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0 Chapter 8. 위기와 기회는 종이 한 장 차이 =========================================================================
*
그와 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해는 저 너머로 사라지고 깜깜해진 밤하늘에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여덟 시에 가까워져 있다. 와, 이런 짐승. 나는 스카프 속에서 따끔따끔 나를 찌르는 불긋한 꽃을 손으로 누르며 그를 째려보았다.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감싼 채 평소보다 한층 더 밝은 표정으로 여유롭게 행선지를 정하고 있었다.
“뭐부터 할까. 밥? 뭐 보러 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고. 흐음……레이, 넌 평소에 밖에 나오면 뭐해?”
목은 좀 살살하지, 때 아닌 스카프라니. 나는 난생 처음으로 머리를 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그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꼬집었다. 그는 갑작스런 내 공격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비틀었다.
“아야, 왜 그래.”
“라테는 지금 나를 이 꼴을 만들어 놓고 웃음이 나와요?”
“당연하지. 지금이야말로 웃어야 할 가장 완벽한 타이밍 아냐?”
그는 그것이 정말 당연하다는 듯 바로 대꾸하며 더 환하게 웃었다. 어둠 속인데, 그 미소는 매우 선명했다. 후광이 비치는 듯도 했다. 그리고 그 감탄만 나오는 외모에 나는 결국 또 마음이 약해져 홀라당 넘어갔다. 와, 진짜 얼굴이 무기다. 이건 사기야.
조금만 더 못났으면 이렇게 얼굴에 홀랑 넘어갈 일은 없을 텐데. 나는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그 완벽한 이목구비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더 이상의 항변을 고이 접었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
“나 쇼핑하는 거 좋아해요. 야간 매장도 많아서 회사 마치고 자주 갔었어요.”
“그치만 옷은 굳이 살 필요가 없지 않아?”
“음…….”
그의 말에 나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옷을 굳이 살 필요가 없긴 했다. 그의 마법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옷도 일단 종이 위에만 그려져 있으면 그냥 그대로 뽑아낼 수 있었으니까. 패션 잡지가 곧 옷장인데 굳이 발 움직여가며 옷가게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꼭 옷을 사기 위해서만 옷가게에 가느냐. 그건 아니란 말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입어도 보고, 주인 언니들 아부 듣는 재미도 있어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가보자. 일단 밥부터 먹고.”
“그래요.”
나는 말간 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침대 위에서 내 목을 물어뜯은 건 괘씸하지만, 내 말을 들어주고 따라주는 이 남자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골목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는 간만에 스물네 번째 골목에 놀러 왔다. 근 몇 주는 목숨 지키기에도 빠듯해서 근처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는데. 입구부터 번쩍번쩍 빛나는 건 여전하네, 구인광고 게시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다.
나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화려한 입구의 조명을 잠시 제쳐두고, 그 게시판으로 향했다. 내게 이 도서관의 구인광고를 볼 수 있게 해준 자판기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다. 난 그 투명한 창을 톡톡 손으로 쳐보았다.
“여기서 도서관 구인광고 봤는데.”
내가 그쪽으로 가는 걸 의아하게 보는 듯했던 라텐테가, 내 입에서 도서관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급격하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 구인광고가 애초부터 날 노린 건지 누가 알았을까요?”
“그걸 누가 알았는지가 중요한가?”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신기해서. 이제 들어가요! 진짜 오랜만에 와보네요.”
나는 그의 팔에 슬쩍 팔짱을 꼈다. 잠시 허공에 시선을 주고 있던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 눈동자가 어째 조금 살기를 띤 듯 보이기도 했다. 뭐지?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나, 그 생각이 자리를 잡기 전에 그의 눈매가 다시 예쁘게 휘어졌다.
“들어가자.”
……잘못 본 것이었을까? 그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지만 아까 내가 잠깐 본 그런 빛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별것 아닌데, 내가 잘못 본 모양이었다.
*
정확히 오 분 뒤, 나와 라텐테는 남성복 매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분명 처음 오자고 한 건 나였는데, 이상하게 라텐테의 패션쇼가 되어버렸다. 뭐, 나야 반쯤 노리고 왔지만 라텐테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가게 언니와 내 손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었다.
“저기, 내가 왜…….”
“꺄악! 완전 잘 어울려요!”
매번 셔츠에 슬랙스만 고수하던 그가 니트에 스키니를 입고 있는 모습은 참 생소했다. 하지만 얼굴뿐만 아니라 몸 또한 완벽한 그는, 그것 또한 무시무시하게 멋지게 소화해냈다. 생각한 것보다도 더 잘 어울리잖아? 덕분에 그의 옷을 고르는 내 손이 더 빨라졌다. 내 스스로도 느낄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로 옷을 골라내는 내 손을 본 라텐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저기, 레이. 설마 그걸 다 입어보라고…….”
“입어주면 좋겠는데.”
“기왕 입으시는 거, 저도 좀 추천해드리고 싶은데!”
라텐테의 완벽한 핏에 감탄하던 매장 언니까지 불쑥 끼어들었다. 도대체 언제 골라든 것인지, 그녀의 양손에도 옷이 한 가득이었다.
그리고 난 라텐테의 입가가 경련하는 것을 보았다. 힘든가 보네, 하긴, 벌써 입어본 것만 해도 두 자리 수에 달하니까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손에 들린 옷을 다시 제자리에 걸었다.
“아뇨, 괜찮은 것 같아요. 이제 그만 입어도 돼요. 대신 이거 사요.”
그러자 사색이 되어 있던 라텐테의 표정이 순식간에 활짝 폈다.
“어, 진짜?”
진짜 힘들었나보네, 그렇게 힘들면 말을 하지.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완전히 반색하며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계산하고는 재빠르게 매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법 시원한 바깥 공기가 몸에 닿자마자, 라텐테가 이제야 살 만한 듯 크게 숨을 터뜨렸다.
“와아, 살았다.”
“그렇게 답답했어요?”
“답답했다기보다는 무서웠지. 거기 여자들이 아주 눈빛이 그냥…….”
그는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는 듯 슬쩍 떨었다. 그에 나는 깔깔 배를 잡고 웃어버렸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찔렀다.
“어, 레이다, 레이.”
정말 익숙한 목소리, 꿈속에서도 들었던 적 있었던 그리운 목소리. 이곳에서 마주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나는 몸을 살짝 떨었고, 그런 내 떨림을 느낀 라텐테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레이이―!”
다시 들어도 이 목소리는 그 목소리가 맞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고, 그 자리에는―
“얼마만이야, 진짜!”
여전히 귀여운 얼굴이 매력적인 아이데 언니가, 그 푸른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길진 않군요 -_-...
일단 2!
더 쓰러 갑니다아 'ㅁ'
다들 수능 수고하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