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왕도-(4) (19/190)

“아가씨. 마님이 부르세요.”

어머니가 날 부른 건 얼마 후였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머니는 정원 시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정원에서 키우던 나무 중 하나가 병이 걸렸는데, 전염력이 강해 죄 뽑아 버렸다고 한다. 역시 소설 속 대귀족 가문의 안주인은 커다란 정원 때문에 한 번쯤 골머리를 앓는 게 필수 코스인 모양이다.

“블란, 왔니? 이리 오렴.”

“네에.”

날 본 어머니는 집사에게 시안을 넘겨주고 어서 안기라는 듯 두 팔을 벌렸다. 나는 후다닥 뛰어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어머니한테 보이는 나름의 애교였다. 어머니는 이럴 때마다 빙긋 웃으면서 날 꼭 껴안곤 했으니까. 물론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육체의 나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요즘은 제법 애 같단 말이지.’

그래서인지 어머니나 아버지의 품이 굉장히 좋았다.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을 상냥한 손길로 넘겨 주며 말했다.

“이젠 네 아버지와 머리색이 비슷해지는구나. 엔리랑도 닮았고. 우리 아가가 안색도 많이 좋아졌어.”

내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내 외형에 대해서 얘기하던 어머니가 물었다.

“블란, 엄마랑 같이 이번 주에 왕궁 연회에 함께 가 보겠니?”

***

하녀들은 촘촘한 빗으로 내 머리카락을 잘 빗겨 주었다.

“아가씨는 아직 데뷔 전이시니까, 관례대로 하얀색이나 파스텔 톤 옷을 입으셔야 해요. 귀여운 봄의 요정처럼 보이게 해 드릴게요.”

그런 말을 하면서 하녀들은 내게 새하얀 원피스를 입혀 주었다. 가슴과 소매 그리고 치마 끝에 퐁실퐁실한 연분홍색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는 인형 옷처럼 아주 사랑스러웠다.

“확실히 많이 건강해지셨어요.”

“맞아요. 머리카락이 이렇게 많이 자랐잖아요?”

하녀들의 말 그대로였다. 색깔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묘하게 잿빛이 드는 죽은 금발이었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햇빛이 산란하는 듯한 금발이었다.

‘더 짙어질 것 같긴 한데.’

만약 자라면서 머리카락 색이 엔리코르만큼 더 짙어진다면, 정말 블란데아라는 이름이랑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녀들은 내 머리를 반만 그러모아 땋았다. 그리고 원피스와 마찬가지로 레이스처럼 예쁘게 주름이 잡힌 커다란 리본을 달아 주었다. 리본의 날개 부분에는 작은 진주가 박혀 무척 고급스러운 느낌이 났다.

연분홍색 구두까지 신은 난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잘하고 올게…!”

“아가씨…!”

“싸우러 가시는 게 아니에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놀다가 오시는 거예요!”

“응…!”

씩씩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아니! 난 알고 있다!

소설에선 사교계가 아주 만만치 않았다고! 여주는 지옥 같다고도 했고!

군부에 입단한 여주지만, 나중에는 왕도의 사교계도 종횡무진하니까!

물론 나는 어머니 뒤에서 얌전히 구경만 하다 올 예정이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사교계에 얼굴 비치는 것도 너무 늦었으니까.’

나는 벌써 열다섯 살이었다. 르페브르는 물론 독보적인 가문이지만, 르페브르 바로 아래의 가문들의 직계들은 늦어도 열두 살이면 부모님이나 샤프롱을 따라 한두 번은 사교계에 얼굴을 보인다.

엔리코르는 르페브르 가문의 후계자이기도 해서, 열 살에 이미 왕도 연회에 따라가 얼굴을 보였다고 했다.

“세상에. 내가 도대체 뭘 낳은 거지? 천사를 낳은 걸까?”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보고 표정이 아주 녹아 내렸다. 그런 달짝지근한 말로 내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신 거라면 성공이었다. 어머니는 직접 내 팔에 예쁜 보석 팔찌를 채워 주었다. 나한테는 조금 커서 두 번을 감아야 했다.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남겨 주신 거야. 우리 딸이 시집갈 때 엄마가 선물로 줄게.”

“안 줘도… 돼요.”

“응? 왜? 안 예쁘니?”

“아니…. 예쁘긴 한데…. 나 결혼은… 안 할 거예요….”

“결혼을 안 하면?”

“저랑 같이… 살아 주세요….”

“엄마랑 살려고?”

“네에.”

그 말에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난 진심이었다. 한 소년에게 그렇게 상처를 줘 놓고 나 혼자 희희낙락 결혼할 수는 없었다. 평생 결혼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엔리코르한테 잘 보여서 분가 하나 받아서 살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농담으로 듣는 모양이었지만.

“가자꾸나, 블란.”

“네…!”

***

“어머.”

“르페브르 가문의 그 둘째인가 봐요.”

“몸이 안 좋다고 그리 오래 칩거하더니…. 확실히 좀 파리하긴 하네요.”

“인사를 할 기회가 있을까요?”

부채나 장갑으로 입을 가린 귀족들이 소곤대는 소리가 은근하게 들렸다. 내 귀에 들릴 정도니 어머니도 분명 들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눈 한 번 꿈쩍하지 않으셨다. 집에서의 상냥하고 다정한 어머니도 좋았지만, 저렇게 차가운 얼음의 화신 같은 표정도 좋았다.

‘역시 왕국 최고는 저런 거구나.’

젊은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반해서 졸졸 쫓아다녔다더니…. 난 마음속으로 깊이 이해했다.

“자, 블란은 주스 마시면서 구경하고 있으렴.”

나는 어머니가 쥐여 주신 주스를 맛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님이 건강이 안 좋으시다지요.”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오늘 연회도 얼굴만 잠깐 비치고 돌아가셨군요.”

나는 최대한 얌전한 표정으로 시끄러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왕실 연회에는 아이들이 거의 오지 못하는 법이었다. 정기적 연회가 아니라 비정기적 연회라 더욱 그랬다. 왕비는 건강이 계속 좋지 않은 인물로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계의 영향력을 생각해 가끔씩 이렇게 불시에 연회를 열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왕실 연회에 참석하고 싶어 하니까, 초대장을 구하기 위해서는 왕비와 가까운 귀부인들에게 비벼야 하는 법이다. 그런 식으로 왕비는 사교계의 평판과 영향력을 유지했다고 소설에서 봤었다.

‘주스 맛있네.’

작은 과육이 씹히는 달콤한 주스를 두 잔은 홀짝였다. 어른 귀족들은 다들 아름답고 값비싼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구경하는 것도 금방 질렸다. 게다가 나는 말 그대로 데뷔 전의 미성숙한 소녀로 취급되어서, 적당히 순진한 척도 해 주어야 했다.

높지 못한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눈이 딱 마주치는 상대가 있었다.

‘어?’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녀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데뷔 전임을 뜻하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소녀는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글이글 노려보는 것 같던 소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영애. 티타니아 로시에입니다.”

“…….”

“…영애?”

“안녕.”

가볍게 대답한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

내가 홱 고개를 돌리자 소녀는 살짝 당황한 듯했다. 아닌 척하면서 우리를 보고 있던 게 분명했던 로시에 가문의 샤프롱이 서둘러 소녀를 데려갔다.

겉으로는 차분한 척 주스를 마시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쟤가 진짜 있네.’

그래. 있어야지.

<미친 미인의 최후>는 기본적으로는 로판 소설이었다. 그러니까 여주가 군부에 입단해 남주와 마주치는 장면으로 모든 게 시작되지.

그리고 방금 내게 아주 당당히 인사를 하고 간 쟤는…. 쉽게 말하면 여주와 대립하는 가장 대표적인 악역이었다.

원작 여주의 이름은 루리 로시에.

그리고 방금 내게 까인 소녀의 이름은 티타니아 로시에.

티타니아는 루리가 사라진 뒤 여주인공의 가문에 입양된 양딸이었다. 원래는 그냥 로시에 가문의 먼 방계인.

<미친 미인의 최후>의 여주, 루리는 처음엔 평민의 신분으로 군부에 들어온다.

원래는 마음씨 좋은 평민 노부부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딸이었는데, 노부부가 괴수에게 참변을 겪고 한순간에 살던 집까지 잃어버린다.

고아가 된 루리는 군부로 들어가게 된다.

기사가 아닌 병사도 군대엔 필요하니까. 하지만 의례적으로 진행하는 성검 테스트에서, 루리는 그야말로 천재적인 재능을 선보인다.

평민 틈 사이로 흘러간 귀족들의 사생아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루리 역시 그런 종류거나, 아니면 고아라더니 윗대에 귀족의 피가 조금은 섞였다거나 하는 등의 얘기로 사람들은 납득한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렇듯 임무를 수행하던 루리는 자신을 붙잡는 중년 귀족 남성을 발견한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루리를 붙잡은 건….

로시에 가문의 가주이자 루리의 친아빠였다.

“…루리?”

“누구신가요?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지요?”

“죽은 게… 죽은 게 아니었느냐? 루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