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곧 죽을 조연으로 환생했다-(3) (4/190)

‘기껏 좋은 집안에서 다시 태어나서 불치병도 치료했는데 이번엔 괴수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니.’

과로를 안 해도 되는 집에서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이 들던가. 매일 매일 내 방을 찾아와 애정을 다해 꼭 껴안아 주는 부모님도 흔한 게 아니었다. 일단 내 기준에선 그랬다.

‘흠….’

분명 내 최애가 괴수를 성공적으로 막으면서 죽었는데. 그럼 내가 도와줘서 괴수를 일찍 막고 최애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애초에 걔가 살아만 있었어도 왕국이 그렇게 본격적 멸망 루트를 타기 시작하진 않았을 텐데.’

불세출의 기사이자, 구국 영웅이었던 그 애는 어릴 적 먹었던 독 때문에 허무하게 죽어 버린다. 만약 살아 있었으면 그렇게 왕국이 멸망하지도 않았을 거고. 난 잠시 자그마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종이 위에 그의 이름을 써 보았다.

슐로이츠 프로키온

사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머릿속으로 몇천 번이나 곱씹었던 이름이었다. 죽기 전에는? 그야 몇만 번은 곱씹었을 이름이었고.

‘…근데 걔한테 어떻게 가지?’

나는 고민에 잠겼다. 슐로이츠는 세계관 최강자였지만, 과거가 몹시 불우했다.

‘일단 지금은 빈민가에 있을 때란 말이야….’

원래 슐로이츠는 번듯하고 전통 있는 귀족 가문의 적장자 소생이었다. 문제는 슐로이츠의 아비였다. 그놈은 아내가 임신한 동안에, 다른 여자한테 홀딱 빠지는 천하의 쓰레기였다. 심지어 내통하는 여자가 제 아이를 임신하자, 부인 자리를 바꿔 끼울 궁리를 했는데,

그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

“네 어미가 사통을 저질렀다. 너는 내 자식이 아니야.”

슐로이츠의 어머니가 부정을 저질렀다며 몰아가는 것이었다. 이 왕도의 귀족 가문들, 통칭 ‘탑의 가문’이라고 칭해지는 이들은 대대로 특징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슐로이츠는 이 능력을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발휘하지 못한다.

그걸 빌미로 친부는 슐로이츠를 내쫓는다. 그래도 남들의 이목이 있으니 아예 갖다 버리진 못하고, 위험한 적색 지구로 군역을 지라고 보낸다. 보통 가문의 승계 싸움에서 밀려난 이들이 쫓겨 가는 곳으로. 눈 가리고 아웅이 따로 없었다.

‘실은 지가 약을 처먹여 놓고.’

그랬다. 슐로이츠의 미친 친부가 실은 그가 이유식을 먹을 즈음부터 약을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슐로이츠가 모종의 사건들을 겪고 난 뒤 버려진 아이에서 군부 총사령관이라는 폭발적인 승급을 한 후에야 밝혀진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부가 슐로이츠에게 몰래 먹였던 능력을 억누르는 약이야 나중에 희석이 되긴 한다. 문제는 그 친부의 내연녀였다.

‘끼리끼리 논다고.’

친부가 슐로이츠를 죽이지는 않고 변방으로 내쫓기만 하자,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가문의 관리인을 몰래 매수해, 슐로이츠에게 독약을 조금씩 먹이게 하는데 그게 몸에 조금씩 쌓였다. 결국 슐로이츠는 후일 죽음의 위기에 처한 남주를 구해 주다가 몸에 쌓인 독 때문에 죽음에까지 이르고 만다.

슐로이츠는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허공을 한번 바라보았다. 괴수들은 경계선을 넘었고, 군부엔 최고 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태였다.

방금 전 괴수에게서 햇병아리를 구해 내느라 반사적으로 막아 낸 팔은 이미 부러진 상태였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다만 슐로이츠가 호흡을 내쉴 때마다 가슴에 퍼져 있는 반점이 끔찍한 통증을 안겨 주었다.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던 독이 기어이 한쪽 팔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이곳에서 죽겠지.

삶에 미련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더 길었어도 좋았을 텐데.

“총… 총사령관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등 뒤에서부터 들려와 슐로이츠가 한숨을 내쉬었다. 살려 놨더니 돌아가란 명령도 듣지 않고 제 주위를 뱅글뱅글 맴도는 녀석이 성가셨다.

“돌아가 네 자리를 지켜라.”

“하지만….”

“살고 싶어서 군부로 온 거 아니었나?”

“저는…. 저는.”

“넌 죽기에는 어려.”

슐로이츠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죽지 말란 뜻이다. 죽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잖아.”

그 마지막 말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일지도 몰랐다.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슐로이츠가 마지막으로 지었던 웃음을 반추하자 갑자기 머리에 열이 몰렸다.

‘이 개놈들…!’

“아, 아가씨, 갑자기 왜 우세요?”

하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니…. 세상의… 부조리함… 때문에….”

빡쳐서….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돌려서 말했다.

“분노하고… 있었어….”

내 말에 하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그녀들이 꺄 소리를 지르며 나를 껴안아 들었다.

“우리 아가씨는 벌써부터 말씀하시는 게 도련님보다 낫다니까요.”

“어디서 그렇게 어려운 말을 배워 오신 거예요?”

“천재 아니실까?”

“…….”

하녀들이 흐물흐물 웃음을 짓는 걸 보자 조금 머쓱해졌다. 좀 더 애처럼 말해야지 하고 항상 생각은 하는데,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가끔 이렇게 이질적으로 어른스러운 표현이 튀어나오곤 해서 문제였다.

“그래도 울지는 마세요, 아가씨.”

나를 품에 껴안은 하녀가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내 뺨을 조심조심 닦아 주었다.

“아가씨가 우시면 가주님과 마님이 함께 우실 거예요.”

“그럼… 안 울게….”

“착하셔라.”

나는 아직 말을 길고 매끄럽게는 못 했다. 성대가 한 박자 늦게 반응하기 때문에 말도 느렸다. 하지만 자라면서 점점 괜찮아지고 있기 때문에 조급하거나 불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내가 열네다섯이 되면 남들처럼 충분히 말을 잘할 것이다.

‘이제 몸도 제법 자유로우니까.’

나흘 전부터 컨디션이 제법 괜찮아졌으니 이젠 슐로이츠를 보러 가야 한다. 사실 누워서 요양을 하는 게 좋겠지만 슐로이츠의 불행이 너무도 빨리 찾아온다.

‘지금도 독을 먹고 있을 거란 말이지. 아플 텐데 말할 사람도 당연히 없고….’

생각할수록 마음이 찢어져서 안 되겠다. 당장 내 소중한 최애를 보러 가야겠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귀족이다.”

“귀족이야.”

마차에 난 창문 밖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덧창과 유리창을 열어 놓아 아주 잘 들렸다.

나는 쳐진 커튼 밑으로 바깥의 풍경을 살폈다. 회색이 가득하고 어두침침한 이곳은 빈민가. 정확히는 왕도 변방에 위치한 암흑 구역 중 하나인 ‘적색 지구’였다.

가난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게 아니라 치안도 약하다 보니, 각종 불법이 넘치는 곳. 그래서인가 껄렁껄렁하게 서 있는 깡패들도 제법 보였다. 그리고 저런 별 볼 일 없는 깡패들은 있어 보이는 마차와 근엄한 기사 조합에 약해졌다.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적색 지구에는 르페브르 가문이 후원하는 고아원이 있었다.

‘못 올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나는 슐로이츠를 보러 가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가장 먼저 매일 부모님과 다과를 먹는 시간에 고아원의 비리에 관한 얘기를 슬쩍 흘렸다. 어디서 주워들었다는 식으로. 내가 시한부였던 까닭에 내겐 무척 무른 편인 두 분은 내 얘길 허투루 듣지 않으셨다.

덕분에 얼마 후 가문이 후원하는 고아원에 조사단이 기습적으로 파견될 예정이라고 했다. 이 얘길 듣자마자 나는 바로 어머니의 다리에 매달렸다.

“저요! 제가… 갈게요! 제가 가고… 싶어요…!”

내가 많이 아팠던 데다가, 몸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나도 또래의 아이들에게도 베풀고 싶다고 말했다. 난 좋은 부모님이 있으니 아팠을 때도 괜찮았지만, 그렇지 않은 애들은 삶이 얼마나 서럽겠냐고.

내가 갑자기 다리에 매달리는 바람에 당황했던 어머니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우리 블란이는 어쩜 이렇게 착할까.”

엔리코르보다 말투가 어른스러운 걸 어쩌면 좋겠냐며 웃음도 지으셨다. 어쨌든, 어머니가 결국 밤새 아버지와 의논하신 끝에 나는 조사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방계의 영애 이름을 빌렸다.

“내리시죠. 아가씨.”

풋맨의 도움을 받아 내리자마자 바로 번듯한 고아원이 눈에 들어왔다. 꺼지지 않는 봄. 비리로 점철된 고아원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이름이었다.

“누구… 십니까? 어느 가문의 영애이신지… 요?”

고아원 앞에서 귀족의 마차가 멈춰 설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당황해서 서둘러 뛰어나온 원장은 굉장히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

“여기 보면… 100명인데… 왜 아기들이 반도… 없어?”

“그, 그게….”

“밥 양은… 이게 다야? 아기들은 원래… 이만큼만 먹어?”

“그게 아니라, 아이들이 아침을 많이 먹어서….”

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원장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거짓말쟁이.”

“……!”

너 내가 지금 딱 안다. 분식 회계에 이중장부에 할 수 있는 비리는 다 저질러 놓았다는 게 각이 나온다고.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최대한 애처럼 입을 열었다.

“오빠가… 그랬는걸. 분, 분식… 이라고? 아무튼… 그랬어.”

내 뒤에 서 있던 가문의 감찰관이 말했다.

“분식 회계를 말씀하시려나 보군요. 도련님이 알려 주셨습니까?”

“으응.”

“도련님이 이중장부라는 말도 혹시 알려 주셨습니까?”

“응.”

“그렇다면 설명이 쉽겠습니다. 아이들이 한 끼에 먹어야 할 양을 일곱 끼에 나눠서 먹이고 있었습니다.”

어린애한테 꼬박꼬박 보고하는 게 웃겼지만, 아무래도 여긴 신분제가 철저한 곳이라서.

본가에서부터 함께 파견된 회계 감찰관들은 아주 일을 잘했다. 뭐라고 할까, 마치 펜과 종이를 든 저승사자를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고아원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고, 나는 감찰관들이 가져온 장부와 겁먹은 채 눈치를 살피고 있는 아이들을 차례로 보았다.

원래는 슐로이츠를 보러 오기 위한 수단이긴 했다. 하지만 비쩍 마르고 잘 씻지 못한 아이들을 직접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르페브르 가문의 후원금을 얼마나 삥땅해 먹었으면 애들이 이런 꼴이란 말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