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왕도-(3) (18/190)

그로부터 몇 주가 흘렀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엔리코르를 보러 갔다.

“엔리이!”

저 멀리서 엔리코르를 부르자 흠칫 어깨를 움츠리는 게 보였다.

‘에구.’

내가 고열을 앓을 때, ‘엔리’라는 이름만 들으면 벌벌 떨었다고 했다. 엔리코르는 자신 때문에 내가 더 아플까 봐 자주 들여다보지도 못했다던데, 제법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쫌 미안한데.’

“왜 벌써 나왔어? 내가 가기로 했잖아.”

“엔리.”

난 엔리코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 이제… 괜찮아.”

“응?”

“이제… 아카데미… 로 돌아가.”

“어… 어?”

원작에서 엔리코르는,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해 버린다. 대신 졸업해서 르페브르 저택에 붙어 있던 인물로 나온다. 당연하지. 여동생이 어릴 적 일찍 죽어 버리고, 부모님이 크게 상심을 해 버리니까 가족의 곁을 지키는 것을 택했다.

특히 어머니가 그때 마음의 병을 크게 얻어 시름시름 앓기까지 했다고 원작에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아주 멀쩡하단 말이지.’

비록 내 몸이 허약해 아직 약을 끊지 못하고 있지만, 사람에게는 직감이라는 게 있다. 난 이제는 병 때문에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의사들이 밤낮으로 잠을 안 자고 의학 연구만 하는지 나날이 건강도 좋아지는 상태였고.

엔리코르는 아카데미의 생활이 그럭저럭 재미있다고 편지에 늘 적곤 했었다. 이 녀석 성격을 보면 아주아주 재밌는데 내가 부러워할까 봐 적당히 재미있다고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원래도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와 있던 엔리코르는, 내가 너무 크게 앓는 바람에 휴학계까지 냈다고 했다. 난 그 사실을 방금 전해 들었다.

그건 좀 아니지.

“집에서 조용히 수련하려고 그러는 거거든.”

“으응.”

몇 번 더 말해서 내일쯤 다시 돌려보내야겠다. 나는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갔다.

“성검… 이네.”

“연습용 시제품이 아니라 진짜 성검이야.”

“알거든.”

탑의 가문으로 총칭되는 왕국의 귀족 가문들은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그래서 연습을 하기 위해 괴수를 사냥할 수는 없는 측정용 성검이 배포되었다.

하지만 르페브르 가문은 귀족 가문 중 유일하게 ‘진짜’ 성검을 가지고 있었다. 왕국 최고의 귀족 가문이라는 설정이 그냥 있는 건 아니랄까?

나는 다짜고짜 성검을 잡진 않았다. 몸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대신 비너스한테 성검을 잡아 보려면 얼마나 건강해져야 하냐고 물어봤다. 비너스는 예의 그 눈이 부신 얼굴로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성검은 처음 사용할 때 온몸의 체력이 빠져나갑니다. 아가씨는 그 경우가 심하셨던 거고, 두 번째부터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잡아 보고 싶으십니까?”

“으응. 잡아 보고… 싶어.”

“그럼 이번엔 공적인 기록도 해 둬야겠습니다. 검의 개수를 기록해 놔야 하거든요.”

난 고개를 끄덕였고, 잠깐 작은 소동이 있었다. 비너스가 기사단장을 불러오고 의사를 불러오고 하녀를 불러온 것이다.

군부에 엄격히 등록을 해야 하는 성검이 르페브르 가문에선 사사로이 잡을 수 있다니. 나는 신기한 기분으로 성검을 쥐었다. 공적인 물건이 아니라 피를 묻혀 주인을 등록할 필요가 없는 성검은 아주 대단한 권력의 상징처럼도 느껴졌다.

역시나 고물 같던 성검은 내가 잡자 천천히 반투명한 그림자 같은 것이 흐릿하게 덧씌워졌다. 그리고 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 괴수를 앞에 두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역시 수십 개의 검들이 세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내 앞에 괴수가 있는 것처럼 내 시선을 따라 칼날들의 위치가 슉슉 바뀌었다.

나는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는 기분으로, 계속 개수가 늘어 가는 검들을 올려다보았다. 끝도 없이 늘어나던 검들을 옆에서 주의 깊은 눈으로 기록하던 기사단장과 또 나름대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검들을 올려다보던 엔리코르가 중얼거렸다.

“89개네.”

“89개군요.”

나는 머리 위에 떠오른 수많은 검들을 바라보며 입을 자그맣게 벌렸다. 비너스가 말했다.

“엔리코르 도련님과 숫자가 같으시군요.”

“와…. 아카데미에서도 나랑 비슷한 애를 본 적이 없는데. 너 뭐냐? 블란아?”

“엔리 동생….”

“흠흠! 그런가! 날 닮아서 그런가!”

난 눈을 깜빡였다. 성검을 내려놓자 환영처럼 떠올라 있던 성검들이 사라졌다. 손아래가 역시나 그날처럼 짜릿했다. 한참 더운 곳에서 자다가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셨을 때처럼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성검의 개수는 거의 타고난다고 하지요. 확실히 르페브르 가문의 피는 어디 가지 않는 모양입니다.”

비너스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비너스도 르페브르의 방계이긴 했다. 나는 대단하다고 연신 칭찬해 주는 하녀에게 수줍게 웃어 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89개라니 신기하다.’

대단하다는 엔리코르 말이 틀리진 않았다.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는 검파자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나왔다. 보통의 귀족들은 평균적으로는 60개의 검을 떠올릴 수 있었다. 70개가 넘어가면 수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80개가 넘어가면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

엔리코르도 천재의 반열에 끼는 조연이었다. 그런데 뭐… 딱히 특별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원작이 시작되는 때. 그러니까 여주가 군부에 입단하면서, 여주의 동기들을 주변으로 하여 작품이 제대로 펼쳐지는데….

‘거긴 천재들이 즐비하니까.’

특히 여주가 형상화할 수 있는 성검의 개수가 무려 98개였다. 남주와 같은 개수이며 남조들보다 많은 숫자. 그것 때문에 얼음처럼 차디차고 약간 상처 입은 짐승 새끼 같기도 한 남주와 남조들이 여주에게 관심을 갖게 되지.

수많은 괴수들을 상대하려면 그 정도 천재들은 한 번에 우르르 등장시켜야 얘기가 진행되니까 이해는 했다.

이쯤 되면 독보적인 천재로 설정이 되어 있던 슐로이츠는 몇 개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는 숫자가 아주 깔끔했다.

200개니까.

역시 한 세계를 아우르는 구국의 영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슐로이츠는 독 때문에 희생되는 세계관 최강자일 뿐 남주는 아니었다.

게다가 남주나 남조들은 계속 구르면서 성장하고. 타고난 재능으로 정해져 있는 검의 개수를 그저 노력만으로 더 숫자를 늘리게 하는 게 정말 힘든 일이라고 했는데도, 남주는 소설 중후반부로 흘러가면서 기어이 100개를 채우는 걸로 나왔다.

‘여주 구하려다가 그러는 거지만.’

보통 남주나 여주가 소설 속 최고가 된다는 걸 생각하면, 마지막엔 슐로이츠의 기록도 깨지 않을까?

그래서 좀 무서웠다. 후반부에 가서 진짜 엄청난 일이 터질 것 같아서.

시련이 있어야 성장한다. 이게 <미친 미인의 최후>를 아우르는 미친 교훈이었다.

‘그렇다고 속 편하게 망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도 사정이 다르지가 않아서 말이지.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엔리코르가 말을 걸었다.

“블란아. 내가 성검 휘두르는 법 알려 줄까?”

“성검… 재미있었어!”

그날 저녁 내 말에 하녀들이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그러세요?”

“성검 개수는 벌써 비너스 경에게 들었답니다. 가주님과 마님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몰라요.”

“응…!”

다음 날, 나는 거의 확고한 결정을 내렸다.

‘역시 정식으로 성검을 잡아 봐야겠어.’

재능이 있는데 썩히는 건 아깝다. 게다가 성검을 잡으면 재밌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기도 했다.

엔리코르는 다음 날도 날 보러 와서 나와 함께 봄꽃이 떨어지는 정원에서 놀다가 밥 시간이 되면 책을 보면서 밥을 먹다가 어머니한테 한 소리를 들었다.

‘저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말이야.’

아카데미가 천직일 엔리코르가 내 건강 상태 때문에 자꾸 저택에 돌아와 눌어붙는 건 절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더 이상은 아끼는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비너스, 있잖아….”

“예, 아가씨.”

“성검을… 잡고 배우면… 좀… 건강해질 수… 있을까?”

“…….”

내 말을 들은 비너스가 순간 굳었다.

“아가씨. 그….”

“아니야? 안 건강해져?”

‘힘을 많이 써야 하니까 오히려 건강이 나빠지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비너스의 눈동자에 어쩐지 서글픈 기색이 스쳤다. 그러니까 굳이 표현을 하자면… 갈 곳이 없어 여기저기 전전하던 어린애가 하루에 빵 한 조각만 먹을 테니 버리지 말아 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는 어른의 표정?

“건강해지실 겁니다.”

“으응.”

“엔리코르 도련님처럼 뛰어다니고 싶으신 거지요?”

“응? 으응.”

“가주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나흘 후.

나는 정식으로 검파자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

“아가씨. 물 다 드셔야지요. 아니면 탈수 증세가 올 수도 있습니다.”

“응…!”

발록 경의 말에 나는 얼른 물을 위장으로 때려 부었다.

발록 경은 르페브르 가문의 기사단장이었다. 처음 검파자로 이름을 올리고부터 3년. 나는 매일매일 연무장에 끌려 다녔다.

성검을 지속적으로 휘두르려면 체력이 필요했고, 난 안 그래도 빈사 상태에서 살짝 벗어난 정도, 그러니까 다른 또래들의 20분의 1 수준의 체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몸으로 잘도 적색 지구를 돌아다녔구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확실히 건강해지기는 했어.’

거울만 봐도 뺨에 혈색이 돌았다. 사실 너무 뛰어서 숨이 차서 피가 쏠린 것도 같았지만 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가씨.”

발록 경은 물을 마시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날 보며 말했다.

“아가씨는 정말 성실하시군요. 어찌 훈련을 한 번도 빼먹지 않으십니까.”

“속죄… 하는 거야….”

발록 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속죄요?”

“그런 게… 있어.”

고개를 갸웃한 발록 경이 내 손에서 물병을 가져갔다.

“그래도 아가씨, 저번처럼 달리다가 기절하시면 안 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미리 말씀을 하셔야 해요.”

“으응.”

“도련님은 맨날 힘들다고 투덜거리셔서 문제였는데 아가씨는 힘들다는 말을 전혀 안 하셔서 문제군요.”

“그럼… 우리 둘이… 섞어.”

“말투는 누굴 닮아 이러시는지.”

발록 경이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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