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곧 죽을 조연으로 환생했다-(2) (3/190)

“야, 블란데아.”

‘……!’

나는 비명을 삼키며 뒤로 넘어졌다.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다시 일어나자 엔리코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내 손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뭔데? 왜 그렇게 놀라?”

왜 얘가 여기 있어? 밤새 공부했나?

내가 놀라든 말든 엔리코르는 내 손을 잡았다.

“후원에 가려고? 지금 몇 시인 줄은 알아? 너 같은 아기는 밤에 나가는 거 아니야.”

엔리코르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다시 방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나는 바로 기를 쓰고 버텼다.

“왜? 그렇게 나오고 싶으면 낮에 나와. 밤바람은 너 같은 꼬맹이가 맞기에는 춥단 말이야.”

물론 한낮의 따스한 온기가 이 허약한 몸엔 좋겠지.

하지만 나는 반드시 밤에, 그리고 의사의 시선을 피해 몰래 후원으로 나가야 했다.

저 후원으로 나가야 이 시한부 몸이 살아날 방법을 거머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엔리코르 이 쪼끄만 놈의 힘은 너무 셌고, 나는 결국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야? 울어? 아니, 왜 울어!”

내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자 엔리코르가 심하게 당황했다. 꼬맹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낯으로 내 손을 놓았다.

“아씨….”

엔리코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짧은 사이 꼬맹이 주제에 아주 치열한 고민을 한 것 같은 엔리코르가 결국 몸을 굽히고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한텐 비밀이야. 나 진짜 혼나.”

나는 눈물 젖은 얼굴로 엔리코르의 등에 업혔다.

“잠깐만 나갔다가 오는 거야. 둘이 비밀인 거야.”

업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엔리코르는 나를 업은 채 문고리를 돌렸다. 블란데아로 태어나고서는, 처음 맞아 보는 것 같은 차가운 밤바람이 내 뺨을 세게 때렸다.

엔리코르의 등에 업혀 있던 나는 손을 뻗어 후원의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

엔리코르는 날 업은 채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세서 그런지 기침이 나왔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고, 얼마 후….

“야! 블란데아!”

거의 비명 같은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피…. 피를 토하잖아…! 너 안 아파? 무통증 때문이야? 그래서 아픈 것도 몰라? 말도 못 하면서 아픈 것도 모르고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너만 보면 울잖아!”

그러는 지도 펑펑 울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은 나오지 않고. 이렇게 피까지 토하는 걸 보니, 정말로 오늘이 블란데아가 죽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아빠한테 가자…. 엄마랑 아빠한테 돌아가자…. 빨리, 블란이가 아프다고 빨리….”

특히 아직 여섯 살도 안 된 엔리코르는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로 연신 그 말만 중얼거리는 엔리코르가 바로 뒤돌아섰다.

‘안 돼!’

그냥 가라고 이 자식아!

나는 엔리코르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쥐어뜯었다.

“악!”

차라리 날 놔주면 좋겠는데 날 업은 이놈의 쪼끄만 손엔 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나는 엔리코르의 머리카락을 조종해 겨우 내가 원하는 후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야! 너 피 계속 토하잖아! 진짜…!”

엔리코르는 날 두고 가지도 못하고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니 어쩌지도 못했다. 나비 떼가 앉은 듯한 우아한 느낌의 조명이 반짝였다. 소설에서 읽은 지문 중 그런 말이 있었다. 훌륭한 정원사는 사시사철 정원의 꽃이 지지 않게 한다지.

덕택에 이 꽃들이 군락을 지어 후원에 퍼져 있었다.

‘찾았다….’

꽃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앨리스꽃. 사시사철 피어 있는, 노란 꽃잎에 푸른색 술을 단 희한한 꽃.

원래는 관상용으로만 쓰이는 꽃이었다. 왕국민도 심하게 배를 곯지 않는 이상, 이 꽃과 줄기와 뿌리를 먹진 않았다. 특히 아이들은. 약한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배앓이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는 달랐다.

르페브르 가문에서, 어린 딸이 죽은 후 그 병의 치료제를 개발했는데 가장 주요한 재료로 꼽힌 게 이 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란데아가 죽은 후, 르페브르 영지에 위치한 성의 후원에는 이 꽃만을 가득 심게 했다고 원작에는 적혀 있었다.

차라리 이 꽃을 씹어서 입에 넣어 줬으면 됐을 거라고, 후원에 그토록 피어 있는 꽃을 알아보지 못한 게 비극이었다고. 엔리코르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묻은 채 회상하던 장면도 있었다.

그러니까.

‘난 이제 살 거야. 먹고 살 거야…!’

후원에 주저앉은 나는 일단 꽃들을 한 뭉텅이 뜯어내어 입 안에 가져갔다. 하지만 바로 제지당했다. 엔리코르가 몹시도 당황한 표정으로 내 두 손을 붙잡은 것이다.

“야! 안 돼! 이거 먹는 거 아니야!”

‘알아!’

“안 된다니까! 배고파? 주방에 가자! 1층에 바로 있어! 죽 달라고 할게! 죽 먹자!”

‘아, 제발 좀!’

아무리 소리쳐도 내가 앨리스꽃을 놓지 않자, 엔리코르는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엔리코르는 내게서 꽃들을 빼앗은 후, 아예 후원에 핀 앨리스꽃들을 마구 밟기 시작했다. 내 눈이 동그래졌다.

‘야!’

나는 엔리코르의 배를 머리로 퍽 하고 쳤다. 엔리코르는 풀썩 넘어졌다. 춥디추운 꽃밭 위에서 거의 난투극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엔리코르는 내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난 이제 감각도, 통증도 없어서 맞아도 안 아프지만 얜 아니니까.

거기에 나는 기침을 할 때마다 피를 토했다. 결국 엔리코르는 점점 표정이 서러워지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진짜 왜 그러는데! 넌 이거 먹으면 죽는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너 죽는다고 그랬단 말이야!”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대여섯 살짜리다. 엔리코르는 패닉 상태에 빠졌는지 벌벌 떨면서 울었다.

달래 주고 싶었지만…. 엔리코르가 꽃을 다 짓밟는 바람에 근처에 있는 군락으로 기어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짜 큰일이네.’

눈앞이 핑 도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본능적인 직감이 왔다. 난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분명 오늘이 블란데아의 제삿날인 것이다. 그러니….

풀썩.

온몸에 힘이 빠졌다. 새로운 앨리스꽃의 군락을 앞에 두고 쓰러진 나는 팔을 뻗어 간신히 꽃을 한 움큼 뜯었다. 입에 밀어 넣은 후 씹지도 않고 삼켰다. 풀 특유의 맛이 날 것 같은데 내가 무통증을 앓고 있어서 그런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블란아! 블란아아!”

펑펑 울면서 뛰어오는 엔리코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냥 닥치는 대로 입 안에 앨리스꽃을 밀어 넣었고, 삼켰고,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엔리코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

“아가씨?”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녀가 편지를 내밀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도련님이 편지를 보내셨어요.”

엔리코르였다. 편지를 받아 든 나는 편지 봉투를 쭉 뜯어 내용을 읽었다. 아직은 앳된 목소리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답장… 해야겠네.”

“도련님이 기뻐하시겠어요.”

안 하면 할 때까지 편지를 보내는 놈이니까…. 나는 편지를 든 채 방으로 향했다. 그날, 엔리코르를 머리로 박치기하고 앨리스꽃들을 뜯어 먹은 후 몇 년이 지났다.

원래 정제해서 먹어야 하는 걸 입 안에 무식하게 밀어 넣었으니까 내 몸은 정말 난리가 났었다. 눈앞이 붉어질 때까지 피를 토했고, 손발이 벌벌 떨려 혼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살았다. 완만한 곡선의 형태로 꺼져 가던 내 생명이 더 이상 하락점을 찍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사들이 먼저 알았다.

‘앨리스꽃….’

자연히 내가 왜 갑자기 후원에 가서 그 꽃을 뜯어 먹었는지 추궁이 들어왔다. 물론 엔리코르에게.

난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살긴 살았는데, 거의 한 달을 정신을 못 차렸으며 그 후에도 과면증은 그 정도가 심해서 몇 년이나 낫지를 않았다.

어찌 되었든 앨리스꽃은 내 불치병에 커다란 효과를 보였고, 이후로 바로 실험이 재개되었다. 나중에야 도대체 그때 왜 앨리스꽃을 뜯어 먹었느냐는 질문에, 나는 내내 생각해 왔던 변명을 꺼냈다.

“꿈에서… 누가… 먹으라고… 해서….”

그 말에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얘기하며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엔리코르도 울고 아버지도 눈물을 보였다.

집은 심하게 뒤집혔지만, 내가 그 난리를 피운 덕에 원작보다도 치료제가 훨씬 빨리 완성이 되었다. 덕분에 지금 나는 일곱 살이었고, 앓았던 병증들도 나흘 전쯤을 기준으로 거의 다 치료가 된 상태였다. 아직도 드문드문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책상에 앉아 쓱쓱 답장을 쓴 후, 나는 깃펜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다음엔 어떻게 살지?’

세 살 생일을 앞두고 찾아온 죽음의 위협을 피하긴 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내 최애까지 죽인 세상 어디 잘되나 보자

원작 소설의 댓글 창에는 내가 달았던 이 댓글뿐 아니라 다른 팬들도 온갖 저주를 퍼부었는데 이유는 물론 팬들이 한을 처먹은 이유도 있지만, 다른 등장인물들도 점점 죽는 횟수가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설마 얘가 죽겠어?

죽었다.

설마 얘를 죽이겠어?

죽었다.

이 미친 매운 맛의 피폐 소설. 인기 많은 조연이라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화수엔 엔리코르도 죽었으니까. 그날 엔리코르의 팬들이 돌아 버렸던 걸 아직도 기억한다.

엔리코르가 죽은 이유도 슬펐다.

그는 괴수에게 점령당한 르페브르 영지의 성에 무리하게 진입했다가 쏟아지는 괴수에게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엔리코르가 영지에 목숨 걸고 뛰어든 이유는 하나였다. 성의 후원에 있는 죽은 여동생의 무덤에서 유골을 회수해 오기 위해.

‘이런….’

일단 난 살아났으니 엔리코르가 유골을 회수하러 갈 이유는 없어졌지만, 문제는 어찌 되었건 르페브르 영지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괴수가 등장한다는 거였다.

동부에 위치한 르페브르 영지는 광활한 왕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대대로 공적을 쌓은 덕에 노른자 땅이 가득했다. 그런 영지가 괴수에게 먹힐 정도였으니 소설이 중후반으로 가면서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말도 못한다.

르페브르 영지가 파괴될 정도면 그 이후는 솔직히 왕도도 반파가 났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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