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곧 죽을 조연으로 환생했다-(5) (6/190)

“비너스.”

나는 놈들이 엉망으로 흐트러뜨렸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말했다.

“예. 아가씨.”

“쳐….”

“예.”

“컥!”

나는 무릎 꿇린 놈들이 반죽이 되는 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방금 전, 나를 홱 끌어안았던 조막만 한 몸뚱어리의 소년이 멍하니 굳어 있었다.

슐로이츠 프로키온.

이 세계의 최강자이고 내가 그토록 좋아했으며 결국은 그렇게 죽어 버려 이 세계의 장르를 진정한 피폐 아포칼립스로 바꿔 버리는….

‘아이고야.’

슐로이츠를 제대로 보는 순간 탄식부터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더 처참한 몰골이었다. 잔뜩 얻어맞은 데다가 피까지 한바탕 쏟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다리로 똑바로 서 있었다. 역시 세계관 최강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저 소년 치료 좀 해도 되겠습니까?”

다른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슐로이츠에게 묻지 않고 내게 묻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지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슐로이츠의 가까이 걸어갔다. 슐로이츠는 경계하는 듯 눈초리를 세웠지만 그래도 얌전히 있었다.

“나를… 구하려고… 했지?”

“…….”

“고마워.”

“…….”

슐로이츠의 눈동자에 미약한 당황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래. 얘가 누구한테 고맙다거나 하는 긍정적인 말을 들어 본 게 얼마 만일까.

짙고 까만 머리카락에 선연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 혈흔과 피로가 엉겨 엉망인 몰골이었지만 그래도 특유의 색깔만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좀…. 앉아야… 겠어….”

오늘 활동이 아무래도 몸에 큰 무리가 된 듯했다. 내 말에 슐로이츠가 조금 어깨를 움찔하더니, 머뭇거리다가 집으로 들어오라는 듯 두어 발자국 물러나 주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 웃을 뻔했다.

그래. 그는 그렇게 학대당하며 자라 죽을 때까지 서늘하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냥 냉정한 성격은 아니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슐로이츠는 치료를 받게 놔두고 집으로 들어서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탄식이 나왔다. 번듯한 외부와 달리 내부는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저놈들이 다 빼앗아 갔겠지. 그나마 ‘식사를 먹여라’라는 명령을 받고 온 탓인지 식탁과 의자만은 멀쩡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집을 둘러보았다.

다른 건 없고 그저 놈들이 다 들고나오지 못해 대충 올려놓은 음식들은 말라비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가씨.”

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비너스가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저놈들을 어떻게 할까요? 가주님께 둘둘 말아 보내고 공식으로 항의할까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난 여전히 르페브르 가문의 영애가 아니라 적당히 먼 방계의 영애로 위장한 채였다. 그리고 이곳을 나가기 전까지 진짜 신분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슐로이츠를 적대하는 계모 세력과 이렇게 부딪혔으니, 가문 간의 일로 번질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게 좋기 때문이다. 슐로이츠의 가문은 물론 손꼽히는 명문가이긴 했지만, 그도 르페브르 가문에 비빌 바가 아니었다.

‘또 슐로이츠 탓을 하면서 전보다 비교도 못 하게 괴롭히겠지. 친부가.’

그러니까 지금은 단순히 슐로이츠에게 우연히 목숨을 구명 받은 어린 영애가, 치기와 선의로 못된 놈들에게서 지켜 준다는 정도로 보이는 게 딱 좋았다. 저놈들을 매수한 계모도 보고를 받아 보겠지만, 혹시 일이 커지면 자기가 슐로이츠에게 독이 든 식사를 보내고 있다는 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적당히 몸을 사릴 거고.

난 그동안 슐로이츠의 몸에 쌓인 독을 해독시켜 주고, 그의 건강을 챙겨 준 후 떠나면 되는 일이었다.

“그냥… 여기서… 쫓아내기만 해….”

“알겠습니다. 내일 안으로 쫓아내겠습니다.”

“응.”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하품을 했다. 점점 눈이 감겼다. 어느새 나는 식탁에 잠시 엎드린 채 기절을 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엔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악!”

물에 흠뻑 젖은 슐로이츠가 날 빤히 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소리를 지른 탓인지,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해 놨네….’

더러운 몰골이었으니 기사들이 치료하다가 씻기기까지 한 듯했다. 아니, 씻긴 게 아니고 그냥 물독에 퐁당 빠뜨린 게 아닌가 싶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감긴 붕대들을 보니 치료는 잘해 놓은 모양이었다.

“…앉아.”

집주인은 너지만. 슐로이츠는 순순히 앉더니 물었다.

“날 왜 구한 거예요?”

‘헉.’

나는 순간 묘한 당혹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가 내게 공대를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슐로이츠는 왕국 역사상 다시 없을 엄청난 영웅으로, 국왕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말을 높이지 않았다. 왕태자? 개무시. 르페브르 가주? 같이 무시. 애초에 국왕한테도 별로 공손하질 않았다.

“맞고… 있었잖아.”

“…숨어서 날 보고 있었잖아요.”

“……?”

‘뭐야 이거.’

진심으로 당황했다. 슐로이츠를 때리던 패거리들은 날 등지고 있어서 못 봤을 테고 슐로이츠도 그놈들 덩치에 시선이 가려져 있었다. 내 쪽은 본 적도 없었는데 언제 안 거지?

‘와 이거 진짜네.’

나는 새삼 슐로이츠의 대단함을 깨닫고 손가락을 앞으로 모았다.

“내가… 수줍음이… 많아서.”

“…….”

조용히 서 있던 비너스의 눈썹이 대놓고 찌푸려졌다. 뭐야. 내가 수줍음 많다는 게 그렇게 듣기 힘들 일인가?

‘나 되게 조용했는데.’

아파서 맨날 자고. 비너스의 표정 변화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눈앞의 슐로이츠가 더 중요했다.

“보다시피… 나도… 귀족이고… 같은… 귀족에게… 인사하러… 왔는데… 수줍어서… 잠깐… 숨어 있다가… 네가 맞는 걸… 보고… 뛰어나온 거야….”

여기까지 말하는데 숨이 다 찼다. 평소보다 훨씬 느린 말이었는데도 슐로이츠는 답답하다는 기색은 전혀 없이 빤히 내 얼굴만 보고 있다가 툭 입을 열었다.

“수줍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뛰어들어요?”

이것 봐라. 말만 공대지 고분고분하진 않았다. 여전히 가시를 세운 새끼 고슴도치 같았다. 거기다가 날카롭기도 하지. 나는 역시 떡잎부터 다른 슐로이츠를 보면서 태연히 대답했다.

“수줍음이… 많은 거지… 겁이 많다고는… 안 했잖아….”

“…….”

내가 물론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진 못했지만 안에서는 어화둥둥 사랑받으면서 컸다고! 아주 겁 없는 성격이 되었단 말이지.

나는 그리고는 슬쩍 또 비너스를 보았다. 표정이 여전히 찌푸려져 있는 게, 내가 또 혹시 너무 어른스럽게 말을 했나 싶었다.

아. 혹시?

슐로이츠가 침묵을 지키는 게 내 말을 이해 못 해서일 수도 있었다.

“혹시… 어려서… 두 개… 구분 못 해?”

“할 줄 알아요.”

슐로이츠의 차가운 반문에 나는 약간 머쓱해졌다. 저택에선 하녀들이고 기사들이고 나더러 맨날 어른스럽다고 하니까 약간 나도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흠흠.”

헛기침을 한 나는 슐로이츠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짜 잘생겼다.’

하마터면 입 밖으로 이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도 슐로이츠의 삽화가 몇 번이나 나오긴 했다. 그때마다 내 마음이 터지는 기분이었는데…. 어릴 적의 슐로이츠는 처음 보는 거였다. 그것도 실물로.

커서 잘생긴 애들은 어려서도 예쁘구나. 비록 나를 경계하는 눈으로 노려보듯 쳐다보고 있긴 하지만….

‘아닌가? 자존심이 상해서 노려보는 건가?’

자기가 맞고 토하는 장면도 내가 다 봤다는 소리니까. 나는 슐로이츠의 자존심은 별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이렇게 작고 연약해도 나중엔 세계 최강자가 되니까. 자꾸 노려보고 있어서 솔직히 좀 무섭기도 했다.

“일단… 쉬고 있어. 내일… 다시 올게.”

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너스가 바로 내 뒤를 따라 나왔다.

“고아원에서… 자?”

“예. 아가씨. 며칠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암흑 구역을 귀족들이 찾아와 묵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곳에는 마땅한 규모의 숙소나 손님방을 내줄 만한 저택도 없었다. 방랑자들이 묵을 작은 숙소나 두어 개 있는 게 전부라 처음부터 마차에서 노숙을 하든지 고아원에서 묵든지 할 생각이긴 했다.

‘고아원이 그렇게 텅텅 비어 있으니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지.’

원장이 애들 이름만 올려놓고 보조금이나 후원금을 타 먹은 덕에 그 넓은 고아원에 기사와 감찰관들이 충분히 들어가 잘 만했다.

그대로 걸어 나오던 나는 흘긋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슐로이츠는 머리와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

“아가씨. 저 소년, 독살될 뻔한 모양입니다.”

고아원으로 돌아온 순간, 슐로이츠를 씻겼다던 기사가 속닥거렸다.

“아까 소년을 씻기는 와중에 보았습니다만, 가슴 쪽에 연보라색 반점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반점들?”

“예. 정확한 독의 이름은 아직 모르겠지만 분명히 중독의 현상입니다.”

“…….”

독살이라니.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독살이라는 단어를 직접 들으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걔 열 살인데….

집에서 쫓아내 이런 무서운 곳으로 보내는 걸로는 모자랐을까? 자기네들 그 불륜이 뭐라고 어린애를 그렇게 학대를 해?

“의사들과 상의해 해독제를 만들면 될 것 같은데, 아가씨 생각은 어떠신지요?”

“좋아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르페브르의 주치의들은 실력이 좋잖습니까.”

“으응.”

기사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게다가 기사의 말은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 조사단에는 가문의 주치의가 세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내 몸 상태 때문이었다.

‘잘됐지 뭐.’

앨리스꽃을 이용해 치료제를 급하게 개발한 덕에, 뜻하지 않게 르페브르 가문의 연구력이 대폭 상승되었다. 특히 의술은 언제나 왕궁 쪽이 압도적이었는데 요즘은 달랐다. 르페브르의 주치의들 솜씨가 가장 뛰어나지 않느냐는 말이 은근히 돌 정도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기사들이 미리 모피를 깔아 놓은 침대 위로 앞뒤 가리지 않고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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