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1 Chapter 6. 강점이자 약점 =========================================================================
뭔가 얼굴에 낚인 듯한 느낌이 없잖아 있어 찜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라텐테의 표정이 급속도로 밝아졌고, 어깨를 움켜잡고 있던 억센 힘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고마워. 그럼 일단 앉을까?”
“어디에요?”
“여기.”
타이밍을 노린 건지, 라텐테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주변에 새하얀 빛이 확 들어차더니 거짓말처럼 없던 것이 짠하고 생겨나기 시작했다.
푹신한 느낌이 드는 커다란 소파와 그리 크지 않은 테이블 하나를 중심으로, 온통 종이와 책으로 가득 둘러싸여 있는 신비한 광경. 그중에서도 라텐테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정확하게 소파가 있는 곳이었다.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정확히 소파의 정 중앙을 가리키는 그의 손끝을 보며 감탄할 새도 없이, 그의 팔이 홱 그녀를 이끌어 소파에 눌러 앉혔다.
그리고는 벽에 붙은 종이 한 장을 보지도 않고 홱 뜯어내 불쑥 내 앞에 내밀었다. 갑자기 뭔가 싶어 받아들었더니, 내 손에 닿은 그 종이는 따뜻한 초코가 든 머그컵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온기에 몸을 살짝 떨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이제 나름 마법이라는 것에 익숙해졌다. 종이로 고작 핫초코를 만들어내는 것 정도야, 뭐. 나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는 손에 들린 초코를 자연스레 홀짝였다. 그것은 내가 평소에 자주 만들어 먹던 그 맛과 똑같았다. 익숙한 느낌에 별로 편안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소가 슬쩍 흘렀다.
“맛있네요.”
“그래? 다행이네. 그거 마시면서 마저 들으면 되겠다.”
내가 미소를 지으니 그도 마음이 좀 편해진 듯, 픽 웃음을 흘리고는 내 옆에 쓰러지듯 주저앉더니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남아있는 마법사들은 엄청 민감할 거야. 꽁꽁 숨겨져 있던 마법이 봉인이 슬슬 풀려가면서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까. 남은 마법사가 정말 극소수에, 아직 봉인이 완전 다 풀린 게 아닌 데에다 내가 옆에 붙어 있어서 이 정도지. 사실 딱 한 명 빼고는 누가 들러붙어도 별 문제가 없는데……이번에 보인 놈이 그놈일지도 모르거든.”
“그놈이라뇨? 여자였는데?”
“그러니까 추측이잖아. 내가 아는 그놈은 분명 남잔데, 네가 본 건 여자라고 하니까.”
나는 그냥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반박이었는데, 이 문제가 그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그 고운 은발을 마구 흩뜨리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 모습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엿보인다.
참, 두려움과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더 불안하다. 누가 들러붙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에게, 유일하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그놈’이란 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해제의 마법사거든. 어떤 자물쇠도 그 녀석 앞에선 소용이 없어. 마법으로 된 자물쇠도 마찬가지고.”
“그 말은…….”
그의 대답에 맞장구를 치려던 나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사실에 온몸에 쭈뼛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어 말을 끊고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은 짧았지만, 그 뒷말을 듣지 않아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마법사는 나의 봉인이 스스로 풀리길 기다릴 필요조차 없다. 왜냐면 그 자신이 내 봉인을 풀 수 있으니까. 봉인이 있었기에 여태껏 안전했던 나는, 그에게서만큼은 안전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에 잠식되어가기 직전, 문득 이상한 점이 나를 그 구렁텅이에서 꺼냈다. 물론 완전히 건져진 것은 아닌지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지만.
“잠깐, 잠깐만요.”
“응, 왜?”
“그, 그럼……왜 진작부터 날…….”
왜 진작 나를 잡으려들지 않은 건가요, 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잡아먹힌다는 무서운 상상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뒤덮는 탓에 말이 잘 이어지지가 않았다. 상대가 못 알아듣기까지 하면 정말 답답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내 불친절한 단어 나열에도 라텐테는 마치 내 말을 다 들은 것처럼 내가 원하는 대꾸를 즉각 뱉어냈다.
“그때는 봉인 자체를 못 찾을 상황이었으니까. 아무리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물쇠가 없으면 의미가 없잖아. 그런 맥락이지. 근데 이젠 봉인이 드러난 상황이라서……아니, 그보다는 사실 그냥 그놈이 맞으면 그냥 찾아서 조지면 되는데……네가 말하는 마법사가 그놈이 맞는지 모르겠어, 아니 그냥 모르겠어.”
그는 언제 챙겨온 건지, 무릎에 놓인 황금색 장부를 펼쳐 그녀가 휘갈겨 쓴 성의 없는 고대어를 한 번 슥 손으로 훑어 내렸다. 그 자리에 빛이 잠깐 머무른 것을 보니 마법을 쓴 듯했다. 그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듯 기묘한 곡선을 그리면서 희미해지는 빛줄기 사이로 그의 중얼거림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내가 아는 붉은 눈동자의 마법사는 그놈뿐인데……여자, 여자라……이제 나타난 걸 보면 오늘 도서관이 잠깐 없어졌을 때 눈치 챘을 가능성이 큰데……그런 거라면 원래 여기서 지내던 놈이라는 거고……내가 알기로 그놈은 아타나움 쪽에 살고 있고……첫 번째 봉인이 풀렸을 때 불쑥 안 나타난 것도 그렇고……내가 모르는 다른 놈인 걸까……으아악! 머리 아파!”
쉽게 결론지어지지 않는 상황이 답답했는지, 라텐테는 답지 않게 난폭해져서는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집어던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슬쩍 돌려 그를 올려다보니, 잔뜩 찌푸려져 있는 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정말 잘생겼구나, 하는 같지도 않은 것이라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잔뜩 굳은 표정으로 일어난 라텐테가 벽에 있는 종이 몇 장을 후드득 떼어내면서 던진 다음 말에, 나는 내가 한 생각은 별로 웃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고파서 집중 안 된다. 일단 뭐라도 먹어야지. 밥 먹자!”
============================ 작품 후기 ============================
이런 글도 재미있다고 말씀해주시는 독자분들이 계시기에 저는 오늘도 힘을 내어 글을 씁니다...오늘 흘리는 눈물은 감동의 눈물 8ㅁ8
그나저나 글이 안 쓰여서 짧게 짧게 올리게 돼서...어쩌면 편수가 40편을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는...
절대 50편은 안 넘을 예정이에요 '-';
선추코 감사합니다! 남녀가 한 집에 있는데 @!#$#!%@#$한 일은 없고 무한 설명충만 되고 있엌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