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Epilogue. 청혼 =========================================================================
Epilogue. 청혼
“네에에―? 뭐라구요? 뭐, 뭘 한다구요? 라테에―!”
“말도 안 돼! 이건 배신이라구요!”
“이럴 순 없어요! 라테는 우리 모두의 거라구요!”
“언니!”
도대체 애들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걸까, 라텐테의 주변에 있던 소녀 무리가 갑자기 우르르 개떼처럼 내게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와, 정말 진풍경이다. 소름끼칠 정도로. 나는 의자를 슬쩍 뒤로 빼 데스크에서 슬쩍 몸을 뗐다. 왠지 그대로 있다가는 멱살이라도 잡힐 것 같은 분위기였다.
“뭐야, 뭔데, 왜?”
“언니, 라테랑……,”
“야, 비켜, 내가 말할 거야.”
뭐야, 뭔데, 소녀들의 위협적인 기세에 영문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갑자기 그 사이를 가르고 라텐테가 내 앞에 섰다. 그는 씩씩대고 있는 소녀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며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휘휘 쳤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언제까지 니들하고 놀아줘야하냐?”
“라테에! 언니이!”
소녀들이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도서관이 떠나가라 바락바락 외친다. 기차회통을 삶아먹었나,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라텐테를 노려보았다. 분명 원인 제공은 그가 했을 테니까.
“애들한테 도대체 뭐라고 한 거예요?”
그리고 라텐테는 내 성난 눈초리에도 별로 아랑곳하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너랑 결혼할 거라고 했는데.”
“겨우 그것 때문……네?”
때문에 별것 아닌 줄 알고 넘기려던 나는, 그 무미건조한 어투 속의 내용에 한 박자 늦게 기겁했다. 잘못 들었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라텐테를 보고 있던 시선을 소녀들에게로 돌리자, 소녀들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이닥친 기묘한 충격에, 안면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 뭐라고요?”
그런 나를 보는 라텐테의 표정도 이상해졌다. 그는 내가 왜 이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듯한 구겨진 표정을 했다.
“너는 왜 놀라는 거야.”
왜 놀라냐니, 당연히 놀라는 게 정상 아니야? 나 또한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안 놀라게 생겼어요?”
“내가 한두 번 말한 것도 아닌데 놀랄 이유가 없잖아.”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죠. 프러포즈를 그렇게 틈만 나면 장난치듯이 하는데 그걸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장난이라니! 그런 섭섭한 말을.”
“어, 라테, 언니…….”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던 소녀들이 금세 안절부절못하고 어수선해졌다. 아무리 기가 세니 뭐니 해도 결국 애들은 애들이었다.
옆에 있는 무수한 시선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롯이 나만 보고 있던 라텐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의 보랏빛 시선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좋아, 장난치는 것 같이 해서 못 받아들였다 이거지.”
말을 마친 입매는 단호하게 굳어진다. 뭐야, 뭘 하려고? 안면근육이 다시금 꿈틀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몸을 슬쩍 더 뺐다. 라텐테는 그런 나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주변에 있던 소녀들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야, 너네, 일찍 가. 오늘 영업 끝.”
그러자, 넋을 놓고 있다 뜬금없이 희생양이 되어버린 소녀들이 다시금 분기탱천하기 시작했다.
“에에? 라테에!”
“왜요오! 아직 다섯 시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단호하게 굳어진 표정을 하고 있는 라텐테는, 정말 표정처럼 단호하게 그녀들의 항의를 맞받아쳤다.
“안 되긴 뭘 안 돼? 야, 내 나이가 벌써 스물여덟이야.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 좀 하자고. 훠이.”
아예 빨리 가라고 등까지 떠밀어준다. 소녀들은 불만에 왁왁 따져대면서도 너무나 굳건한 그의 태도에 결국 굴복하고 떠나갔다. 평소에 아무리 그녀들을 상대해도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그였는데, 오늘만큼은 조금 지쳐 보인다. 소녀들이 나가 휑해진 자리를 보며,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크게 숨을 내쉬는 그를 향해 내가 말을 건넸다.
“몇 분 안 남았는데 그냥 좀 더 놀아주지 그랬어요.”
“뭐?”
그리고 그는 나의 말에, 정말 처음으로 정색했다. 헉, 말을 잘못 했나. 흠칫 떠는데 어느새 훌쩍 데스크 위에 앉은 그가 나를 마주보며 언제 정색했냐는 듯이 웃어보였다.
“안 돼.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얘기 나왔을 때 분위기 잡아야지. 안 그래?”
그 미소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후광이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여태까지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 있었다.
“라테?”
익숙한 듯 생경한 느낌에 말꼬리를 올리자, 그가 데스크에 내려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는 한 손은 배꼽 위에 공손히 올리고, 나머지 한 손은 내 앞에 내민다. 그 손 위에는 붉은 꽃이 잔뜩 피어 있는 종이 한 장이 올라와 있었다. 잡색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 순수한 붉은색을 보는 순간, 나는 다시금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심장 소리가 머릿속을 울릴 정도로 커질 때쯤, 그 종이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며 그림 속 꽃을 그대로 만들어냈다. 그는 그것을 간단한 손짓 한 번으로, 이 세상 그 어떤 꽃다발보다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들어 내게 내밀었다.
“결혼하자, 레이.”
그의 입매가 움직이며 만들어낸 그 짧은 한 마디가, 내 귀를, 내 눈을 그에게서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심장을 울리다 못해 머릿속을 울리던 두근거림이, 온몸을 울리기 시작한다. 가슴이 벅차올라 잠시 숨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그의 진중하게 가라앉은 보라색 시선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오직 나만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장난 같은 프러포즈나 대충 받을 걸. 작정하고 분위기를 잡아버리니 너무 가슴이 벅차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멈췄던 숨을 내뱉는 데에도 한참, 입을 여는 데는 더 오래 걸렸다.
어차피 서로의 마음에 확신이 있는 상황, 정해진 답을 그저 내뱉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그것 하나가 너무 힘들어서 한참을 숨을 고르고 난 후에야 가까스로 그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좋아요.”
그리고 한 숨을 더 쉬고 난 후에, 말을 물리지 못하게 쐐기를 박았다.
“결혼해요, 우리.”
이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였다. 나는 온 진심을 담아,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 작품 후기 ============================
와 :) 완전 완결이네요!
다음 편은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질문 받을게요 ^-^!
이전까지의 코멘트들 보고, 답변을 달아드릴 만한 것들 추리고 있으니까 궁금한 점을 댓글 달아주신 분들은 다음 편 후기를 봐주세욥!
그동안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읍니다 8ㅁ8 이렇게 완결을 내는군요!
후기에서 뵈어요! 독자 여러분들, 정말 감사했습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