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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이후로 슐로이츠는 내게 급격히 마음을 열었다. 아니, 전에도 그렇게 안 연 것 같진 않았는데 이번엔 정말로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
“당신도 애칭 알려 줬잖아요.”
‘애칭을 알려 주다니!’
난 입 밖으로 한번 소리 내어 보았다.
“슐츠.”
‘세상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냈는데도, 목 아래가 괜히 간지러웠다.
왕국에서 네 음절 정도의 이름은 거의 대부분 애칭이 있었다. 그러니 슐로이츠에게도 애칭이 있는 게 당연하긴 했는데, 작중에서는 그 애칭을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슐로이츠는 이미 너무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고, 그렇다고 남들에게 다정한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대부분이 슐로이츠 총사령관님, 혹은 슐로이츠 경 등으로 부르던 이름인데….
‘당연히 댓글 창은 안 그랬지.’
슐로이츠가 생전 누구에게도 애칭을 허락한 적 없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던 팬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나중엔 슐로이츠의 과거가 나오거나 그가 괴수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도 덤덤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나올 때마다 그런 말들이 댓글에 달렸었다.
- 슐츠야 나 슐프게 하지 마
하도 애가 건조하게 구니까. 나는 속으로 몇 번 더 ‘슐츠, 슐츠.’ 하고 발음해 보다가 빙그르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번엔 진짜 슬프게 살지 마.
“왜 웃어요?”
슐로이츠가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응…? 그냥.”
“뭐 보고 웃은 건데요.”
‘너 보고.’
하지만 그런 말을 어떻게 해? 내가 대충 말을 얼버무리자 슐로이츠가 이마를 찌푸렸다.
“당신 잘 안 웃잖아요.”
“내가?”
“그래요.”
‘나 잘 웃는 편… 어? 아닌가?’
생각해 보니까 그랬다. 저택에서 하녀들은 내가 웃으면 아주 좋아해 주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내가 웃으면 너무 행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엔리코르는 웃든 말든 아무도 신경 안 썼지만 내가 웃을 때면 다들 무척 기뻐했다. 난 그게 엔리코르가 하도 실실대서 그런 줄 알았지.
집에 돌아가면 좀 자주 웃어야지, 하는 생각과 달리 살짝 괘씸하기도 했다.
“너도… 잘… 안 웃잖아.”
나는 두 손을 뻗어 슐로이츠의 뺨을 쭈욱 늘렸다. 슐로이츠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원래… 지위 낮은… 사람이 더… 웃어야… 한댔어.”
뒤에서 비너스가 사레가 들린 듯 헛기침을 했다. 슬쩍 보니 아주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그치. 내가 들어도 참 꼰대스러운 말이었군. 일곱 살 주제에 벌써부터 자리 놀음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걸로 보이는 수도….
난 말을 덧붙였다.
“네가… 웃어야… 나도 웃지.”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슐로이츠가 고분고분 웃을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표정이 조금 풀어지긴 했다. 미래의 총사령관을 내가 막 갖고 노는 그림이군. 괜히 웃음이 나왔다.
키득키득 웃은 내게 비너스가 다가왔다.
“아가씨. 해가 지기 전에 확인하고 들어가시죠.”
“으응.”
난 걸음을 옮겼다. 일단 보호자이긴 해서, 공식적인 경계선 순찰을 한 번은 해야 한다나 뭐라나. 이 암흑 지구의 치안관이 이번 한 번만 하면 된다고 손을 싹싹 비비면서 말하는 걸 보니 의례적인 절차인 듯했다.
‘원랜 안 하고 떠나려고 했는데.’
은근히 집요하게 압박이 들어온다고 했다. 어디서 그런 압박을 넣는지는 딱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슐로이츠의 가문이겠지. 계모가 아무래도 제 심복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한 내게 유감이 많은 모양이었다.
뭐, 어차피 기록만 하면 된다니까.
나는 한 손으로는 슐로이츠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며칠 전 기사 한 명이 슐로이츠의 앞에 놓인 상자를 티 나게 치워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슐로이츠가 자신이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면서 모른 척했다는 걸 알면 기분이 정말 나쁘겠지?’
자존심도 상할 거고. 난 최애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서 이 순찰에 슐로이츠를 데리고 왔다. 어차피 실루엣은 보이는 것 같았고 원체 기감이 뛰어나 문제 될 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손을 잡고 걷고 있고.
“아이고, 보호자님. 성검은 한번 직접 잡아 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아가씨한테 말하지 말고 내게 말해라.”
“앗…! 예!”
손바닥을 싹싹 비비던 지구 치안대의 치안관은 비너스의 말에 움찔 놀랐다.
“그리고 성검은 일이 생기지 않으면 굳이 잡지 않는 게 원칙 아닌가.”
“아이고, 그럼요. 그럼요. 그저 어린 귀족분들 중엔 성검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살짝 여쭤본 겁니다…!”
나는 살짝 시선을 돌려, 치안관들이 품 안에 안고 있는 두 개의 긴 나무 상자를 보았다. 신성한 문양이 새겨진 저 상자들 안에 성검들이 들어 있겠지.
슐로이츠 역시 제법 궁금할 것이다. 지금 눈이 잘 보이지 않으니 시선을 돌리지 않고는 있지만.
성검.
탑의 가문의 피가 흐르는 자만이 잡을 수 있는 검. 괴수를 상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검이었다. 만약 탑의 가문의 피가 흐르지 않는 자들, 혹은 드물게 탑의 가문의 피가 흘러도 능력이 발현되지 않는 자들은 잡아 봤자 그냥 평범한 고물에 불과했다.
‘슐로이츠는 약 때문에 그 능력이 눌린 상태고.’
저 성검을 쓸 수 있는 자를 검파자(劍破者)라고 불렀는데, 나중엔 슐로이츠가 왕국 역사상 다시없는 검파자로 인정받아 현존하는 모든 훈장을 하사받는다.
‘지금은 그냥 애지만.’
“크흠. 경. 이제 이쪽만 확인하시면 끝납니다.”
치안대에서 가장 높은 놈으로 보이고, 가장 썩은 걸로 보이는 치안관의 뒤에는 성실해 보이는 두 젊은이가 지도와 기록장을 들고 따라다니고 있었다.
딱 보니 각이 섰다. 치안관에 큰 뜻을 품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때 묻지 않고 열정이 넘치는 젊은이들… 이군.
그러니 저렇게 눈을 또렷하게 뜨고, 내가 제대로 확인을 하나 안 하나 치밀하게 기록을 하는 모양이었다.
‘평생 안 썩으면 좋겠네.’
난 그런 생각이나 하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지막 순찰 지점이었다. 마치 표식처럼 반쪽짜리 기둥이 솟아 있었다. 아이만 한 항아리를 올려놓을 수 있는 지름이었고, 금사 무늬가 그물처럼 새겨진 기둥에선 묘하게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괴수는 오래전부터 대륙을 괴롭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생겨난 것 중 하나가 이 ‘금사 기둥’이었다. 괴수들은 인간을 먹어 치우려고 하는데, 희한하게도 괴수들은 인간들보다도 이 기둥에 먼저 달려들었다.
‘뭘 넣은 걸까?’
원작에서도 왕실의 비밀이라고만 했지. 애초에 작중 배경인 이 라자크 왕국이, 대륙의 수많은 왕국이 멸망하는 동안 홀로 건재해 이렇게 거대한 왕국을 이룬 이유 중 하나가 금사 기둥이라는 설정이었다.
달콤하기는 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은 약재를 푼 물에 몸을 담그는 내게는 조금 역할 정도로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난 기둥에서 물러나 턱짓했다. 비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기둥, 이상 없음.”
“이상 없다신다!”
치안관의 말에 수하들이 슥슥 메모를 했다. 슐로이츠가 기둥 쪽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뜨는 게 보였다. 어차피 군부로 들어가면 일주일에 한 번은 보게 될 기둥인데 벌써부터 호기심이 드는 모양이다. 난 빙긋 웃고 슐로이츠의 손을 잡아당겼다.
“슐츠, 이제… 돌아가서….”
밥을 먹자는 내 얘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슐로이츠가 내 손을 홱 잡아당긴다 싶더니, 눈 깜빡할 새 시야가 뒤집혔다. 비너스가 내 앞에 있었다.
“왜….”
“아악!”
옆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귀가 찢어지는 듯한 종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따라온 치안관의 수하가 등에 업고 왔던 종이었다. 물론 내가 몸이 특별히 허약해 과보호나 받긴 했지만, 그래도 아예 기초적인 수업을 받지 않았던 건 아니다.
저건 지구 경계선에 괴수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는 경고 종이었다.
뎅뎅뎅뎅뎅!
새 떼가 푸드덕거리며 나무 위에서 날아가고, 나는 얼어붙은 눈으로 앞을 보았다.
‘괴수….’
눈에 담는 순간 심장까지 굳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커다랗게 흔들리는 얼굴.
성인 남성의 키 두 배는 될 것 같은 엄청난 신장.
사람과 비슷한 신체 구조였지만 피부가 없었다. 정확히는 사람의 피부를 한 겹 벗겨 내 근육들이 온통 빼곡하게 드러난 모습이라고 할까…. 막연히 생각한 것보다, 소설에서 읽었던 것보다 너무 끔찍하고 괴기스러웠다.
‘어쩐지 괴수는 삽화를 한 번도 안 넣더라.’
기절하는 독자들 나올까 봐 그랬나 봐.
이런 멍청한 생각이 들 만큼 난 압도적인 충격에 빠져 있었다. 온통 불그스름한 괴수는 눈이 두 개였는데 초점이 맞지 않아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괴수는 냄새에 홀린 벌레처럼 기둥 쪽으로 천천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아가씨한테 성검을 넘겨라.”
비너스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한껏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
마찬가지로 잔뜩 얼어 있던 치안관이 허겁지겁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허접한 고물 같은 성검을 내게 내밀었다. 비너스가 빠르게 속삭였다.
“손에 피를 내고 성검을 쥐신 후 곧장 저에게 넘기십시오.”
슐로이츠의 계모에게 매수당한 깡패 놈을 보호자 자리에서 쫓아내면서, 난 새로운 보호자가 되었다. 그때 치안대로 가 보관되어 있는 성검에 피를 묻혔다. 주인을 바꾸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이런 슬럼가야 보호자로 올 귀족이 드물다지만, 넓고 부유한 영지에는 보호자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몇백 년 전부터, 보호자로 임명된 귀족은 성검에 생피를 묻히는 걸로 주인으로서 각인을 시키는 방법이 생겼다고 했다.
‘성검을 넘기라는 소리지….’
군부에 속해 있는 게 아닌 이상 귀족 가문의 기사가 사사로이 성검을 갖고 다니는 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난 곧바로 손가락을 깨물려고 했지만 손이 덜덜 떨리고 입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였다. 슐로이츠가 내 손을 잡아 빼더니 손끝을 깨물었다.
너무 놀라서인지 아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손끝에 톡 튀어나온 붉은 핏방울에 허둥지둥 성검의 손잡이를 쥐었을 뿐이었다.
‘이제 비너스한테 넘기면….’
괴수가 기둥에 잠깐 홀렸다고 한들 30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다. 그때 크게 움직이는 건 절대 금물이었다. 난 이걸 원작에서도 보았으며 이 왕국의 아이라면 당연히 배우는 상식이었다. 난 비너스에게 최대한 조심히 성검을 넘기려고 했다.
몸에 피가 홱홱 도는 듯한, 기이하게 짜릿한 기분과 함께, 아까까지만 해도 웬 고물이었던 성검의 모습이 희미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머리 위로 수십 개의 검들이 떠올랐다. 환영이라 쥘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괴수에게는 분명한 타격을 주는 성물의 힘.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탑의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자가 사용할 수 있는 성검의 능력이었으니까. 성검에서 꺼낼 수 있는 검의 개수에 따라서 검파자의 능력이 판단된다. 나도 아무튼 르페브르라는 가문의 직계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일단 비너스의 피가 흐르는 손에 성검을 넘겼다.
“잘하셨습니다.”
비너스가 웃는 모습에 난 잠깐 눈을 찡그렸다. 조각상처럼 너무 아름다운 얼굴로 그렇게 웃으면…. 봐 봐. 내 머리 위를 보면서 얼어 있던 치안관들도 순간 홀린 듯 멍한 낯을 하고 있잖아.
어쨌든 나보단 치안관들이 정신을 차리는 게 빨랐다. 바른 공무원의 교과서 같은 젊은 치안관은 바로 예비용 성검을 상자에서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아까처럼 또 온 몸에 피가 급하게 도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생명줄을 붙들듯 성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비너스는 이미 몸을 돌려 도약하고 있었다.
캉!
슐로이츠가 날 갑자기 돌려세우는 바람에 끝까지 보진 못했다. 다만 등 뒤에서부터 뼈와 뼈가 부딪히는 끔찍한 소리가 나면서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강타했다. 하지만 원작을 외울 수 있을 만큼 읽어서 알고 있었다. 괴수는 상처가 나면 혈향을 풍기지만 실제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죽으면 피부와 근육, 안구는 모두 증발하고 그저 뼈와 이빨, 손톱과 발톱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겨, 경! 한 마리! 한 마리 더 나타났어요!”
치안관의 숨넘어가는 비명에 굳어 버린 것도 잠시. 비너스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혼자서 두 마리의 괴수를 처치할 수는 없었다. 그런 건 후일 장성한 슐로이츠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었다.
괴수는 이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왔다. 괴수가 내 쪽으로 길고 흉측한 날이 달린, 그래서 꼭 곤충과 인간을 섞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팔을 뻗었다. 비너스가 몸을 돌리는 것보다 한 박자 빠르게 슐로이츠가 나를 끌어안았다. 순간 길게 흩날린 내 머리카락이 괴수의 손톱에 그대로 잘려 나갔다.
슐로이츠가 이를 세게 악무는 게 바로 눈앞에서 보인다는 생각이 든 순간.
콰콰콰쾅!
허공을 날아가는 수십 개의 검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 손과 두 발을 이용해 미친 듯이 기어 오던 괴수에게 성검의 조각들이 날아가 그대로 박혔다.
긴 손톱으로 철판 위를 긁는 것과 비슷한 끔찍한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동시에 하늘이 흐려졌다. 왕실은 성검을 철저히 독점했고, 성검의 사사로운 소유와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래서 성검으로 괴수의 목숨을 끊을 경우엔 거의 반드시 근방 3km를 포함하여 비가 쏟아졌다. 마치 성검의 사용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지금은 그저 부슬비 정도지만 군부에서 대규모의 전투가 있을 때는 눈을 뜨기 힘든 폭우가 내리는 경우가 있다고도 했다.
피 냄새가 무서울 정도였는데 비가 내려서 냄새가 사라지는 건 괜찮은 것 같았다.
“아가씨!”
저 멀리서 르페브르 가문의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보다는 내 바로 앞까지 달려온 비너스의 얼굴이 더 신경이 쓰였다. 그는 나와 성검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방금….”
“지금 아가씨가 성검을 쓰신 겁니까?!”
치안관이 허둥지둥 달려와 물었다. 다른 치안관들도 얼어붙어 있었다. 나도 솔직히 놀랐다.
아마 이 자리에서 놀라지 않는 건 슐로이츠 뿐이겠지. 그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내 머리 위로 순간 떠오른 성검을 보지도 못한 것이다.
“엔리, 당신….”
슐로이츠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치안관이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다.
“그 깃털 하나 못 들 것 같은 몸으로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가씨한테 말 걸지 말고 내게 먼저 말하라고 했다.”
비너스가 싸늘하게 말하자 치안관이 찔끔 놀란 기색으로 물러났다.
“아가씨!”
“방금 성검을 쓰신 게 아가씨이십니까?”
그 사이 달려 온 기사들이 수선을 떨었다. 나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지만, 혼자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슐로이츠가 신경 쓰여 적당히 고개만 끄덕였다.
기사들은 눈치가 좋았다. 그들은 바로 치안관들을 끌고 가 왁자지껄하게 괴수의 잔해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비너스의 얼굴이 어두웠다.
“하녀들한테… 저희 다 한 소리 듣겠군요…. 머리카락….”
“아냐.”
난 작게 속닥였다. 한 소리 정도가 아니라….
“엄청… 욕… 먹을걸….”
“…….”
비너스… 오래 살겠는걸.
난 싹둑 잘린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원래도 몸이 아파서인지 머리카락이 빨리 길지 않아서, 이만큼 기르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내 나이대의 다른 소녀들보다 세 뼘은 짧은 머리카락이었는데.
비너스는 망토를 벗어 내 머리에 씌워 줬고, 난 슐로이츠를 보았다. 망토가 하나뿐이라서 슐로이츠의 머리도 감싸 주었다. 비가 많이 안 와서 다행이었다.
저 멀리서 치안관이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고, 아이고. 그 범죄자 놈들이 있을 때 괴수가 안 나타나더니, 하필 아직 작고 어린 아가씨가 계실 때…!”
일부러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시고…. 머리도 다 잘리시고….”
난 치안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슐로이츠를 쳐다보았다. 빗방울이 묻어 있는 그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지금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잠깐 들었다. 이렇게 무서운 걸 어린애가 보면 분명 밤에 잠을 설칠 거다. 아무도 얠 어린애 취급해 주지 않으니까 나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고.
“슐츠.”
난 슐로이츠에게 웃었다가, 그가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그의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어려서인지, 아직 말랑한 뺨이 차가웠다.
“괜찮… 아?”
그러고 난 다음이었다.
슐로이츠의 대답을 듣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목이 가려워서 기침을 했다. 낯설지 않은 감각.
‘어?’
나는 슐로이츠의 얼굴에 튄 선혈을 바라보고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내가 피를 토한 건가?
“…엔리!”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