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6 Chapter 6. 강점이자 약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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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변을 잔뜩 에워싼 여학생들 사이를 익숙하게 가르며 책장에서 책을 쏙쏙 골라 뽑던 라텐테는, 계속해서 걸어오는 여학생들의 말을 하나하나 다 받아주면서도 마지막에 연신 ‘이제 그만 좀 가면 안 될까?’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변했어요, 라테!”
“내가 뭘? 뭐가 변했는데?”
“옛날엔 이렇게 매몰차지 않았어요!”
“내가 어디가 어떻게 매몰찬데?”
“자꾸 쫓아내려고 하잖아요!”
따지고 드는 여학생의 이마를 한 대 콩 쥐어박은 라텐테가 피식 웃었다.
“쫓아낸다고 너네가 가냐?”
그의 말에 왁왁 대들던 여학생의 입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확실히 애들이라 그런지 반응이 참 크고 재밌긴 하다. 할 말이 없으니 뚱하니 그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이마를 한 대 더 쥐어박았다. 소녀의 입술이 인중 끝까지 올라왔다.
그런 그녀를 지나쳐 이번엔 다른 소녀의 장단(?)을 맞춰주려던 라텐테의 눈에 문득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한 인영이 들어왔다. 그 인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까 필요한 책을 쥐어주고 힘들게 돌려보냈던 소녀 중 하나였다.
애들이 그를 좋아하긴 하지만, 일단 한 번 상대해주고 나면 다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를 차지하려는 다른 소녀들의 뭇매보다 무서운 따가운 시선들을 감수해야 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그가 시선을 돌리자마자, 그런 그의 시선을 따라 그의 주변에 있던 소녀들의 시선도 일제히 돌아갔다. 하지만 그 눈빛이 그를 볼 때와는 사뭇 다르다. 선망에 반짝이던 눈동자가 경쟁자를 향한 칼날로 바뀌는 것은, 감정과 표정이 풍부한 십대 여학생들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마법사들보다도 더 무섭단 말이야.
아무 생각 없이 가던 길을 우회하고 그에게로 돌아오던 그 여학생도, 곧 저를 잡아먹을 것 같은 그 흉흉한 시선을 마주하고는 순간 움찔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그를 향해 전투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아하니……꽤나 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저 시선을 뚫고 들어올 정도의 용기라면 상대를 해주는 게 맞겠지. 라텐테는 이번에 상대해주려던 여학생에게 잠깐만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해보이며, 그의 주변을 에워싼 소녀들의 벽을 어떻게 뚫어야하나 주변을 살피고 있는 소녀를 위해 직접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가 필요한데, 또?”
“아, 그러니까요. 음…….”
‘빨리 말하고 꺼져!’라고 말하는 듯한 무시무시한 눈빛―특히 지금 그의 상대가 되었던 여학생의 그것이 가장 강렬했다―에, 입을 열려던 소녀의 입가가 경련했다. 하지만 그의 가드는 한 사람만을 위한 것, 굳이 시선을 치워줄 생각은 하지 않으며 라텐테가 심드렁하게 그녀를 재촉했다.
“나는 상관없는데, 빨리 말하고 가는 게 네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하지만 그 태도는,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바뀌었다.
“레이 언니가 이상해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뭐?”
“막 뭐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고……몰라요. 평소랑 달라요.”
클레이브의 이름이 나온 순간, 라텐테의 태도가 눈에 띄게 급박하게 변해갔다. 어제 안 좋은 일이 있긴 했지만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혹시 그 때문에 괜찮은 척 한 건가? 하지만 클레이브는 그 정도로 제 속내를 잘 감추는 여자가 아니었다. 특히 그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니, 무엇보다도 아까 방금 그를 쫓아낼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그새 무슨 일이 생겼나? 뭐지? 그는 눈만 슬쩍 돌려 클레이브 쪽을 보았지만, 너무 멀어서 그녀의 안색을 살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확인이 안 되니 더 불안해! 라텐테의 표정이 순식간에 불안으로 가득 찼다. 그는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리며 일단 침착해지려 애썼다. 그녀에게 가기 위해선 일단 이 정신 살상 무기들을 치우는 것이 먼저였다. 라텐테는 그에게 클레이브의 상태를 전해준 소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그렇게 소녀를 보내고 난 후의 라텐테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급박함이 서렸다. 여유가 사라진 그의 태도가 정말로 ‘변했다.’
아까 전까지는 말만 가라고 했던 그가, 이젠 손수 소녀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의 손길을 받는 소녀들은 얼굴이 발갛게 되어 좋아하다가도, 평소보다 더 오래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며 그에게 따지고 들었다.
“아직 문 닫으려면 한참 남았잖아요!”
“클레이브 아플 지도 모른다잖아. 빨리 가. 오늘 일찍 닫을 거야. 대신 다음에 더 놀아줄게.”
“이거 봐! 변했잖아!”
“변했으니까 가.”
정말로 매몰차게 변한 그에게 등을 떠밀려 강제로 도서관에서 쫓겨난 소녀들은, 장부에 사인을 하면서도 투덜거리기 바빴다.
“치, 언닌 좋겠다. 라테가 저렇게 챙겨주고.”
“나도 언니만큼 예뻤으면 좋겠어.”
“아니야, 언니보다 더 예뻐야 라테가 봐주지.”
평소 같으면 웃는 얼굴로 대꾸했을 클레이브에게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눈은 또렷한 빛을 띤 채로 장부에 두고 있지만, 그 애가 말했던 것처럼 확실히 어딘가 넋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가 대놓고 시선을 줘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라텐테는 소녀들의 뒤에서 그녀의 상태를 눈으로 살피며, 소녀들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씩 콕콕콕 찌르며 입을 열었다. 말은 그들에게 한 것이지만, 실상은 클레이브에게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웃기지 말라 그래. 너네가 아무리 예뻐도 난 클레이브 뿐이다, 이것들아. 클레이브 괴롭히지 말고 빨리 가.”
“헐…….”
“진짜 변했어!”
일부러 말도 평소보다 더 닭스럽게 했다. 과연, 멍하니 아무 소리도 못 듣는 듯했던 그녀가 그 말에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뾰족하게 날카로운 빛을 띠며 그의 눈에 닿았다.
“……미쳤어요? 왜 그래요?”
별로 기꺼운 시선은 아닌데도, 그녀가 저를 봐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다. 그녀에게서 대꾸가 흘러나오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며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뭐 어때. 이제 너도 나한테 마음을 열었으니, 우리한테 남은 건 저 너머로 폴인 럽…….”
“야!”
이 절을 했더니 그녀가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당황했는지 부르는 호칭까지 과격해졌다. 일어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몸이 아픈 건 아닌 것 같았다. 안도감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는 푸흐흐,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데스크로 넘어와 한 손은 클레이브의 머리 위에 얹고, 나머지 한 손은 펜을 들어 소녀들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자, 사인해. 오늘은 영업 종료야. 내일 와.”
“엥? 영업 종료라고요? 지금 시간이…….”
까칠한 세 소녀의 시선에 눈치를 슬슬 보며 머리 위에 올려진 손을 떨쳐낸 클레이브가,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시계를 슬쩍 보았다. 아까 일에 끙끙 앓으면서 넋 놓고 있는 새에 시간이 벌써 다 됐나 싶었는데, 시간을 보니 전혀 아니다. 아직 다섯 시도 안 됐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봤는데, 대답은 그가 아닌 그들의 앞에서 장부에 사인을 하고 있는 여학생들에게서 흘러나왔다.
“언니 아파보인다고 오늘 일찍 문 닫는대요.”
“부럽다. 라테가 이렇게 신경도 써주고.”
“그치만 내일은 이렇게 안 갈 거예요!”
쟤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클레이브의 눈매가 어서 설명을 하라는 듯 더 구겨졌지만 라텐테는 긍정도, 부정도, 보충 설명도 없이 그들을 향해 무덤덤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알겠으니까 오늘은 가.”
그의 단호함이 뚝뚝 흐르는 배웅(?)에 소녀들은 입을 비죽이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클레이브를 한 번 노려보고는, 도서관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나니, 도서관이 고요에 가득 찼다. 모르고 있었는데, 이 이른 시간에 벌써 사람이 다 빠진 것이다.
“……다 간 거예요?”
“응. 네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길래 다 쫓아냈지. 무슨 일 있어?”
“아…….”
그의 물음에, 잠시 풀렸던 클레이브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몸이 살짝 떨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봐선 그 트라우마에 대한 문제는 아닌 듯한데……혹시―,
불길한 예감에 라텐테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때 클레이브가 장부를 그에게 가져와 펼치며,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거 봐요.”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그의 예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런.”
숨바꼭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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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건네준 장부를 본 라텐테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로움이 묻어 나오던 눈동자가 서늘하게 굳어있고,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매도 날카로운 직선이 되어 있다. 안 그래도 계속 불안했는데, 그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더 불안해졌다. 정말로 문제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클레이브.”
“네, 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덩달아 긴장해, 몸이 얼어붙었다.
“근데 애들은 너 레이라고 하는데 나는 안 돼?”
……응? 뭔가 이상한데?
“네?”
“나도 애칭 부르게 해줘.”
“……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인상을 찌푸렸는데, 그는 정말로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아니, 심각한 게 그거 때문이었어? 긴장이 풀려 어깨에 힘이 빠졌다.
“뭐에요, 난 심각한데. 이거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안도감인지 허무감인지 모를 기분을 느끼며 헛숨을 터뜨리자, 라텐테가 볼을 슬쩍 긁으며 대꾸했다.
“정신 못 차리길래 한 번 그냥. 당연히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잖아. 혹시 이거 적은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
“어…….”
저 인간이 진짜……지금 장난칠 상황이냐. 내가 그를 째려보았지만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은 안 하는지 어깨만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근데 그것도 진심이야. 그나저나 이상하네. 오늘은 별로 그렇게 눈에 띌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거야 그렇겠죠. 매일 진저리나게 오는 아카데미 여학생이었는걸요.”
“뭐?”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이 대답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얼굴이다.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요, 더 불안하잖아.
“왜요……?”
“아니, 뭔가 이상해서……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해?”
되묻는 그의 말에, 나는 아까 전에 보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음, 어떻게 생겼었더라……사실 예쁘장한 얼굴이라 기억에 남을 만했는데, 너무 강렬하게 남은 몇 가지 특징 때문에 나머지의 기억은 흐릿했다.
“일단 눈매가 완전 사나웠고, 눈동자가 엄청 빨갰어요. 거기에다 손이 엄청 차가웠다는 것밖에…….”
“……눈이 빨갛다고?”
라텐테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뭔가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사람 마냥 심각한 얼굴이다. 그가 항상 여유로운 표정만 짓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본다. 근데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모르니 답답한 마음에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라테 왜 그런…….”
“레이, 안 되겠어. 오늘 집에 가지 마.”
불안감은 몰라도 답답함이라도 해소해보려고 그에게 질문을 하려 했는데, 내 말을 끊고 들어오는 그의 말에 나는 내가 하려던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네?”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니?