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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왕도-(1) (16/190)

02. 왕도

“아가씨 몸 상태는 어때?”

“계속 안 좋으시지 뭐. 열이 안 내려서 아무것도 못 드셔.”

3개월간 저택을 떠나 외유를 나갔던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귀환하자마자 고열을 앓았다. 르페브르 가문의 꽁꽁 싸맨 여식이라, 외부와는 최소한의 교류조차 없었던 블란데아였기에 아는 사람은 저택 내의 식구들로 한정되었지만.

“엔리.”

르페브르 가문의 안주인, 아네사는 엔리코르를 불렀다. 엔리코르는 창문에 이마를 붙이고 절망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방에 온종일 붙어 있니? 집사의 염려가 크구나.”

“어머니….”

엔리코르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저 개명할까요?”

“……?”

“블란이가 제 애칭만 들으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그날 밤 무조건 악몽을 꿔요.”

“아아.”

아네사는 어깨를 감싸고 있던 숄을 그러쥐며 엔리코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단다.”

아네사는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블란데아가 3개월이나 그 적색 지구에 머문 진짜 이유인 그 소년이 블란데아를 ‘엔리’라고 불렀기 때문이니까.

엔리코르에게 이마에 상처가 나면 못쓴다는 말을 해 준 아네사는, 블란데아의 많이 흐려진 금발을 떠올렸다.

블란데아는 고아원 재건축을 앞두고, 3개월 더 있어도 되냐는 허락을 구할 때, 어딜 가든 사람을 붙여서 대동하겠다는 약속을 아주 철저히 지켰다. 그래서 아네사는 블란데아가 반 시체로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그간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적색 지구 고아원의 재건축은 훌륭하게 잘 끝났다. 시에도 가문의 이름을 3개월간 빌린 것도 적절한 보상과 함께 처리해 주었다. 어차피 시에도 자체가 르페브르의 휘하 가신 가문이기도 했고, 시에도 가문은 영지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프로키온 가문의 새 안주인과 유치한 신경전이 있기는 했으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르페브르 가문에게 그 정도는 우습지도 않으니까. 게다가 근래 프로키온 가문도 요즘 내부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지 왕도 생활을 정리하고 영지로 급하게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블란이는 언제쯤 안 아파요?”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이제 다시는 안 아플 거야.”

“정말요?”

“그럼. 엔리.”

엔리코르가 창문에 머리를 쾅쾅 부딪쳤다.

“그래도 저 역시 개명을 할래요….”

***

‘난 정말 쓰레기야.’

블란데아는 딱 그런 표정으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블란, 깨어 있었니? 우리 아가 이렇게 핼쑥해서야.”

아네사는 블란데아의 침대에 앉았다.

“블란.”

“네에.”

“그 소년 왜 집으로 안 데리고 왔니?”

블란데아의 눈이 똥그래졌다. 아네사가 처음으로 슐로이츠에 대한 걸 물은 것이었다. 하기야 아네사가 아니었으면 블란데아는 적색 지구에 애초부터 내려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생의 기억이 있어도 몸은 아이라 치밀하게 준비해 가지도 못했을 거고.

블란데아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갑자기 블란데아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아네사가 순간 당황했다.

“아가? 왜 울어. 울지 마, 응?”

“제가… 너무… 건방졌… 어요….”

“…응?”

아네사가 살면서 본 수많은 아이들 중 독보적으로 신중하고 조용한 애가 지금…? 아이가 스스로에게 너무 건방졌다고 말하는 것도 매치가 잘 안 되는 상황이긴 했지만….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은 뺨을 따라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저… 좋자고… 걔… 인생… 을… 망칠… 뻔… 했어요….”

“……?”

“전… 걔를… 책임… 지지도… 못… 할… 거면서… 너무… 아픈… 상처… 를… 준… 거예… 요….”

“…으응?”

몸집이 작아 다섯 살로도 보일 만큼 작은 아이가, 하는 말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그도 오래 가진 못했다. 내내 눈물을 뚝뚝 흘리던 블란데아는 결국 서러움이 북받치는지 아이처럼 으아앙 울어 버렸다.

“우리 아기. 울지 마. 엄마 마음 아파. 응?”

아네사는 블란데아를 품에 안고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블란이 깨면 내게 말해 주렴.”

“네, 마님.”

블란데아가 겨우 잠들고 나서야 아네사는 밖으로 나왔다. 엔리코르는 방에 틀어박혀 창문에 머리를 쿵쿵 박고 블란데아는 품에 안겨서 엉엉 울어 대고. 아네사는 정신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블란데아의 대답을 들으니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생을 망칠 뻔했다는 게 무슨 말이지?’

사실 그 소년은 성만 겨우 빼앗기지 않았을 뿐이지, 프로키온 가문에서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블란데아는 애답지 않게 말수가 적지만 생각이 깊었다. 일부러 제 이름을 알려 주지 않고 엔리코르 애칭을 알려 준 것만 봐도…. 그랬다. 분명히 짐작하고 있었을 텐데.

르페브르 가문이라면 버림받은 소년을 데려와도 충분히 커버가 된다는 사실을.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블란데아는 그 소년에게 심한 상처를 준 후 냉정하게 돌아와 버렸다고 했다.

“마님. 제가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블란데아 아가씨가 말씀하시는 게 어우. 저쪽에서 몰래 엿듣던 제가 다 상처를 받았습니다.”

“상상이 안 가는데. 블란 그 애가 그리 말을 했다고?”

“예. 엔리코르 도련님이었으면 벌써 눈물을 한 바가지 쏟으셨을 겁니다.”

“블란이 왜 그랬지?”

심각해진 아네사에게, 같이 보고를 하느라 함께 자리하고 있던, 딜런이라는 이름을 가진 감찰관이 입을 열었다.

“마님. 제가 짐을 싸느라 아가씨 표정을 봤는데 그 공자에게 폭언을 쏟아 낼 때 꼭 울기 직전의 표정이셨습니다.”

블란데아는 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 소년에게 그렇게 상처를 줬을까?

‘무슨 생각이 있기야 하겠지만.’

블란데아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한부였던지라, 항상 딸의 곁을 지키면서 알았다. 블란데아는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엔 많이 아팠던 애라서 그런가 싶었다. 몇 살 먹지도 않은 어린애가, 인생 다 산 사람 같은 표정을 지을 때가 있어서, 그때마다 아네사는 마음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니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말에도 고민하다가 결국 보내 주었지. 사실, 몸이 많이 좋지 않은 일곱 살짜리 어린애가 아무리 명분이 있다지만 슬럼가에 다녀와 보고 싶다는 말에 선뜻 허락해 줄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블란데아가 일곱 살 인생 중에 처음으로 ‘하고 싶다’라고 말한 것만 아니었으면 아네사도 어떻게든 달래서 못 가게 했을 것이다.

블란데아는 너무 어른스러워서 가끔은, 아니 자주 아네사는 딸이 안쓰러웠다.

거기다가….

이 집엔 아네사보다 더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마님! 가주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네사! 블란은? 우리 딸 괜찮소?”

블란데아가 고열로 실려 왔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영지의 일을 마무리하고 달려온 가문의 가주, 레너드는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르페브르 부부는 울거나, 절망하거나, 악몽을 꾸거나, 혹은 머리를 부여잡고 개명하겠다고 중얼거리는 두 자식을 번갈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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