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곧 죽을 조연으로 환생했다
내가 처음 소설 속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안 건 포대기 안에서였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알게 되었다. 그렇게 과로를 하더니 내가 기어이 죽고 새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다행히도 나는 좋은 집에서 태어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눈을 뜰 때마다 항상 젊은 두 남녀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아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고, 온화한 인상의 그들이 내 부모라는 사실도 천천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그들이 왜 항상 눈물을 머금고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들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걸 제대로 알아듣기도 전에 난 늘 잠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과면증에 가까운 강한 수면욕에 늘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나는 무슨 변덕인지 눈을 말똥 뜰 수 있었다.
“웬일로 잠을 자지 않는구나. 내가 네 이름을 정해 온 걸 안 것 같구나.”
다정한 목소리.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를 조심스레 껴안고 말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네 이름이란다. 황금처럼 눈부시고 찬란한 나날을 뜻하지.”
이름을 듣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싸늘해지는 기이한 느낌. 갑자기 이게 무슨 기분일까.
시간을 들여 제대로 읽어 내기도 전에 아버지의 표정이 흐려졌다.
“블란데아, 이 아비가 르페브르의 가주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꼭 건강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래, 아가.”
옆에 있던 어머니가 눈물 젖은 눈을 하고서 말했다.
“어서 나아서 오라버니도 봐야지. 엔리코르가 곧 아카데미에서 돌아올 거란다.”
엔리코르….
르페브르….
엔리코르 르페브르?
아주 익숙한 이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온 몸을 다해 부인하고 싶을 정도로 익숙한 그 이름은 내가 죽기 전날까지 읽던 소설 속 조연의 이름이었다.
어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봐요. 엔리코르를 닮아 금발이에요. 누가 엔리코르 동생 아니랄까 봐. 아가, 네가 불치병만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또 흐느낌으로 이어지는 목소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눈시울을 붉혔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나 지금 어디에 누구로 태어났다고?’
그 미친 몰살 소설 속에 다시 태어났다고?
등장인물 사망률이 80%가 넘는 미친 소설. 심지어 제목까지 미친 소설에….
세 살도 안 돼 죽는 그 소품 수준 조연으로 태어났다고?
***
<미친 미인의 최후>.
내가 태어난 소설의 이름이었다.
제목부터 강렬한 이 소설은 심지어 연재 중이었다. 끝도 보지 못한 소설을 어떻게 조연의 이름만 듣고도 알 수 있었냐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조연에게 내가 마음을 홀딱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 조연이 주인공을 지키다가 죽어 버린 날, 나는 진짜 핸드폰을 붙잡고 울면서 댓글을 남겼다.
내 최애까지 죽인 세상 어디 잘되나 보자
그렇게 증오를 불태우며 최애가 나오는 부분을 다시 보려고 몇 번이고 소설을 복습했던 덕분에 이 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듣자마자 알아 버린 것이다.
나 그 소설에 환생했네? 심지어 회상으로만 등장하는 단명 조연으로 태어났네?
블란데아 르페브르.
완결 전까지 소설을 주야장천 반복해서 읽은 덕에 배경 지식은 빠삭하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블란데아는 에피소드도 없는 단역이었지만, 다행히도 친오빠인 엔리코르가 제법 비중 높은 조연이었다. 가끔 이벤트 격으로 나오던 조연들의 외전까지 모조리 읽은 덕에 딱 한 줄로 나오는 블란데아 르페브르의 생애를 기억할 수 있었다.
“내 동생은, 블란데아는.”
엔리코르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세 살도 되지 않아 고통스러운 병으로 죽었어.”
‘아씨!’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아기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
“가주님. 마님. 치료제 개발이 여의치가 않습니다. 아가씨가 앓는 불치병이 너무 희귀해서…. 가문의 힘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만….”
집사가 어두운 안색으로 전하는 말은 이번에도 비슷했다.
‘대가문이어도 치료제를 새로 개발하는 건 어렵구나.’
내가 태어난 가문인 르페브르는 광활한 왕도에서도 가장 앞줄로 손꼽히는 가문이었다. 덕택에 르페브르는 나를 치료하기 위한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과 지식이 있어도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원작에서는 르페브르 가문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문제는….
내가, 아니 블란데아가 죽고 몇 년이 걸린 후에야 완성하다는 사실이다.
‘안 돼.’
내 건강 상태 때문인지, 어머니와 아버지도 나날이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데도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때면 늘 다정한 미소를 지어 주곤 했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뻗고 싶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깨어 있는 시간도 거의 없는데 눈을 뜰 때마다 몸이 굳어 가는 게 느껴졌다. 감각도 점점 사라지는 병이라는데 그냥 이렇게 조금씩 죽어 가는 걸까. 치료제를 빨리 구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블란데아. 자?”
나는 침대에 누워 내게 얼굴을 들이대는 꼬맹이를 보았다. 엔리코르 르페브르. 나보다 고작 세 살이 많은 어린애는 멀뚱멀뚱 나를 보다가 말했다.
“너 벌써 두 살인 거 알아?”
‘알아, 이 녀석아….’
“빨리 침대에서 나오면 좋겠네. 나랑 소풍 가자.”
‘언제쯤 침대에서 나갈 수 있을까….’
매번 찾아와 종알거리는 엔리코르에게 아무 대답이나 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러니까 세 살도 되기 전에 죽어 버린 블란데아는 정말로 큰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으며 신경에도 문제가 있어 극심한 무통증(無痛症)까지 앓고 있었다.
세 살이 되어 죽기 전, 어떻게든 살아날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데….
하지만 다짐도 무색하게 나는 또 금세 수마에 빨려들어 버리곤 했다. 건강 상태 때문에 과면증을 앓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찾아 온 엔리코르 르페브르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해 주었다.
“두 달 있으면 네 생일이야. 블란데아. 세 살이니까.”
‘알려 줘서 고맙다, 제기랄….’
내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빠르게 흘러 있었다. 기껏해야 24개월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제야 왜 가족들이 볼 때마다 젖은 눈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계속 잠만 잤다니…!
이제 하루라도 빨리 계획하던 것을 실행해야 할 때였다.
얼마 후.
모두가 잠든 늦은 밤, 나는 요람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이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몇백 번의 고배를 마셨는지 모른다.
그래도 죽기는 싫었던 모양인지 병적인 수준으로 나를 집어삼키던 수마가 오늘만은 잠잠했고, 굳어 있던 몸도 어느 정도 움직일 만했다.
‘후원으로 나가야 산다.’
나는 침대에 쳐진 철장을 잡고 넘어가려다가 바닥으로 우당탕 굴러떨어졌다.
방바닥에 두툼한 카펫을 깔아 놓지 않았으면 방금 분명 뇌진탕으로 죽었을 것이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바깥으로 향했다.
“네 방에서 왼쪽 복도를 따라 쭈욱 나가면 후원이 있어.”
엔리코르가 옆에서 종알대던 말들 중 유심히 들었던 내용을 머릿속에 상기하며 열심히 기었다가 걸었다가를 반복했다. 내 방은 1층에 있었고, 덕분에 후원이 멀지 않았다. 아니, 아주 가까웠다.
문제는 문이 닫혀 있을 거라는 사실인데…. 이때를 위해 방에서부터 여기까지 기어 왔다. 일어나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해 돌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