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뷔연.
16살을 넘긴 영애나 공자들이 사교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덜덜 떨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슐로이츠가 올 수도 있다니….
며칠간 잠을 잤다 하면 악몽을 꾸면서 깼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이런 날이 며칠 반복되니 아무리 발록 경의 지옥 훈련으로 강해진 나라고 해도 버티기 힘들었다.
결국은 잠이 오는 허브차를 몇 잔이나 마시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며칠 제대로 못 잔 대가로 하루의 절반을 아예 기절해 버려 당일 컨디션은 또 놀랍도록 좋았다. 역시 세상은 모순덩어리였다.
“아가씨.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너무 사랑스러우셔요.”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원피스에 가까운 하얀색의 청순한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은 확실히 귀여웠다. 머리 위에는 데뷔연을 맞는 소녀 영애들이 으레 쓰는 화관을 썼다. 진짜 꽃은 아니고 오밀조밀 엮은 모조 꽃에 작은 보석들을 달아 두어 꼭 요정 같았다.
나는 누가 봐도 건강해 보이는 내 모습을 보며 점차 안정을 되찾고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래. 내가 슐로이츠랑 길게 마주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나마 가문 때문에 서로 묵례나 하려나?
슐로이츠는 내 얼굴을 전혀 모를 테니까, 남는 건 목소리 정도인가? 슐로이츠를 일곱 살 때 만나서 다행이었다. 그때는 아기처럼 앳된 목소리였고, 지금은 아주 다르니까.
그러니 중요한 건 향기 정도인데….
나는 그 암흑 지구에서 돌아온 이후 그간 쓰던 모든 입욕제를 다시는 쓰지 않았다. 오늘 내 몸에서 나는 향기도 몇 달 전 하녀들이 새로 개발한 은은한 입욕제에서 나는 향이었다. 그러니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르페브르 영애.”
나는 눈을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내 바로 앞에 선 슐로이츠를 올려다보았다.
***
그러니까, 점심때만 해도 아무 문제 없었다.
오랜만에 입장하게 된 왕궁의 대연회홀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 아이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말이 아이들이지, 오늘 데뷔연을 맞는 소녀들과 소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나는 기둥 한구석에 처박힌 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슐로이츠가 날 알아볼 가능성은 없겠지?’
하녀들이 열심히 빗고 예쁘게 땋아 준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리게 된다. 머리카락이 짙은 금발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어릴 적 회색에 가까웠던 금발은 어딜 봐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물론 슐로이츠는 내 머리색 따위 알지도 못하겠지만….
내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국왕과 왕비의 입장을 알렸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막내 공주님을 데려왔네요?”
“…뭐죠?”
나는 눈을 깜빡였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처럼, 왕비 뒤를 따라 예쁘게 차려입은 막내 공주가 들어서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국왕과 왕비 사이에는 아이가 많았다. 왕자 둘에 공주 셋. 작중에서도 막 혼인을 하고 몇 년 동안에는 사이가 괜찮았던 걸로 나오니까.
하지만 전부 데뷔연을 따로 치렀다. 왕족들은 데뷔연을 따로 마련해 여니까.
모두가 공주를 흘긋거리고 있을 때, 문 쪽에서 또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다고 하던가? 나는 어쩐지 목구멍이 확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대로 굳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년과 청년 사이의 미묘한 경계.
왼쪽 가슴 위에 달고 있는 붉은 꽃…. 데뷔연을 맞은 영애들이 화관을 쓰듯이, 데뷔연에 참석하는 공자들은 가슴에 주먹만 한 꽃 장식을 순은 핀으로 장식한다. 수두룩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그가 망막에 새겨진다.
슐로이츠였다.
“프로키온 가주네요.”
“세상에. 온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진짜일 줄은….”
“가주로서 데뷔연에 참석하는 경우가 정말 희귀한데 말이죠. 보통 이렇게 이른 나이에 가주가 되지는 않으니까요.”
얼음장처럼 굳어 있는 내 경우가 오히려 별거 아니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죄 슐로이츠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나는 얼어붙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금의 슐로이츠는 앞이 보이는 상태겠지?
앞이 보이지 않으면 그 군부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만, 그는 예전에 눈이 완전히 멀었을 때조차 기사들을 속여 버리던 대단한 소년이었다. 혹 지금 남들을 속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이지만 스쳐 갈 수밖에 없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적당한 곳에 멈춰 선 슐로이츠는 그대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흘긋흘긋 훔쳐보고 있었기에, 슐로이츠의 시선은 오히려 느긋하게까지 느껴졌다.
슐로이츠와 눈이 마주칠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했나. 나는 거울을 보며 몇 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시선이 훑고 지나간 곳마다 여러 의미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특히 내가 서 있는, 또래의 영애들 쪽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의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해는 했다.
키는 훌쩍 컸고, 예전의 그 앙칼진 아기 고양이 같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푸른 눈이라든지 특유의 서늘한 삼백안은 그대로였다. 슐로이츠는 정말이지 말문이 막힐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한 명의 거물이 들어왔다는 것 외에는 데뷔연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아마도…. 그러니까 춤곡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프로키온 공.”
슐로이츠를 환영해 마지않는다는 티를 내던 국왕이 입을 열었다.
“이스 공주와 첫 춤을 추지 않겠나?”
나이 있는 귀족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굳이 막내 공주를 귀족들의 데뷔연에 데려온 이유가 뻔했으니까. 작중에서도 그래, 왕실은 끊임없이 슐로이츠에게 공주들을 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공주가 아니라 공주‘들’ 말이다.
‘아직 공주들까지는 아닌가 보군.’
나중에 슐로이츠가 군부에 다시없을 공적을 세우고 나면 공주들 전부랑 결혼시키려고 난리일 것이다. 지금은 막내 공주하고만 결혼을 시키고 싶은 모양이고.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 슐로이츠는 끊임없이 오는 왕비의 중매 제안에도 한 번도 답을 하지 않은 걸로 서술된다. 그나마도 스쳐 지나가듯 적힌 한 줄이었지만. 그때엔 아마 본인의 몸 상태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현재의 슐로이츠는 전혀 약에 중독되지 않은 건강한 상태인데. 슐로이츠가 공주와 첫 춤을 추면…. 나는 글쎄. 누구와 첫 춤을 출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나왔다. 아마 르페브르의 휘하 가문 중에서 오늘 데뷔연에 참여한 공자 중 누군가의 손을 잡지 않을까 싶었다.
“국왕 전하.”
그때 한 귀족이 나섰다.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외람되오나 이스 공주님은 이미 데뷔연을 치르셨잖습니까?”
“흠?”
“프로키온 공의 첫 데뷔연인데, 마땅히 데뷔연의 의례를 따르는 게 더 좋은 광경이지 않겠습니까?”
국왕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저 말은 뜻, 슐로이츠도 데뷔연을 치르는 영애와 춤을 추게 하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저런. 아란웬 공이 화가 많이 났나 봐요.”
귀부인 한 명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소곤거리는 말에 나는 그제야 이해를 했다.
‘아란웬 공…. 저 사람이구나.’
알지, 알아.
막내 공주가 데뷔연을 치를 때, 저 아란웬 가문의 후계자와 첫 춤을 췄었다. 그 춤을 위해서 아란웬 가문의 후계자는 데뷔연도 포기하고 공주가 데뷔연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는 걸로도 유명한데….
물밑에서는 막내 공주와 저 아란웬 가문의 후계자 간의 혼사가 거론되고 있다고 어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국왕이 슐로이츠에게 노골적으로 첫 춤을 권하니 열이 받을 만도 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군. 그럼 공의 생각에, 프로키온 공과 첫 춤을 출 소녀는 누가 좋겠나?”
역시 국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국왕이 직접 막내 공주와의 춤을 권하다가 무산이 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프로키온 공이 제 여식과 춤을 추면 참 좋겠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귀족이 어디 있겠냐는 말이다.
하지만 아란웬 공도 내가 알기론 딸이 따로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아란웬 공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역시….”
“……?”
“르페브르 영애가 어떠실까요.”
미쳤어요?
굳어 버리는 것도 찰나였다.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려서 나는 일단 가볍게 놀란 표정 정도를 자아내느라 애썼다. 반투명한 장미 무늬 레이스 자락이 드리워진 손은 이제 시체처럼 식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란웬 공이 나를 보는 표정엔 따뜻한 호감이 가득하니 모순이 따로 없었다.
아란웬 공이 말을 이었다.
“마침 르페브르 영애도 오늘 데뷔연을 치르시잖습니까.”
“…….”
“이리 아름다운 우연이 어디 있습니까? 소신은 소싯적의 낭만마저 느껴집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계시는 게 보였다. 엔리코르는 팔짱을 낀 채 슐로이츠를 살피는 기색이었고.
거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지.
더군다나 르페브르는 다른 귀족들과 궤가 조금 달랐다.
이 라자크 왕국에는 총 네 개의 세력이 거대한 기둥처럼 각기 존재하고 있었다. 왕당파, 귀족파, 군부. 그리고 르페브르.
이 말인즉슨 르페브르는 귀족파도 왕당파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고고하고 드높은 위치 탓인지, 직계들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특유의 능력 탓인지.
르페브르는 대대로 철저한 중립이었다. 아란웬 공이 굳이 슐로이츠의 첫 춤 상대로 나를 언급한 이유도, 르페브르의 중립적인 위치 때문일 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나는 슐로이츠의 시선이 내게 꽂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당황해 있는지라 한 박자 늦게 알았으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먼저 알았다는 소리였다.
“프로키온 공만 좋다면, 르페브르 영애와 춤을 추는 것도 좋아 보이는군요.”
왕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손이 얼어붙은 와중에도 선수를 제대로 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슐로이츠가 나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는 데다 공주를 선택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먼저 선심을 쓴다는 듯 얘기를 하는 화술이 참 대단했다.
지금 너무 떠는 티를 낸다면…. 슐로이츠가 날 의심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나는 정말 난감한 미소만 지었다. 데뷔연 자리에서 갑자기 시선이 죄 쏠려 당황한 어린 귀족 아가씨처럼. 남들이 내 손의 온도까지는 알 수 없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그리고 슐로이츠도.
나는 내가 어릴 때 입을 맞췄던 소년을 보았다.
그는 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연회장에서 아직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슐로이츠가 겁을 먹어 입을 다물고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슐로이츠는 주변의 분위기에 떠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릴 때에도, 눈이 보이지 않을 때도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겠지.
그래서 나는….
슐로이츠가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가 죄 없어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소녀와 첫 춤을 원하나 싶었지만, 헛된 희망이었다. 슐로이츠의 시선은 내게 박혀 있었다.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을 만큼 명확했다.
시선은 변치 않는다. 슐로이츠는 내 앞에 멈춰 섰다.
“르페브르 영애.”
나를 지칭했을 뿐, 슐로이츠는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춤을 청하며 하는 의례적인 인사도, 달콤한 언사도 없었다. 다만 손을 내밀었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와중에도 떨리지 않게, 나는 온 심력을 기울이며 슐로이츠의 손을 잡았다.
그 몇 년간 그는 많이 자라 있었다.
다만…. 근사한 이목구비에는 그럼에도 소년의 앳된 티가 조금씩 묻어나고 있었다. 묘하게 곤두서 있는 눈빛이며, 굳은살이 지난하게도 박인 손바닥이 나를 슬프게 만들 뿐이었지.
나는 일부러 수줍은 눈빛과 어색한 미소를 그려 내며 말했다.
“플로어로 가실까요?”
사람들은 홍해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나는 슐로이츠의 손을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궁중 사용인들이 며칠을 공들여 길을 들였을 댄스 플로어는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신분이 너무 높았고 그는 명성이 너무 높았기에, 우리가 선 곳도 당연히 플로어의 중앙이었다.
눈 몇 번 깜빡할 사이, 우리의 주변은 요정 같은 차림새의 어린 귀족들로 가득 찼다. 달콤한 선율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나는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잡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슐로이츠 역시 한쪽 손을 가슴 위에 얹은 채 내게 인사했다. 그 인사가 너무 정중해서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현악기들이 내달리기 시작하며 나는 다시 슐로이츠에게 손이 잡혔다. 그는 내내 무표정한 얼굴이었기에, 나는 슐로이츠의 기분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슐로이츠가 입을 열었다.
“르페브르 영애.”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덜컹거렸다. 자란 건 외양뿐만이 아닌 듯, 그의 목소리도 많이 낮아져 있었다.
“영애는 여기에 혼자 왔나?”
“아뇨, 가족들과 왔습니다.”
“아니.”
슐로이츠가 물었다.
“휘하 가신들은 같이 오지 않았냐는 말이야.”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물론 르페브르에는 휘하 가신들이 많다. 하지만 슐로이츠가 굳이 물어볼 만한 휘하 가문이라면 하나뿐이지 않겠는가.
시에도 가문.
“세 가문이 함께 더 오긴 했습니다. 엘리너, 온슬로, 보헤미아.”
“그렇군.”
슐로이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가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르페브르 가문의 영애이기만 했으면 정말로 그가 춤추는 파트너에 대한 예의로 적당한 화제를 가져와 물은 거라고 착각했을 법한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슐로이츠는 시에도가 르페브르 휘하 가문인 걸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제야 슐로이츠가 아까부터 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서 시에도의 행방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시에도 가문은 원래도 정계나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조용한 가문이었다.
몇 년 전, 왕도 사교계에서 슐로이츠의 계모와 부딪힌 것도 몹시 희귀한 일이었다. 이후 그들의 뜻에 따라 르페브르 영지 내 깊은 시골로 아예 칩거했다는 걸로 알고 있었다.
슐로이츠는 대연회홀에 둘러서며 이미 한번 둘러 봤겠지. ‘그’ 시에도 영애를 찾기 위해서.
하지만 있을 리 없는 인물이다. 거기다가 대연회홀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니, 다시 내게 물어 확인을 받으려 한 것 같았다.
마침 파트너와 잠깐 떨어지는 부분이었다. 나는 춤의 호흡을 이렇게 개발해 준 선대의 예술가들에게 깊은 감사 인사를 바쳤다. 그게 아니었으면 손에 갑자기 식은땀이 배어나는 걸 변명도 못 했을 테니까.
첫 번째 음악이 끝난 건 그즈음이었다.
나는 내내 슐로이츠가 나를 과거의 그 시에도 영애와 겹쳐 보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절대 굳어 있는 티를 내선 안 됐다. 한마디도 못 하고 벌벌 떨고 있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춤을 잘 추시네요.”
해서 꺼낸 말이 칭찬이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슐로이츠는 내 예상보다 춤을 너무 잘 췄다. 물론 그는 명문가의 가주이지만…. 군부에서 반평생을 살아남느라 춤은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만 연습했어.”
대답은 그가 내내 짓고 있던 표정처럼 무심했지만 예의에 어긋나지도 않았다. 같은 파트너와 두 번 연달아 춤을 출 수는 없는 게 관례였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각자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다만 나와 슐로이츠에게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는 기둥을 등지고 서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아무에게도 춤 신청을 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풀풀 묻어났다.
나도 그렇게 가만히 서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젠장.
“저,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아, 응.”
아까 슐로이츠에게 말했던, 르페브르 휘하 가문 중 한 가문의 소년이 다가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데뷔 축하해.”
“영애도 축하드려요…! 제게 춤 한 곡의 영광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