타니아가 며칠 혼자 고립되는 일이 있었다. 이때 함께 간 아버지가 자신을 놓친 것 때문에 티타니아는 두고두고 앙심을 품고 흑화를 한다. 자기가 양녀여서 아버지가 자신을 잡지 않은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기야 어린애가 혼자서 괴수들이 들끓는 산에서 며칠을 살았으니.’

안 미친 게 용한….

아니 나중에 여주한테 하는 걸 보면 미친개 같기는 했다.

원작에서도 다 함께 입을 다물지 못하던 장면이 있었다.

티타니아 로시에는 ‘진짜’를 증오하는 게 틀림없었다. 무람없는 태도며 가슴까지 저미게 만드는 차가운 눈빛. 팽팽히 당겨진 악의가 버티기 어려웠다. 군부에서조차 이렇게 잔인한 사람은 없었다. 혀 안에 독이 고여도 이보다 쓰진 않으리라.

“늦게 들어온 주제에 세상이 다 네 것 같지?”

“언니야말로.”

물빛 새틴을 덧댄 티타니아의 구둣발 아래, 하녀의 잘린 두 손과 뽑힌 눈알이 쓰레기처럼 짓밟혔다. 끔찍한 소리가 났다. 루리의 눈시울이 새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이었다.

“내 대용품이었던 주제에.”

‘역시 작품이 매웠어.’

물론 작중에서 여주가 티타니아에게 저렇게까지 말한 이유가 있었다. 티타니아가 가문으로 돌아온 여주를 괴롭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여주를 아껴 주고 챙겨 주는 하녀에게 꼬투리를 잡은 후, 벌이랍시고 두 손을 자르고 눈까지 뽑아 버렸으니….

그 전엔 티타니아도 사연이 있다며 옹호하던 소수의 팬들도 저 에피소드 이후로는 자취를 감춘다.

‘보니까 사교계에서 꽤 오래 고립된 것 같은데.’

나야 사교계에 잘 안 나오니까 전혀 몰랐지. 쪼끄만 게 티 나지 않게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는 걸 보니 마음도 영 불편했다.

‘그만 울어… 좀….’

나는 아이가 나 때문에 우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라고. 더 이상 아이를 울리고 싶지 않단 말이야…! 어떻게 나랑 관련된 원작 인물들은 다 한 번씩 우는 것 같지? 그런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한심했다. 소리를 내어 티타니아를 달래 줄 수도 없었다. 이런 성격은 한번 자존심이 상하면 끝도 없이 가시를 세우게 되니까.

심지어….

티타니아의 표정에 어린 독기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고, 느낌이 왔다.

얘 진짜 크게 흑화하겠네. 원작에서보다 더할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슐로이츠의 군부에 어마어마한 폭탄을 떨어뜨리게 되는 거 아닐까?

“…….”

결국 그날 밤.

데뷔연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티타니아에게 소포 하나를 보내기로 결정한다.

“아버지.”

엔리코르는 아버지인 레너드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불쑥 물었다.

“블란이 말이에요. 티타니아 영애와 교분이 두터웠나요?”

“……?”

엔리코르의 말에 레너드가 눈을 깜빡였다.

“엔리. 블란은 크게 교류하는 영애가 없단다. 밖에선 잘 웃지도 않아.”

“그렇지요?”

“그래.”

“그나마 집에선 웃어서 다행이네요.”

“아비도 그리 생각한단다.”

블란데아는 특이했다. 어릴 때부터 달콤한 과자도 잘 먹지 못했고, 부드러운 이불도 잘 덮지 못했다. 심지어 음식도 입에 잘 넣질 못했다. 한 번은 진지하게 주치의에게 상담을 받게 했는데, 죄책감이 심해 나오는 행동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나마 악몽을 꾸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덜해지니 불행 중 다행이었고.

르페브르 가문의 기사단장인 발록에게 죽음에 가까운 특훈을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받더니 식사는 슬슬 제대로 하기 시작했지만.

죄책감.

레너드는 잠시, 아내인 아네사와의 대화를 반추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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