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곧 죽을 조연으로 환생했다-(7) (8/190)

‘되게 허겁지겁 먹네.’

약은 경계하며 안 먹는 주제에, 기사가 깨끗하고 따뜻한 음식을 갖다 주니 그건 또 먹었다더라. 그래, 배가 고픈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귀엽다.’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슐로이츠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린 건 그때였다. 먼지가 쌓인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슐로이츠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조금씩 피어나던 반가운 마음이 순간 폭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 슐로이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슐로이츠.”

내 인사를 듣는 그 순간 슐로이츠가 완전히 굳어 버렸다. 쨍그랑! 스푼 떨어지는 소리에 슐로이츠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귀여워.’

키득키득 웃은 나는 슐로이츠에게서 고개를 떼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여전히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에게 일렀다.

“쟤가… 식사 다 하면… 알려 줘.”

“예, 아가씨.”

빙글 돌아 문 앞에 깔린 포석을 밟는데,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슐로이츠였다. 그 애가 예의 그 새빨개진 얼굴로 뛰어나왔다.

“슐로이츠?”

그가 홱 나를 쳐다보았다.

“왜… 왜 그냥 가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밥 마저… 먹으라고. 산책이나 하고… 돌아올까 했지.”

“…아.”

슐로이츠가 당황한 듯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의 붉어진 귓가가 굉장히 당황했음을 방증했다. 어쩐지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사실 여기 오기 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슐로이츠 프로키온.

전생에선 정말 좋아하던 인물이었지만, 어쨌든 그것도 전생의 일이질 않던가. 나는 이 세상에서 이미 명이 다했던 블란데아로서 살아남느라 몇 년을 꼬박 보냈다. 아무리 깊은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식는다지? 내가 품어 왔던 감정에 부드러운 모래바람이 찬찬히 쌓여 버렸으리라 생각했다.

슐로이츠를 구하려고 하는 것도, 일단 내가 살아남고 싶어서니까. 그런 이유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슐로이츠를 보니 전생의 그 감정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역시 이곳까지 찾아오길 잘했다.

‘해독제를 식사에 몰래 타야지.’

내가 너 꼭 구해 줄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헤헤 웃었다.

“밥… 다 먹고 와.”

“다 먹었어요.”

“…벌써?”

아까 창문으로 볼 때는 한참 남아 있던데? 내가 들어가 확인해 보려고 하자 슐로이츠가 당황해 내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제 행동에 더 당황해 내 팔을 놓았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슐로이츠가 이마를 약하게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조금 남기긴 했는데.”

“남기면… 안 돼.”

너 엄청 많이 먹어야 한다고. 여전히 돌아가지 않고 있는 슐로이츠에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빳빳한 슐로이츠도 좋지만 결국 내 말을 따르는 슐로이츠도 귀여웠다. 나는 뒤돌아서는 슐로이츠를 보며 헤벌쭉 웃지 않으려 노력했다. 날 이상한 애로 보고 경계하면 안 되니까. 정신 차리고 표정을 딱 붙잡고 있던 와중이었다.

닫혔던 문이 몇 분도 되지 않아 다시 벌컥 열렸다. 슐로이츠였다. 다 먹고 왔다는 듯 걸어 나오는 발걸음에 미련이 없었다.

‘밥을 마셨나? 아니, 그래. 스튜니까. 아니 그래도 너무 빨리 먹잖아.’

어려서 위장이 튼튼해서 안 체하나?

의아함은 오래 가지 못한다.

“슐로이츠.”

슐로이츠만 보면 불가항력적으로 흘러나오는 미소가 있었다. 그는 또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래, 나라도 자기만 보면 실실 웃어 대는 일곱 살짜리 꼬맹이가 있으면 신기하게 쳐다볼 것 같긴 했다.

나는 이 적색 지구의 길을 잘 몰랐기에, 슐로이츠가 두어 발자국 더 앞에서 걸었다. 문득 그가 물었다.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블란데아.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오면서 쓰게 된 가명은 엔리케 시에도였다.

둘 다 말할 수는 없었다.

전자는 부모님과 단단히 한 약속 때문에, 후자는 막상 슐로이츠 앞에 서니 다른 애 이름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려 주면… 안 된댔어.”

“…왜요?”

“고아원… 있잖아. 선생님이… 아가들한테… 밥을… 안 준대서… 몰래… 온 거니까… 어른들이… 말하고 다니면… 일하기… 힘들댔어.”

아이가 알아듣기 쉽게 풀어 이야기하느라 말이 좀 이상해졌다. 하지만 슐로이츠는 별 내색 없이 그냥 듣기만 하다가 물었다.

“그럼 그냥 당신이라고만 불러요? 어리니까 애칭 같은 건 있을 거 아니에요.”

왜 내 애칭은 흔하지도 않을까.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말했다.

“엔리.”

“엔리?”

슐로이츠가 나를 만나고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흔한 이름이네.”

‘엔리코르’라는 이름은 희귀한 편이었지만, ‘엔리케’라는 이름은 귀족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이었다. 예전엔 남자 이름으로만 쓰였다지만 요즘은 성별과 상관없이 섞어 쓰는 게 유행이라 슐로이츠는 내 빌려 쓴 이름을 대충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엔리코르 애칭이랑 똑같아서 기분은 괜찮네.’

우연의 일치기는 했지만.

나는 슐로이츠와 오래 걷지는 못했다. 10분 정도 걸으니 체력이 달려서 결국 뒤에서 따라오던 기사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다고 했다.

‘요 며칠 잠을 못 자긴 했지.’

시체들이 몇 구나 더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악몽을 꿀 것 같기도 했고, 무섭기도 해서 잠을 못 자고 계속 뒤척였다.

기사의 등에 업혀 고아원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슐로이츠를 돌아보았다. 또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그를 보자 왠지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아원에 데려올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고아원은 번잡했다. 지금 눈이 보이지 않는 슐로이츠를 데려오면 그는 굉장히 불편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색하는 성격도 아니니.

그러니 그냥 여기에 두는 게 좋겠지. 이미 기사들 중 한 명을 차출해 슐로이츠의 집을 지키게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내일은 좀 더 일찍 와서 같이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보니까… 싫어하진 않을 것 같다는 확신도 들었고.

나는 아까 전, 슐로이츠에게 잡혔던 팔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며칠 후.

고아원 정리는 차곡차곡 진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며칠 간 열심히 편지를 주고받고, 숨 돌릴 틈이 생기자마자 나는 슐로이츠를 보러 갔다.

그리고 시간을 잘못 맞춰 왔다는 걸 알았다.

“슐로이츠가… 씻고… 있다고?”

“네, 아가씨.”

“그럼… 기다리지… 뭐.”

나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며칠 사이 슐로이츠의 집 안은 내부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의 외가에서 차곡차곡 채워 놓아줬을 좋은 가구들은 놈들이 다 갈취해 가서 영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던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기사들이 새로 채워 놓았다. 짐 정리가 덜 되어서 좀 어설프긴 했지만….

‘그래도 며칠 전보단 좀 사람 사는 집 같네.’

다른 기사가 불러 비너스가 자리를 비우는 걸 확인한 나는 슬금슬금 슐로이츠의 침실로 향했다. 남의 침실에 마음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너무너무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나는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가 얼른 일어났다.

‘시체 없네.’

그제야 은근히 뻑적지근했던 마음이 싹 내려가며 시원해졌다. 문득 걱정이 되었다.

‘나 이상한 버릇 든 거 아니겠지?’

시체 위에 누웠다는 충격에 놀라서 잠깐만 이러는 거여야 할 텐데…. 아이의 몸이라 그런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러진 않겠지, 설마. 나는 침실에서 바로 후다닥 빠져나왔다.

“…알아서 …다고…!”

그때였다. 복도 끝에 달린 욕실 문이 벌컥 열리며 슐로이츠가 튀어나온 것은. 침실에서 도둑처럼 급하게 빠져나온 난 복도에 우뚝 서 있었고, 그 탓에 욕실에서 나온 슐로이츠와 바로 직면하게 되었다.

기사와 또 무슨 실랑이를 했는지 새침한 아기 고양이처럼 뾰로통하던 그가 내 얼굴을 보더니 희미하게 표정을 굳혔다. 난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슐로이츠?”

“……!”

순간이었다. 슐로이츠가 그대로 몸을 돌려 홱 뒤돌아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나온 건 기사였다. 기사들이 돌아가며 슐로이츠의 보육을 담당해 여기가 보육원인지 기사단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고, 아가씨.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슐로이츠는?”

“얼굴이 사과 같아져서요. 아가씨를 보고 놀랐나 봅니다.”

“왜… 놀라지? 가운 입고… 있었는데.”

기사가 허허 웃었다.

“아가씨는 소년의 마음을 잘 모르십니다.”

‘아니, 아는데.’

몸 다 덮고 있는 가운 입고 있었잖아. 그게 왜 부끄럽냐고. 아무튼 나는 닫혀서 열리지 않는 욕실을 살짝 보았다.

“아가씨.”

그때 기사가 몸을 굽혀서 말했다.

“잠시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으응?”

기사는 나를 데리고 거실 쪽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한껏 줄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소년,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응?”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무슨… 갑자기… 무슨… 말이야?”

“엊그제 욕실 깨진 부분도 전부 보수한다고 저 소년을 고아원으로 잠깐 데려와 씻겼는데요. 욕실 벽을 짚으면서 걷지 뭡니까.”

“…….”

“의사들한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예 철저하게 숨긴 거지요. 저도 일단은 모른 척했습니다. 약점을 밝히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성격 같….”

그때 기사가 굽히고 있던 한쪽 무릎을 일으켰다.

그가 뒤를 돌아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슐로이츠가 복도 모퉁이에서 걸어 나왔다. 아까와는 달리 수건으로 목 끝까지 둘둘 감싼 상태였다.

‘혹시 나한테 반점을 보이기 싫어서 그랬나?’

눈이 완전히 안 보이는 건 아닌 걸까? 아니면, 눈이 안 보이게 된 게 최근인 걸까. 어찌 되었든 나는 주변을 환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 배고파.”

기사들은 우직하니까 이런 건 내가 해야지. 기사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바로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슐로이츠에게 다가가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물기에 젖어 있는 까만 머리카락을 본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까지. 그는 내 얼굴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실명인데 어떻게 나를 이렇게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지?

함께 산책을 할 때 비틀거리지도 않았으면서…. 생각하던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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