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루리는, 갓난아기일 시절 영지에서 친어머니와 함께 괴수의 전란에 휩싸여 실종된 로시에 가문의 딸이었다.
천재 평민 고아에서, 명문 귀족가의 잃어버렸던 딸로 고속 신분 상승을 한 루리는 화려하게 왕도로 귀환한다.
그때 왕도에서 사사건건 루리를 괴롭히는 게 바로 저 티타니아였다.
티타니아는 마찬가지로 괴수로 인해 가족들을 몽땅 잃은 고아였다. 하지만 여주인공, 루리와 나이와 생일이 똑같다는 이유로 여주의 아빠가 잃어버린 딸을 대신해 양녀로 입양을 한다.
돌아온 여주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말도 못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왕도가 뒤집어질 만한 어마어마한 사건을 일으키고 결국 죽는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보니까 떡잎부터 다르긴 하네.’
저거 저거 데뷔연도 치르지 않은 게 어찌나 당돌한지.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나를 소개해 주지 않았는데, 당당히 내게 와서 말을 거는 저 모습을 봐라.
물론 둘 다 어려서 사교계의 엄격한 예법에서 좀 자유롭긴 했지만….
나는 커다랗고 화려한 보석 꽃 장식을 달고 있는 티타니아의 붉은 머리카락에 시선을 잠깐 주었다가 거뒀다.
그때였다. 입구 쪽에서부터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물론 연회는 원래 시끄러웠지만 그것과는 조금 결이 다른 시끄러움이었다.
‘어….’
소란의 근원지로 시선을 옮긴 내가 이마를 홱 찌푸렸다. 한 귀족 부부가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 나이대이긴 한 제법 젊은 부부였는데….
누군가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프로키온 가주네요.”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슐로이츠의 친부? 그럼 옆에 있는 여자는….
“정부도 같이 왔네요.”
누군가 풉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맵다…!’
정부라니!
하지만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뭐, 귀족들은 교양을 지키지 않는 쪽을 경멸하니까. 그냥 정부를 두는 것도 좋은 시선을 못 받는데, 그 대단한 사랑이 뭐라고 함께 살던 아내와 이혼하고 새로 재혼까지 한 저쪽 부부에게 좋은 말이 나오겠는가.
명문가였던 프로키온 가문의 평판이 바닥에 주저앉은 시발점이기도 했고.
“왕비님한테 반지도 하사받지 못한 부부가 여기까진 무슨 낯짝으로 온 거지?”
한 신사가 중얼거렸다. 왕도의 모든 레이디들은 결혼을 하면 왕비에게서 축하의 선물로 반지를 한 점 하사받았다. 정당한 결혼이며 왕실이 축복한다는 뜻인데, 저런 결혼을 왕비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축복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한마디로 말해 엄청난 불명예였다. 반쪽짜리 결혼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몇몇은 프로키온 가문에는 안주인이 없다고 얘기하기까지 했다.
‘슐로이츠한테 나란히 독을 먹인 인간들이지.’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희대의 불륜 커플을 살폈다. 좀 더 시선이 간 건 당연히 슐로이츠의 친부였다. 그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였다. 무의식적으로 그에게서 슐로이츠의 얼굴을 찾아보려던 난 오래지 않아 포기했다.
‘닮은 구석이 별로 없네.’
비슷한 건 그저 머리 색이 짙다는 정도일까. 슐로이츠는 어머니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게 훨씬 낫지.
이미 내 안에 좋지 않은 인상이라 그런지, 마뜩잖기도 했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입장한 두 부부에게 어머니 역시 잠깐 눈길을 주었다.
그랬는데….
‘왜 이쪽으로 오지?’
슐로이츠의 친부는 그의 아내를 대동한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쪽에 있는, 아니 이 연회장을 통틀어 가장 신분 높은 귀부인이 어머니이기 때문에 오는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르페브르 부인. 오랜만에 인사드리는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프로키온 가주는 어머니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네요. 프로키온 공.”
어머니는 그렇게 짧은 인사를 돌려주고 아주 겉치레라는 티가 폴폴 나는 미소를 지으셨다. 슐로이츠의 친부에게만 인사를 돌려주었을 뿐이지 그 옆에 있는 여자에게는 신경도 안 쓰겠다는 듯 완벽한 무시였다.
“…….”
슐로이츠의 계모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빛이 초조해졌으나 어머니는 눈도 깜빡이지 않으셨다.
결국 슐로이츠의 친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부인.”
어머니는 아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연회장에서 상대방에게 보낼 수 있는 분명한 경멸의 표시였다. 친부의 낯이 살짝 굳었지만 어머니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부채를 가볍게 펄럭였다.
“…그럼.”
슐로이츠의 친부가 먼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멀어지든 말든 어머니는 그저 고고하게 있었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속삭였다.
“좀 마음에 드니, 아가?”
“엄청요…!”
내가 속닥이자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내 손을 꽉 붙든 후 다시 숙였던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정말 왜 온 거지?”
어머니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귀에 스친 때. 나팔 소리가 들렸다. 국왕이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귀족들이 황급히 놀라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모두 고개를 들라.”
국왕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나 역시 적당히 시간을 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국왕은 높은 단 위에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비 털이 붙은 붉은색의 고급스러운 망토를 두르고 있다는 정도만 보였다.
“오늘은 짐이 직접 치하할 가문이 있어서 친히 발걸음하였소, 프로키온 공. 이리로 올라오시오.”
온화한 목소리였다. 국왕의 ‘치하’라는 말에 사람들이 낮게 웅성거렸다. 프로키온의 가주가 무슨 공적이라도 세웠다는 건가? 귀족들의 시선이 죄 프로키온 부부에게 쏠렸다. 그들 역시 조금 당황한 낯이었다.
슐로이츠의 친부가 국왕이 있는 단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샹들리에의 빛은 밝고, 내 작은 키로 국왕이 있는 곳은 너무 높아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국왕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프로키온 공.”
“예, 국왕 전하.”
“공은 죗값을 치러라.”
“……?”
순간 비명 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덜컥거리는 날붙이 소리와 함께, 근위대가 연회장으로 쏟아진 것이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아 홱 치마 뒤로 보냈다. 시야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국왕 전하!”
순식간에 근위대들에게 결박당한 슐로이츠의 친부가 아연한 얼굴로 소리쳤다.
“전하!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씀입니까!”
“심판자들을 매수해 성검 발현의 결과를 조작하려 하고, 사사로이 영지에 사병을 키운 것을 짐이 모를 줄 알았더냐?”
“……!”
“……!”
순간 귀족들에게 한 차례 충격의 파도가 스쳐 지나갔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국의 안전을 위협하고 왕실에 반기를 든 죄. 프로키온의 죄는 엄중하게 처리할 것이다. 끌고 가라.”
“국왕 전하!”
순식간이었다. 프로키온 부부가 근위대에게 질질 끌려가고 연회장에는 순식간에 벌 떼에 쏘인 듯 소란스러워졌다.
“심판자들을 매수했다니, 그 말은….”
“알 만하네요. 정부 사이에서 난 둘째가 이번 테스트에서 성검을 70개를 발현시켰다고 그러던데 조작이었나 봐요.”
“조작까지 할 정도면 성검의 능력이 전무했던 모양이에요.”
“세상에… 지금 조작해 봤자 나중에 어차피 들키잖아요.”
귀부인 한 명이 목소리를 줄였다.
“그러니까 사병을 몰래 키웠다는 거겠죠. 검의 명가 가문에서 검파자의 재능이 전무한 직계라뇨. 가주 자리를 이어받을 수 없는 걸 아니까, 사병을 키워서 기회를 잡으려던 속셈이었던 게 틀림없어요.”
“게다가 왕비 전하가 프로키온의 정부와 사생아를 오죽 싫어하시던가요? 이판사판인가 싶었나 봅니다.”
어머니 곁에 있던 귀부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
“어쩐지 왕비님이 주최하신 연회에 프로키온 부부가 와서 이상하다 싶었더니…. 왕비님이 일부러 초청장을 보내셨나 봐요. 영지에 있으면 체포가 어려우니까요.”
“설마 왕비님이 직접 초청장을 보내셨겠어요?”
“아닐까요?”
“아니죠. 왕비님은 본인 파티에 이런 소란이 일어나는 걸 좋아할 분이 아니잖아요? 국왕 전하가 몰래 초대장을 가져가 보내셨겠지요.”
“저런. 한동안 왕궁 분위기가 얼어붙겠어요.”
나는 어머니의 손을 붙든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슐로이츠의 가문이 이런 식으로 몰락하는 거구나.’
원작에선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몰랐네.
그나마 나온 거라고는 프로키온이 큰 죄를 지었으나, 원체 정통성이 있는 가문이니 국왕이 성을 회수하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고 슐로이츠가 군부에서 엄청난 공적들을 쌓아 반쯤 버려진 가문을 되찾고 새로운 가주가 된다는 것 정도만 서술되어 있었다.
‘…슐로이츠는 언제쯤 듣게 되는 거지?’
차라리 평범한 반역이나 꾸민 거라면 모르겠는데, 고작 둘째한테 가문이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음모를 꾸미다가 이렇게 풍비박산이 났다니….
슐로이츠가 그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군부는 왕도와 거리가 먼 곳이라. 확실히는 알 수 없었지만….
부디 슐로이츠가 많은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