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곧 죽을 조연으로 환생했다-(11) (12/190)

***

나는 나흘을 꼬박 앓았다.

아주 가끔씩 정신이 들 때마다 의사나 하녀들이, 가끔은 비너스가 내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아 주고 있는 게 느껴졌다. 딱히 크게 아프지는 않은데 온몸이 축축 늘어졌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창밖의 하늘이 까매졌다 밝아졌다를 반복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가씨가 눈 뜨셨어요!”

닷새째 되는 밤. 나는 겨우 일어나는 데 성공했다. 몸이 여전히 늘어졌지만 이젠 혼자 걸을 수도 있었다. 의사들은 하루 이틀만 더 정양하면 되겠다는 말을 했고, 하녀들은 약재를 푼 물에 나를 씻겨 주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성검이 원래 체력을 많이 잡아먹는 데다가 처음 쥐어서 더 힘이 많이 드셨던 겁니다. 그렇잖아도 몸이 약하셨던지라 토혈을 했지만….”

“나 피… 토하는 거… 안 무서운데…. 자주… 토했잖아….”

“아가씨….”

“그런 말씀 마세요….”

의사와 하녀들이 다 서글픈 표정을 지어서 나는 머쓱해졌다.

‘아니 난 그냥 어릴 때 그랬다고….’

창밖으로는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의사들이 갖다 준 약을 삼켰다. 요 며칠 약이 바뀌었다더니, 약만 먹었다 하면 잠이 엄청나게 쏟아졌다.

“졸려….”

“주무세요, 아가씨.”

나는 하녀들이 새로 갈아 입혀 준 잠옷의 뽀송뽀송함을 만끽하며,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비가 오는 창가로 걸어가서 차가운 유리창에 손을 대 보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계속 으슬으슬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고 살짝 덥기까지 한 걸 보니 정말 하루 이틀만 더 있으면 다 나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나는 점점 미간을 찌푸렸다.

‘잘못 본 건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점점 선명해지는 인영. 빗속에 서 있는 그 인영의 정체를 확신한 순간, 내 눈이 동그래졌다.

난 바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바깥에 앉아 있던 하녀가 깜짝 놀랐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우산 가져가세요!”

순식간에 작은 우산을 든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슐츠…?”

비에 흠뻑 젖은 슐로이츠가 굳어 있었다.

“왜… 그냥… 가려고 해?”

서둘러 슐로이츠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의 손을 잡아 본 나는 말문을 잃었다. 슐로이츠의 손이 차가워도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그뿐일까. 가까이서 본 슐로이츠의 얼굴은 마치 밀랍 인형처럼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슐로이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 기이한 불안감이 마음을 아프게 쥐어 잡았다.

“며칠째… 와 있었던… 건 아니지?”

“…….”

“밤… 샜어? 계속…?”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왜? 왜 그랬… 어…? 기사들도… 다 아는… 얼굴이니… 까… 말하고… 들어오면… 되잖아.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 고…! 그냥… 여기서… 바보같이… 서… 있어…!”

그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목소리에 점점 감정이 실렸다. 내가 나흘째 쓰러져 있었으니 나흘 내내 슐로이츠는 혼자 서 있었다는 소리다. 지금은 초봄. 날은 추웠고 비가 내려 쌀쌀하기까지 했다. 어린애들은 차가운 비를 잘못 맞으면 폐렴에 걸려 죽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눈도 안 보이면서,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건데?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를 타박하고 싶은데 숨이 차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와중에도 슐로이츠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리는 게 내 마음을 말도 못 하게 아프게 했다. 빗소리만 귓가를 울리는 밤.

슐로이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

“나만 아니었으면… 당신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목 아래로 짙은 그늘이 지는 기분이었다. 슐로이츠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평생을 다시없을 영웅으로, 단 한 번도 꺾이지 않고 살아왔다던 슐로이츠가 타인 앞에서 울어 본 적이 있었을까?

서럽게 흐려진 소년의 표정에, 정신없이 달린 사람처럼 숨이 막혔다.

“내가….”

슐로이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가 입 안으로 삼킨 뒷말이 무엇인지 모른다. 난 독심술을 할 줄 모르니까. 하지만 기이하게도 우산을 들고 있던 손에서는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이든, 지금 반드시 대답을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지배했다.

“아냐.”

우산이 발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힘껏 어린 슐로이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져 뺨 아래를 타고 균열처럼 흘러내렸다.

넌 행복해지려고 태어났어.

내가 장담할게. 넌 진짜 행복해지려고 태어났어.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

“그런 말… 하지 마… 슐츠….”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 뺨을 본다.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눈. 내가 아무리 힘껏 미소를 그려도, 괜찮다는 눈빛을 돌려주어도 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겠지. 비극 같은 현실이 턱 끝까지 찰랑찰랑 고이는 기분에 숨까지 막혔다.

“…슐츠.”

나는 슐로이츠의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 차갑게 식어 있는 입가에 입을 맞췄다.

***

소녀가 기사들에게 업혀 실려 간 날, 슐로이츠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괜찮으냐고 묻던 소녀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흔들림이 없었다. 소녀는 말이 느릴 뿐이었으니까. 그가 들어 본 누구의 것보다 목소리가 맑았다. 하지만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제 품으로 푹 쓰러지는 소녀의 작은 몸에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심장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다섯 살. 아버지가 집 밖으로 떠돌면서 슐로이츠의 어머니는 나날이 말라 갔다. 두 눈은 서늘하게 빛났고, 타고난 아름다움은 여전했으나 드러난 손이며 팔은 겨울날 가지처럼 앙상하게 변했다.

그때쯤 아버지는 집에 다른 여자를 데려왔다. 항상 기품 있던 어머니는 그날부터 일주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곡기를 완전히 끊고서는, 박제된 동물처럼 섬뜩하게 얼어붙은 눈으로 안채에 앉아 있었다.

결국 아버지가 데려온 여자를 별채로 보냈다는 사용인의 말을 듣고서야, 어머니는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식사를 차리라는 말을 했다. 그림 속 여왕처럼 고고하게, 그렇게 의미 없이 안주인의 자리에 말라붙어 있던 어머니는 몸을 일으켰지만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녀는 그대로 앞에 서 있던 슐로이츠에게 쓰러졌다.

쓰러지는 어머니를 잡아 주기에는 슐로이츠가 너무 어렸다. 그는 그대로 어머니의 마른 몸을 붙잡으며 함께 쓰러졌다. 그녀의 몸에는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 이후 슐로이츠는 어머니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친부에게서 내 자식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변방으로 쫓겨났을 뿐.

슐로이츠는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얼굴을 아무리 닦아도 피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몸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대로 쓰러졌던 어머니처럼.

그 허약한 몸으로 견딜 수가 있나?

슐로이츠는 어느새 소녀가 머무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마음은 수백 번도 넘치게 뛰었으나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차마 소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어서 슐로이츠는 그 애가 머무는 집 아래를 서성였다. 오다가다 만나는 기사들은 슐로이츠에게 그래도 친절했다. 아가씨가 슬슬 괜찮아지고 있다고는 했다. 언제쯤 일어날 거냐는 질문에는 조금 있으면 일어나실 거야, 따위를 얘기하며 얼버무렸지만.

기사들은 소녀를 몹시 소중하게 여겼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슐로이츠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하기야 자신이라도 그럴 것 같았다. 소녀는 몸 어딘가가 불편한지 말이 느렸지만, 그래도 슐로이츠가 겪어 온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다정했다.

그런 다정함은 다시는 겪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슐로이츠는 소녀가 그 깡패들을 내쫓기 위해 보호자를 자처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그 범죄자 놈들이 있을 때 괴수가 안 나타나더니, 하필 아직 작고 어린 아가씨가 계실 때…!”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시고…. 머리도 다 잘리시고….”

그러니 그 말이 맞았다.

치안관의 말이 맞았다.

슐로이츠는 우산을 들고 뛰어나온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주 희미한 실루엣만이 잡히는 전부였다. 그마저도 잘 보이지 않는 게 부지기수였으며, 색깔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소녀의 머리카락 색깔도, 눈동자 색깔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째… 와 있었던… 건 아니지?”

“…….”

“밤… 샜어? 계속…?”

“…….”

“왜? 왜 그랬… 어…? 기사들도… 다 아는… 얼굴이니… 까… 말하고… 들어오면… 되잖아.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 고…! 그냥… 여기서… 바보같이… 서… 있어…!”

비가 오는 밤이었다. 슐로이츠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으냐고, 안 아프냐고. 피를 토했는데 목은 괜찮으냐고.

그런 말을 한 아름 안고 있었는데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미안해요.”

“…….”

“나만 아니었으면… 당신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뭐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이 젖어 들어간다. 한 번도 타인 앞에서 눈물을 보여 본 적이 없었다. 약점은 감춰야 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돌아가 가문을 다시 찾아야 했으니까. 어머니는 그가 혼외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능력이 늦게라도 개화할 거라고 몇 번이나 매섭게 슐로이츠를 붙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건지 슐로이츠는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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