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곧 죽을 조연으로 환생했다-(9) (10/190)

“이 정신 나간…! 스스로 선점권을 포기하는 게 말이 됩니까!”

“당장 가주님께 뭐라고 말을 하려고! 빌어먹을 쓸모없는 새끼가! 컥!”

창밖을 내다보자, 건방진 깡패 놈들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슐로이츠의 서명은 생각보다 권한이 더 컸다. 어찌 되었든 법적으로는 여전히 프로키온의 직계인 까닭이다. 내 생각보다 일은 처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우리 기사들이 입이 참 험하군.’

거기다가 그 깡패 놈들을 끌고 가는 치안대들도 아주 무자비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슐로이츠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맞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더니. 오늘은 아주 정의의 화신처럼 굴고 있었다.

하기야 이런 빈민가의 공권력이 그렇지 뭐. 기세등등한 귀족이 오면 그쪽의 입맛에 따라 움직여 주었다. 내가 가짜로 쓰고 있는 가문도 제법 좋은 가문이었으니, 왕도로 끌려가면 굉장히 큰 벌을 받을 것이다.

‘증언자도 다 르페브르 가문의 기사들이고.’

내 생각엔 잘만 하면 종신형까지도 선고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면 엄청 심한 벌금을 물리는 것도 좋을 거고. 슐로이츠에게 몰래 독을 먹이던 계모의 발등에 덩달아 불이 떨어질 걸 생각하니 쌤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가씨.”

비너스의 목소리에 난 창밖에서 시선을 뗐다.

“일단 급하게 숙소를 치워 놓았는데, 괜찮으십니까?”

“으응. 좋아.”

놈들이 쓰던, 각 구역의 보호자들이 사용한다는 집은 이제 내 차지였다. 기사들이 급하게 치워 놓아서 최소한의 가구를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깨끗하긴 했다.

여길 들어오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일단 어머니에게 열심히 설득 편지를 보냈다. 다행히 좀 더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침실로 들어온 나는 바닥에 엎드렸다.

“아가씨?”

침대 밑을 살펴보려던 나는 그대로 몸이 덜렁 들렸다. 비너스의 아름다운 얼굴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

“시체… 또… 있을까 봐.”

비너스가 눈이 커지더니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제가 잘못했으니 이러지 마십시오, 아가씨. 저 가주님한테 혼납니다. 그리고 다 확인했습니다. 시체 없어요.”

“맞으면… 안 되지.”

아무튼 비너스가 시체는 더 없다고 하니 믿기로 했다. 나는 비너스가 직접 침대를 들어 밑을 보여주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 깡패 놈들의 처벌 보고 서류를 확인하러 갔다.

‘이 놈들은 그냥 버리는 패로 쓰일 모양이네.’

일단 이 지구의 보호자로서 깃펜에 잉크를 푹 찍어서 서명을 하는데 온 손에 잉크가 튀었다. 비너스가 갖다 놓은 손수건으로 잉크를 빡빡 지우고 있을 때였다.

똑똑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내 눈이 동그래졌다.

“아가씨!”

하녀들이었다. 이곳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저택에서 하녀를 보내 준 모양이었다. 난 벌떡 일어나 그녀들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가씨!”

“보고… 싶었어…!”

하녀들은 날 붙잡고 어화둥둥 하더니 곧 표정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기사분들은 미적 감각이 어쩜 이리 떨어지나요?”

“이건 망토인데 앞치마로 입혀 놓으면 어떡해요!”

“이건 목걸이인데 머리를 묶어 놨어요? 눈이 없으신가?”

암흑 지구로 오자마자 기사들을 신랄하게 비난한 하녀들은 날 새로 씻기고 머리를 빗겨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난 혹시나 해서 물었다.

“나 혹시… 냄새나?”

“아뇨. 르페브르신데 냄새가 날 리 있나요. 근데 매번 약재 푼 물에 몸을 담그시면 지겨우실 것 같아서요. 챙겨 드렸던 입욕제는 다 쓰셨죠?”

“으응. 일주일… 전에.”

하녀들은 내 입욕제를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친근한 향기로 몸에 도배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하녀들이 리본으로 머리를 매 주고 나서야 룰루랄라 슐로이츠를 보러 갔다.

“…어?”

오늘 슐로이츠의 육아 담당인 기사가 멀리서 손으로 엑스 자 표시를 쳤다. 난 이마를 찡그렸다. 푸른색 리본을 다섯 개 단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슐로이츠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부고를 전하는 사람이잖아.’

“그럼….”

슐로이츠에게 부고장을 건넨 남자가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한 후 떠났다. 난 천천히 다가갔다.

“슐로이츠.”

그가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보았다.

“저 사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대요.”

“…응.”

“나이가 많으시긴 했어요.”

사실 짐작하고는 있었다. 가주의 눈 밖에 나서 이런 암흑 구역으로 내쫓긴 슐로이츠에게 굳이 부고를 전해 줄 인물은 외할머니밖에 없을 거라는 사실을. 어쨌든 생전엔 슐로이츠를 많이 신경 써서 이런 집까지 마련해 놓았을 정도니까.

문제는….

나는 슐로이츠가 쥐고 있는 부고장에 이름이 두 개라는 사실을 보았다.

난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뒷장이… 하나 더… 있어…. 슐로이츠.”

슐로이츠는 아직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터. 글씨는 당연히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난 종이를 발견해 대신 읽어 주려는 아이처럼 슐로이츠의 손에서 부고장을 들고 가, 천천히 이름을 읽어 주었다.

슐로이츠의 어머니 이름이었다.

“소식이… 좀 늦게… 도착했나…? 1년… 전에… 돌아가셨… 다고….”

“그렇군요.”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게 전부였다. 슐로이츠는 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부고장을 반듯하게 접은 후 침실에 가져다 놓았을 뿐이었다. 별달리 충격받은 표정도, 슬픈 표정도 짓지 않았다. 하기야 원작에서도 그렇게 어머니와의 유대가 있었다고는….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세뇌만 당한 걸로 나왔지. 그 가문은 네 거라고. 너만이 그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내일… 또… 올게, 잘 자…. 슐로이츠.”

나는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하녀들이 온 덕에, 침실은 기사들이 손봤을 때보다 훨씬 더 아늑하게 바뀌어 있었다. 평소라면 내가 좋아하는 보들보들한 담요에 뺨을 묻었을 텐데 지금은 영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슐로이츠는 강하지.’

강하고 단단하다. 그리고 원작에서도, 어린 시절의 그에게 트라우마가 생기거나 했다는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놈의 원작을 그저 믿기엔 슐로이츠의 독백이 너무 담담했어.’

나는 결국 벌떡 일어났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뭣 모르고 시체 위에 누웠던 그날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결이 조금 다른 슬픈 기분이 더 강하게 들긴 했지만.

“아가씨? 어디 가세요?”

“슐로이츠… 집에… 가고 싶어.”

“앗. 잠시만요.”

하녀들은 이미 ‘슐로이츠’라는 인물에 대한 얘길 전부 다 들어 놓은 상태 같았다.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하녀들은 순순히 날 보내 주었다.

“아가씨는 평소에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잘 없으시잖아요?”

그런 말과 함께였다.

‘그랬나?’

어쨌든 다행이었다. 난 딜런과 함께 총총 걸음을 옮겼다. 왜 굳이 딜런을 대령해 가냐면, 비너스는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물론 딜런도 댓글 창이 폭발할 냉미남이긴 했지만, 비너스는 무언가 결이 다른…. 정말 부모님이 이름 한번 잘 지었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조각상의 화신 같다고 할까?

‘물론 그 외모도 몇 년 후엔 보지 못하게 되지만.’

기사들은 대체로 몸이 우락부락해 눈에 띄니, 난 그냥 딜런만 데리고 샤샥 움직였다. 하녀들이 입혀 준 어두운 푸른색 망토는 은빛이 감돌아 고급스러웠다.

슬럼가는 어두웠지만, 어차피 내가 보호자이며 고아원을 뜯어고치러 온 좋은 가문의 영애라는 건 여기 깡패들은 다 알아서 상관없었다. 부지런히 걸은 덕에 난 슐로이츠의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

열쇠는 옛날에 받아 놓은 상태였다. 비상사태엔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도 받아 놨었다.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상사태니까!’

난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딜런은… 여기 있어.”

“예? 예. 아가씨.”

“쉿.”

“쉿.”

난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어두웠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있어서 그럭저럭 짚고 들어갈 만했다.

‘…음식을 다 버렸네?’

독이 든 음식은 기사들이 이미 다 버리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슐로이츠는 잘 상하지 않는 음식들을 찬장에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의아했다. 나중에 군부에 들어가서 겪을 조난을 예상해 대비 연습을 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음식물이 버려진 통을 본 나는 걸음을 옮겼다.

불은 꺼져 있었다. 잘 자고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

슐로이츠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슐로이츠.”

슐로이츠는 놀라지도,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아마 내가 들어오는 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왔어요?”

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무서운… 꿈… 꿀 때… 아냐…?”

‘말이 좀 이상한데.’

사실 슐로이츠가 이러고 있을 줄 몰라서 당황해서 나온 말이었다. 난 슐로이츠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에게 손을 뻗었다. 고민하다가 나온 행동이었다. 무릎 아래에 떨어져 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작은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평소에 슐로이츠의 손은 따뜻한 편이었는데.

“…울지 마.”

“안 울어요.”

“취소할게…. 그냥… 울어.”

슐로이츠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음영이 져 흐린 얼굴에 아주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가끔 당신 말이 이해가 안 가.”

“미안….”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닌 거… 알아.”

나는 슐로이츠의 차가운 손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음식… 왜 안 먹고… 모아 놨었… 어?”

사실 그때 슐로이츠가 모아 놓지만 않았으면, 그때 깡패 새끼들한테 그렇게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난 슐로이츠가 저장 강박증이라도 걸려 있는 줄 알았지. 하지만 오늘은 음식을 깨끗하게 버려 두었다.

“나중에 먹으려고요.”

“왜? 그래도… 음식은… 그놈들이… 계속 갖다… 줬잖아.”

비록 독이 섞인 음식이지만 상하지 않은 새 음식은 매번 갖다 줬는데, 왜…?

“외할머니가.”

슐로이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이곳에 오실 거라고 했었어요.”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낮게 흐르는 목소리.

“여기서 같이 살겠다고 해서.”

“…….”

“그래서 그런 거예요. 어머니는 약을 드시려면 식사를 거르지 말아야 해서요.”

천천히 슐로이츠의 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슐로이츠의 외할머니가 생전에 그리 말씀하셨던 모양이다.

나중에 어머니가 이곳에 와서 같이 살 거라고. 어쩐지 집에 방이 좀 많다 싶었다.

슐로이츠는 어머니가 와 같이 살 거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음식을 조금씩 모아 두었지. 슐로이츠의 계모에게 매수당한 그 깡패 놈들은 음식을 딱 일 인분씩만 갖다 주었다.

슐로이츠는 음식을 조금씩 모아 놓았다가, 상한 건 자기가 먹고 매번 받는 새 음식은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한 것 같았다. 그에게서 미약한 영양실조 증세가 보였다는 건 의사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시발….’

하마터면 진심으로 욕을 뱉을 뻔했다. 너무 화가 나 눈시울이 다 빨개졌다. 친부 이 미친놈은 도대체 그 천년의 불륜이 뭐라고, 뭐가 그리 대단한 사랑이라고. 이렇게 자기 아들을 바닥으로 내몰 수 있는 거지?

더군다나 슐로이츠의 어머니는 1년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린 슐로이츠는 그저 음식을 조금씩 모아 두고 있었다는 소리다. 눈이 멀었지 후각이 먼 건 아니었을 테니, 음식이 썩는 냄새에도 아무 반응 없이 그저 어머니를 기다리며.

나중에 슐로이츠가 친한 동료에게 얘기할 때도, 어릴 때엔 그저 적당히 힘들었다고만 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 자꾸 독백 건조하게 해서 나 이렇게 슬프게 할 거야?’

날 보던 슐로이츠가 갑자기 내 뺨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슐로이츠가 입을 열었다.

“얼굴 왜 이렇게 뜨거워요? …어디 아파요?”

“안… 아파. 그냥… 열… 받아… 서.”

슐로이츠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당신이 화를 내요?”

“슐로이츠가… 안… 내니까….”

“…괜찮아요.”

나는 충동적으로 슐로이츠를 끌어안았다. 도대체 이 작은 소년의 운명은 왜 이렇게 가혹할까. 구국 영웅이 되고 군부의 최연소 총사령관이 되면 뭐 하냐고. 나중엔 결국 홀로 외롭게 죽어 버리던 그를 생각하니 목 아래에 뭔가 얹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슐로이츠의 작은 어깨를 감싸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울어도… 돼. 슐로이츠.”

“안 울어요.”

“아기는… 울고 싶으면… 우는 거랬어.”

“…누가 아기라고.”

“사실… 어른도…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

슐로이츠가 내 어깨에 천천히 눈가를 묻었다. 나는 이후로도 한참 그 어린 소년을 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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