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기운에 취해 열 살짜리 슐로이츠에게 뽀뽀를 했다.’
나는 심각했다. 더 심각한 건 하녀들과 기사들이었다.
‘다 봤다니….’
집 앞이긴 했지. 그리고 설사 집 앞이 아니어도, 기사들은 날 혼자 돌아다니게 둘 성격은 아니었다. 솔직히 내가 새벽 3시에 혼자 뛰쳐나간다 해도 뒤에서 몰래 따라다닐걸.
그러니 다들… 숨어서 봤다고 했다.
화내고.
달래고.
껴안고.
슐로이츠에게 입을 맞추는….
난 이불 속에 파묻혀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시간을 되돌려 돌아간다고 해도 또 그럴 것 같긴 했다. 슐로이츠가 단순히 최애이기 때문에? 글쎄, 잘 모르겠다. 난 이제 그를 그저 수많은 장르 속에서 가장 사랑했던 인물로 말하기엔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슐로이츠는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날 싫어하진 않는다는 걸 안다. 아마 제법 좋아하고 있겠지.
‘그럼 나중에 나랑 결혼해 달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이마를 찡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린 슐로이츠를 통해 너무 사심을 채우나 싶었지만, 솔직히 괜찮지 않나? 나는 일단 왕국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최고 귀족 가문의 직계고, 슐로이츠는 후일 역대 다시없을 구국 영웅이 되니까.
죽지만 않는다면…. 슐로이츠 역시 나중에 결혼해야 하지 않나? 여기 귀족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거의 대부분 결혼하니까.
‘나 괜찮지 않나?’
나는 후다닥 거울 앞으로 뛰어가서 새삼스럽게 얼굴을 확인했다. 어릴 때 많이 앓아서 아직 체구가 작고 살갗은 창백했지만, 이목구비 자체는 오밀조밀해서 꼭 인형 같았다. 하녀들이 매번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날 꼭 껴안아 줄 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 위까지 싹둑 잘린 금발도 독한 약 때문에 지금은 좀 색깔이 회색으로도 언뜻 보일 만큼 많이 옅었지만… 엔리코르의 머리카락이 짙은 금발이니까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어머니 아버지도 그렇고, 또 엔리코르 역시 대단한 미인으로 자라니까 나도 제법 미인으로 자라지 않을까?
‘슐로이츠한테 지금 확 청혼해 놓을까?’
평생 잘해 주겠다고 말하면서…?
물론 이 소설의 후반부를 읽지는 못했지만, 슐로이츠가 살아 있을 테니 모두가 예상하던 왕국 멸망 루트도 어떻게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인이 된 후의 슐로이츠는 건조하고 무덤덤하지만 우직한 성격이라 어릴 때 해 놓은 약속을 어길 것 같지도 않았다.
날치기 청혼을 할 생각에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너무 양심이 없는 행동 같긴 했지만 난 원래 양심이 없었다.
때마침 약을 먹을 시간이었다. 내 약을 챙겨 주러 온 의사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그 소년의 해독제 복용이 거의 다 끝나 갑니다.”
“정말?”
“예, 아가씨. 오늘 점심이 마지막 해독제입니다. 그리고 해독제를 몰래 먹이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반점이 낫는 것도 1, 2주 후 한 번에 낫게끔 조절을 했습니다.”
“…응? 그럼… 눈은?”
“약효가 그렇게 조절이 되었으니, 눈 역시 반점이 사라질 때 함께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
“왜 그러시나요?”
“대단… 해서….”
“별말씀을요. 하지만 왕궁의도 따라 하지 못할 일이긴 합니다.”
의사가 뿌듯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내게 따뜻한 물을 주었다. 마시면서도 희한했다.
‘그런 게 조절이 되는 거야?’
새삼 불치병 치료제를 연구하면서, 르페브르 가문의 의학적 기술력이 엄청나게 몸집을 부풀렸다는 걸 깨달았다. 뭔가 말도 안 되는 걸 해내는 것 같은데 의사의 표정엔 당연하다는 듯 쓰여 있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물을 다 마신 후.
나는 머리맡 화병에 꽂혀 있는 꽃들 중, 아직 꽃봉오리가 피지 않은 꽃을 한 송이 챙겼다.
약효가 완전히 발휘되기 전에 꽃이 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슐로이츠가 처음 앞이 보일 때 예쁜 걸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가씨.”
“딜런…?”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미래의 엔리코르 따까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고아원 재건축도 마무리되면서 그쪽에 내내 있던 걸로 아는데. 왜 온 거지?
“오늘 그 소년의 집에 가실 겁니까? 그….”
“응…?”
“소년의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
순간 꽃을 쥔 내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누가… 왔는데?”
딜런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끼고 있는 은테 모노클은 알을 깨끗하게 닦아 놓아서, 마치 거울처럼 내가 잠깐 비치다 사라졌다.
“아가씨라면 알아들으실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만…. 소년의 친부가 재혼을 했지요. 좋지 않은 재혼이라 왕도 사교계에선 배척받지만요. 그런데 그 재혼을 적극 지지한 이들 중 소년의 숙부가 있습니다. 그 숙부가 왔습니다.”
“…….”
“그리고 마님이 따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셔서 아가씨에게는 보고를 생략했었는데.”
딜런이 이마를 약하게 찌푸렸다.
“저희가 지금 임시로 빌린 가문, 그러니까 시에도 가문과 슐로이츠 군의 가문이 최근 왕도에서 좀 크게 부딪혔습니다. 이 지구의 이전 보호자를 내쫓은 것 때문에 소년 쪽 가문의 안주인이 앙심을 품은 모양이더군요.”
“뭐… 라고?”
‘아니 자기가 뭘 잘했다고 앙심을 품어?’
기가 막혔다. 하기야 또 생각해 보면 납득은 갔다. 르페브르 가문은 감히 건드리지 못하겠지만, 내가 빌려 온 ‘시에도 가문’은 슐로이츠의 가문보다는 살짝 부족한 가문이었다. 앙심도 품었겠다 냅다 들이박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기사들이나 하녀들이나 내게 쉽게 표현해 주려고 안달인데, 딜런은 좀 달랐다. 돌려서 얘기를 하지 않고, 알아들을 것 다 알아들을 성인에게 얘기하듯이 쭉쭉 얘기를 했다.
‘이래서 회계 감찰관에서 차기 르페브르 가주의 부관으로 고속 승진한 건가?’
아주 눈치가 빠르군.
덕분에 상황 파악이 쉬웠다.
거기다가 숙부라. 딜런이 말해 준 그 숙부는 나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슐로이츠의 어릴 적 얘기에서 잠깐 등장했으니까. 이 암흑 구역에서 가문으로 다시 슐로이츠를 데려가는 인물.
‘좋은 인물은 절대 아니지.’
방금 딜런이 말했듯이, 숙부란 놈은 형의 재혼을 적극 찬성했다. 사교계에선 배척까지 받는 재혼이었는데. 찬성의 이유는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도 자세히 나오진 않았지만, 아마 가주인 형의 비위를 맞추고 콩고물이나 얻어먹기 위해서였을 터다.
‘슐로이츠를 데리러 온 이유도 마찬가지고.’
사실은 슐로이츠의 편이던 숙부가 몰래 그를 거두기 위해 데리러 온 거면 좋았겠지만…. <미친 미인의 최후>는 작가님도 함께 미쳐 있는 것 같은 소설이었다. 특히 인기가 많은 인물일수록 더 많이 구르거나, 혹은 많이 굴렀던 과거가 서술되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요청이 특별히 폭발하는 인물은 과거나 속사정을 외전으로 풀어 주었는데 설정들 자체가 원래부터 그렇게 비극이어서 다 구르는 느낌?
그런 고로 슐로이츠가 가문으로 돌아가는 속사정도 그리 밝진 못했다. 왜냐하면 친부가 슐로이츠를 필요로 해서 가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
이즈음 하여, 슐로이츠의 친부는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검의 자질이 아주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원래 기사 가문으로 이름이 높으니, 대대로 훌륭한 검파자들을 배출한 가문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친부의 둘째 아들놈은 검파자로서의 재능이 바닥을 기다 못해 소멸을 한 수준이라고 했다.
그렇잖아도 사교계에서 온갖 비웃음을 사는 재혼이었다. 당연히 친부는 이 사실을 다른 귀족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 하지만 이곳은 사람을 산 채로 뜯어 먹는 괴수가 존재하는 세상. 왕국의 귀족이라면 반드시 기사로서의 의무를 져야 했다.
그래서 친부는 제 동생을 시켜서 슐로이츠를 이 슬럼가에서 다시 데려온다. 둘째 대신 슐로이츠를 군부로 보내 의무를 지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둘째 놈은 꽁꽁 싸매면서 최고의 스승들을 붙여 어떻게든 능력을 키우려고 하고.
‘그것도 결국 실패하지만.’
나는 냉소적인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그 덕분에 슐로이츠가 가문의 검술을 일부이긴 하나 계승은 하니까. 또 눌러 놓았던 검의 능력도 절반은 다시 개화시켜 주고.
‘하루빨리 군부로 내쫓아 일찍 죽길 바라서겠지만.’
그러니 치사하게 절반만 개화시켜 준 거지.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슐로이츠가 자라면서 알아서 되찾아 버리니 상관은 없었다.
딜런의 말대로, 슐로이츠의 집 앞에는 호화로운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귀족의 마차였다. 슐로이츠의 앞에는 귀족 남성이 내리고 있었다.
슐로이츠의 숙부인 티모테 프로키온이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슐로이츠를 보고 있던 그는 인기척을 느낀 듯 내 쪽을 돌아보았다. 온통 허름한 차림새인 이 적색 지구의 사람들과는 달리, 눈에 띄게 좋은 옷을 입은 나와 딜런을 본 숙부 놈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아. 그 시골에 박혀 계시는 가문의 영애시군.”
박혀 계시다 앞에 ‘처’가 생략되어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