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곧 죽을 조연으로 환생했다-(4) (5/190)

‘여기만 이러진 않겠지.’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여긴 어쨌든 피폐 세계관이니까. 거기다가 빈민가는 원래 대부분 이랬다. 부모 없는 아이들, 혹은 부모가 없어야 더 좋을 아이들이 널린 곳이니까.

“아가씨, 잘못했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그리고 그런 애들을 굶겨 가며 배를 채운 원장은 내게 애처롭게 매달리고 있었다.

‘역시…. 이대로 내가 일찍 죽는 건 너무 아깝다.’

이렇게 권력이 생겼는데. ‘어우 귀신은 저런 새끼들 안 잡아가고 뭐 하지?’ 하고 중얼거리는 사람에서, 귀신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됐는데 일찍 죽는 건 너무 아까웠다.

죽을 때까지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역시 최선을 다해 슐로이츠를 구해야겠다.

나는 시계를 확인한 후 지나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있지….”

“네, 아가씨?”

“이 지구의… 귀족은… 어디… 있어?”

왕도에서는 각 지구마다 푸른 피를 한 명씩 꼭 배치해 놓았다. 크고 발달한 지구는 한 가문이 맡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렇게 변방의 초라한 지구는…. 말하자면 일종의 유배지였다. 방계 핏줄의 보잘것없는 이들이 와서 자리를 지키다가 쓸쓸히 죽는.

슐로이츠의 친부가 슐로이츠를 쫓아낸 자리가 이곳이었다.

“중심지 안쪽에 계십니다. 그런데 아가씨, 그쪽이 지금 상황이 좀 복잡한 터라 굳이 인사를 하러 가실 필요는….”

“왜… 복잡해?”

“그게….”

감찰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로 기습적인 조사를 하러 내려오면서 당연히 이 적색 지구에 관련된 건 전부 파악을 해 놓았을 테니까. 그러니 이곳에 있는 귀족이 가문에서 반쯤 내쫓긴 슐로이츠라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

가급적 얽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난 무조건 가야 했다.

“오빠가… 귀족 사이에선… 예의를 꼭… 지키랬는데? 인사 안 하면… 귀족답지 못하댔어.”

“그게….”

“나… 애 아니라구….”

감찰관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절망의 빛을 띠고 있었다. ‘도련님은 대체 어린 아가씨한테 왜 벌써부터 이렇게 교육을 하시는 거지? 자기나 잘하지.’ 하는 표정이었다.

결국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떨려…!’

적색 지구의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제 곧 슐로이츠를 실제로 만난다는 사실에 그저 심장이 쿵쾅거리기만 했다.

이 빈민가에서 눈에 띄게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내게 시선이 흘끔흘끔 쏠렸다. 하지만 당연히도 다가오거나 시비를 거는 놈들은 없었다. 그렇겠지. 난 방금 기사들이 즐비한 고아원에서 나왔으니까. 일부러 좋은 마차를 타고 오기도 했고.

‘집은 진짜 예쁘고 좋네.’

슐로이츠의 집은 눈에 띄게 좋은 편이었다. 이는 슐로이츠의 외가 덕분이었다. 그들도 눈이 있을 텐데 슐로이츠의 친부가 이혼하자마자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는 걸 보고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슐로이츠가 능력을 개화하지 못한 건 사실이라서, 대놓고 데려오진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뒤에서 집이나 생활비 같은 걸 조용히 지원해 주었다.

‘사실은 데려오고 싶었다고 그랬지.’

하지만 슐로이츠의 친부는 일단 그를 가문에서 제적시키지는 않았다. 이런 암흑 구역으로 보내는 것도, 공식적으로는 귀족이 이행해야 할 의무 중 하나였으니까. 게다가 슐로이츠의 친가는 한미한 외가보다 훨씬 좋은 가문이었다. 대놓고 충돌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이렇게 뒤에서나 몰래 지원을 해 주는 걸로 아픈 손가락인 슐로이츠를 보살폈다. 이나마도 슐로이츠의 외조모가 죽으면서 끝이 났다고 했지만….

슐로이츠는 엔리코르와 동갑인 설정이었으니, 지금 열 살일 것이다. 어린 나이인데 건강한 상태도 아니다. 친부가 그에게 몰래 먹인 약도 그랬고, 계모가 이틀에 한 번씩 보내오는 식량에는 독도 섞여 있었다.

‘…저 새끼들은 뭐지?’

나는 멀리서 멈춰 서서 눈을 둥글게 떴다. 슐로이츠의 집 앞으로 딱 봐도 좋은 차림, 그러니까 귀족의 차림새를 한 이들이 껄렁껄렁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는 바구니를 쥔 놈들은 삐딱한 자세로 슐로이츠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대중없이 쾅쾅 문을 두드렸다. 얼마 후 문이 열리고, 소년이 걸어 나왔다.

“…….”

항상 머릿속에 그리던 사람을, 몇 년을 내내 되짚어 보기만 하던 그 애를 실제로 보는 건 생각보다 더 기분이 이상해지는 일이었다. 그나마도 놈들의 몸에 가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마님이 네가 불쌍하다고 또 식사를 보내셨다.”

‘아.’

한 박자 늦게 알았다. 계모가 돈을 주고 매수했다던 그 심부름꾼들인가 보다.

“정기적으로 챙겨 주시는 마님을 생각하면 내가 더 황송할 지경이야.”

“도대체 너 같은 게 뭐가 불쌍하다고…. 쯧…. 감사해하면서 먹어라.”

슐로이츠는 아무 말 없이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때였다. 놈들 중 하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그놈이 슐로이츠를 홱 밀쳤다. 슐로이츠가 비틀거리든 말든 집 안으로 침입한 놈이 곧 씩씩대며 다시 튀었다.

“뭐야? 이 새끼 이거 저번에 준 걸 반도 안 먹었는데?”

‘안 먹었다니?’

하지만 놈의 손에는 상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원작에선 남긴 게 없다고 나오지 않았었나?’

내가 읽은 거랑 다른데?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고성이 오갔다. 한순간에 몸싸움이 일어났다. 아니, 한쪽은 잘 먹지 못해 깡마른 소년이고 다른 한쪽은 건장한 남자들인데 몸싸움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일방적인 구타였다.

“가문의 수치인 주제에 감히 마님의 호의를 거절해? 건방지고 더러운 놈! 네가 아직도 가문의 후계자인 줄 알아?”

‘뭐야?’

“이 새끼 입 잡아 벌려!”

“잘 걸렸다, 이 새끼야. 재수 없는 네 눈깔을 우리가 얼마나 봐주고 있었는지 알아?”

슐로이츠는 멱살이 잡혀 몸이 달랑 들려 있었다. 놈들은 소년의 턱을 우악스레 잡아 벌리고 음식들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슐로이츠가 욱여넣는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토하자 그걸 다시 먹이기까지 했다.

‘뭐야? 저거 뭔데?’

아니 시발, 원작에서 저런 회상 없었잖아!

순식간이었다. 내 발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나는 어느새 놈들의 앞에 서 있었다.

“……?”

“이 조막만 한 건 또 뭐야?”

건장한 남자 셋이 소년 하나를 때리는데도 주변의 사람들은 다들 못 본 척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알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슐로이츠를 때리는 거였고. 그런데 갑자기 작달막한 게 튀어나와 막으니 순간 당황한 눈치였다.

“…귀족 같은데?”

“뭐야? 어디 가문의 영애지?”

놈들은 내 옷차림을 보고 당황하는 눈치였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이곳의 빈민들과는 달리, 나는 잘 다듬어진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니.

“무슨 용건인진 모르겠는데 가 보십쇼, 아가씨. 훠이.”

놈들은 어린애에게 겁을 주어 내쫓듯이 날 향해 눈을 부라리며 위협했다. 나는 다른 의미로 충격에 빠져 있었다. 슐로이츠의 얼굴이 이미 피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와 이 미친 새끼들.’

눈깔이 돌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래 사실 나는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왔었다.

어쨌든 귀족 가문의 수하들이니. 저놈들과 공적인 트러블이 있어야 나도 슐로이츠를 구할 정당한 명분을 확보하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일부러 놈들에게 좀 시비를 걸려고 계획은 했는데. 이건 너무 심하질 않은가. 지금 나를 자극하려고 이러나? 그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얘가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인물이 아니더라도 비쩍 마른 애를 이렇게까지 학대하는데 못 본 척을 할 수 있나?

와중에 슐로이츠는 음식물에 기도가 막히기라도 한 모양인지 쿨럭, 하고 기침을 했다. 음식물과 피가 함께 쏟아졌다. 놈들 중 한 명은 그걸 보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슐로이츠의 배에 주먹을 퍽, 하고 꽂아 넣었다.

“때, 리… 지…! 마…!”

그리고 나는 흥분한 상태에선 말이 극도로 느려졌다. 음절 하나하나가 제대로 이어지질 않았다. 마음 같아선 ‘야 이 개새끼들아 뒤지고 싶냐!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라고 외치고 싶은데 마음대로 말이 나오지 않으니 숨이 막히게 답답했다.

“하?”

놈들은 내 느리디느린 말을 듣자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망토를 홱 내렸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아이구야…?”

“엄청 예쁘신데. 어디 특이한 취미 가지신 분의 장난감인가?”

“맞네, 맞아.”

“말병신이지만 얼굴은 진짜 반반하네. 피부도 엄청 하얗고. 내가 데려다 키우고 싶은데?”

“이 새끼 이거 미친놈 아냐?”

“아니,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컥!”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비명에 묻혔다. 고간을 걷어차인 남자가 몸을 웅크렸다.

“이 미친 계집년이!”

남자가 내게 손을 들어 올린 그 순간이었다. 나는 무언가 조막만 한 몸뚱어리가 내 몸을 홱 감싸 껴안는 걸 느꼈으며, 동시에 놈들의 손발들이 기괴하게 꺾이는 걸 보았다.

“아아악!”

비명 소리가 귀를 찢었다. 순식간이었다.

놈들은 온몸이 꺾여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특히 내게 직접 주먹을 날리려고 했던 놈은 여전히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신지.”

슐로이츠의 품에서 날 순식간에 빼내 똑바로 세운 기사가 정중하게 물었다.

“비너스…. 괜찮아.”

비너스 에케로트. 그는 왕도의 저택에서부터 날 따라온 전담 호위 기사였다. 사랑의 여신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이름과 어울리는 빛나는 적갈색 머릿결과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미소년 기사. 하지만 결코 약해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뒤에서 숨어 있던 르페브르 가문의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놈들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이만한 기사들을 끌고 다닐 정도면 내가 어느 귀족의 장난감이 아니라, 자신들을 장난감으로 갖고 놀아도 될 정도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나마도 입이 쥐어 터져서 말도 똑바로 못했지만.

“으어…. 으어…?”

경악과 당황으로 얼어붙은 눈을 보니 지금이야말로 귀신이 될 때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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